대담자
·권창식 (은퇴장로)·김측도 (은퇴장로)·오성광 (담임목사)·최유찬 (은퇴장로)·최일파 (은퇴장로)·홍관표 (원로목사)·홍순도 (은퇴장로)
사회 : 김명동 (본지편집인) 사진 : 권순형 (본지 발행인) 일시 : 2011년 5월 5일 (목) 장소 : 시드니중앙장로교회 교육관 사회자| 시드니중앙장로교회(이하 중앙장로교회) 창립 30주년을 축하합니다. 오늘 창립 30주년을 맞은 기념으로 ‘시드니중앙장로교회 30년을 말한다’라는 주제로 특집대담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번 대담에서 중앙교회 30년 사역을 정리하면서 그의의를 짚어보고자 합니다. 중앙장로교회 30년 사역을 정리하는 일은 중앙장로교회를 위해서는 평가의 자료로 참으로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교회의 입장에서 볼때는 너무 드러내는 듯이 보일까봐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다만 성도들도 다른 성도들을 통해 배우듯이 교회들도 또 다른 교회를 통해 각각 다른 여건 속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면서 배울 수 있으리라 기대해 봅니다. 물론 중앙장로교회의 미션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중앙장로교회가 결코 완전한 모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중앙장로교회는 격동의 한인이민사회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걷기를 두려워하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 길이 걸어갈 만한 가치가 있는 길이었음은 이미 30년의 역사를 통해 현장에서 검증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중앙장로교회가 걸어온 그 길을 주목할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오늘 참석하신 분들은 그동안 수고와 헌신으로 섬기시다가 은퇴하신 분들이시기에 지난 30년의 발자취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보실 수 있다고 생각되어 이렇게 모시게 되었습니다. 먼저 지난 30년간 한인사회와 맞물려 변화해 온 중앙장로교회의 초창기 모습을 회고해 보고 그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교회성장을 위하여 어떻게 섬겨 오셨는지 아울러 목회프로그램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다음으로는 그동안 힘들고 어려웠던 때는 언제였는지 조명해 주시고 마지막으로는 향후 30년을 향한 당부와 바람 그리고 새로운 계획등을 언급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첫 번째 주제로서 중앙장로교회의 초창기 모습을 회고해 주시면 그것이 곧 중앙장로교회를 말하는 밑그림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홍관표 목사님이 말문을 열어 주시지요. 초창기 모습 홍관표| 제가 호주에 온 것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저는 79년 4월 4일 한인장로교회 청빙을 받아 이곳에 왔습니다. 사실 저는 호주사회나 이민사회에 대해서는 잘알지를 못하고 왔는데 2년 동안 목회하는 가운데 교회가 제가 지금까지 생각하고 목표했던 그런 것과는 전혀 맞지 않았어요. 그 교회는 호주장로교회 소속된 교회였는데 알다시피 저는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고신대학에서 신학을 했고 그 노선에서 목회를 했는데 신학적으로도 맞지 않았고요. 그래서 상당히 갈등을 하는 가운데 호주장로교회를 탈퇴하고 나와서 한국으로 돌아가던지 아니면 화란으로 가서 공부를 더 하고 가려는 마음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신앙생활을 하시던 분들이 거의 따라오셨고 저희 집에서 6주 동안 예배를 드리다가 부활절이 되었어요. 부활절 예배는 어차피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 해서 부활절 예배를 버우드 걸스(Burwood Girls High School)에서 드렸는데 그날 121명이 참석을 했어요. 결국 그렇게 모여서 예배드린 것이 중앙장로교회 창립예배가 된 것입니다. 저의 목회지침은 개혁신앙 노선을 지향했기 때문에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 이 3대 지침이 우리교회 목표였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크게 하고 작게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이 교회는 하나님 말씀을 중심으로 한 그런 교회로서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저는 교인 숫자에 너무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내가 배우고 내가 가진 신학을 기본으로 해서 개혁주의 신앙에 입각한 교인들을 만들어 나가야겠다, 이것이 제 목회의 기본이었습니다. 김측도| 저는 79년 1월 7일 호주에 왔는데 홍 목사님이 4월 부활절을 중심으로 해서 호주로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당시 저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때가 아니고 교회에 나가야 친구를 만날 수 있다, 그래서 교회에 출석을 하게 됐는데 그때 30-40명 정도가 모여서 홍 목사님 설교 테이프를 가지고 예배를 드리고 있더라고요. 사실 그 당시 교민 수가 2천여 명 되었는데 교회가 하나의 교제의 장소였죠. 4월에 홍 목사님이 오시고 5~6개월 지나 한 번 교회를 가보니까 교회가 가득 찼더라고요. 거의 150여 명 됐을 겁니다. 그런 후 가끔 교회에 나가곤 했는데 교회가 부흥하는 걸 볼 수가 있었습니다. 언뜻 그런 생각을 했어요. ‘목사님 참 설교 잘 하시네.’ 왜냐하면 저는 오랫동안 교회는 안 나갔지만 어릴 때 교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듣는 귀가 있잖아요. 그러나 여전히 교회에 소속되지 않고 그저 왔다 갔다 하는데 이상한 소문이 들리는 겁니다. 급기야는 홍 목사님을 쫓아내야겠다며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서명을 받았어요. 홍 목사님이 호주교단의 지침을 안 따른다, 그래서 계속 말씀을 드렸는데도 안 듣고 해서 이런 일을 한다, 그러더라고요. 그때 제가 따끔하게 한마디 했어요. “그런 짓 하지마라 어디서 서명 받으러 다니고 이런 짓을 하고 있느냐, 목사님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드려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런 말을 한 겁니다.
교회가 그런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을 보고 어느 날 교회에 나갔는데 홍 목사님이 설교를 마치시고 난 후 교단을 탈퇴하겠다고 선포를 하시더라고요. 깜짝놀랐어요. 목사님이 여기에 오셔서 제대로 자리를 잡은 입장도 아니신데 교단을 탈퇴하면 갑자기 어디로 가시려고 그러실까, 의아했고 한편으로는 용기가 참 대단하시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저도 호주장로교단의 모습이 세속적인 신앙이라고 느끼고 있었는데 홍 목사님도 거기에 몸을 담아서는 바른 교회를 세울 수 없다고 생각을 하신 것 같아요.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사실 저는 이민을 와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교회에 나간다면 저 목사님을 따라가야지 제대로 된 신앙인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결국 중앙장로교회가 시작이 됐는데 그렇지만 저는 바로 중앙장로교회에는 출석을 하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한인교회에 친구가 많았으니까요. 제가 중앙장로교회에 첫발을 디딘 것은 Dulwich Hill Uniting Church로 교회를 옮긴 후 3~4주 후 일겁니다. 그때 저를 본 사람들은 놀랐지요. 그 쪽에 친구가 많은 사람이 어떻게 이 교회로 왔나 하고요. 권창식| 저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죠. 저는 배 엔지니어로 상선을 타고 있었는데 뉴질랜드를 통해서 호주에 왔습니다. 월남이 패망하고 난 후 월남에서 싱가포르로 나온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런 사람들 중 싱가포르에서 몇 사람을 만났죠. 이 사람들이 오갈때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보니까 이 사람들이 엔지니어 면허증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그때 제 위치가 배에서 괜찮았으니까 좋다, 책임지고 직장을 알아볼 테니까 배를 탈 용의는 있느냐고 하니까 좋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배를 태웠는데 이 사람들의 목적지가 호주였어요. 저도 원래는 뱃사람이 아니고 이민을 가기 위해 공부를 해가지고 배를 탔거든요. 그래서 이 사람들과 뉴질랜드를 거쳐 3주 비자를 받고 1975년 10월에 호주에 왔죠. 이곳에 와보니까 그 당시 교회는 연합교회 하나밖에 없었어요. 연합교회에 몇 주 나가다가 다윈으로 올라갔어요. 다윈 쪽에 태풍이 불어 피해가 컸는데 피해복구하는데 건축기술 인력이 필요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곳에 올라가 있는 동안 홍 목사님이 호주에 오신다는 얘기를 한국에 있는 가족으로부터 들었지요. 사실 우리 가족은 한국에서 고신 측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해서 이미 홍 목사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후 시드니로 내려와 한인교회에 출석했죠. 그때가 1979년인데 제일 큰 교회였습니다. 그 당시 한인사회에서 힘 좀쓰는 사람들은 다 참석했으니까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수요예배도 없고 새벽기도회도 없었어요. 구역예배는 있었는데 모이면 술 마시고, 사실 교회 분쟁이 있었을 때 한인사회에서 힘 좀 쓰는 사람들이 대부분 홍 목사님 반대편에 선겁니다. 홍 목사님 편에 선 사람들은 집사 12명과 우리처럼 노동하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리고 노회에 가보니까 장로교회 목사님들이 주일날인데 코가 빨개요. 그리고 틈만 있으면 밖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고, 그래서 결국 호주장로교회를 탈퇴하고 교회를 개척하게 된 겁니다. 최유찬| 저는 78년도 호주에 왔는데 영어학교에서 홍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홍 목사님은 늘 정장을 하고 학교에 오셨어요. 우리는 케쥬얼차림인데요. 그땐 이발도 잘 안하고 히피족처럼 다닐 때거든요. 이상하다 싶어 “선생님은 무엇하시는 분인데 넥타이를 매고 오십니까?” 그랬더니 “제가 목사입니다”그래요. 어느 교회 나가시냐고 물으니 피터샴 교회래요. 교인들은 얼마나 모이십니까, 한 50명 됩니다. 아니 50명 가지고 되겠느냐 하니까 50명을 영적으로 잘 지도하면 이 사람들이 10명씩 전도한다 그러면 5백 명 금방 됩니다, 그러시더라고요. 굉장히 호감이 갔습니다. 교회 오라는 말씀은 안 하시고 우리 집에 와서 식사나 한 번 하자고 하셔서 찾아 갔어요. 그 당시에는 혼자 있었으니까 배도 고프고, 가서 식사 대접받고 사모님도 그때 처음 뵈웠습니다. 피터샴 한인교회에서 홍 목사님은 교인들을 잘 지도하시려고 많이 노력을 하셨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세상과 양다리 걸치며 이런저런 조건을 제시했는데 홍 목사님이 안 들어 주시니까 반기를 든거지요. 권창식| 사실은 연합교회에서 나온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목사님께 반기를 들었는데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집사 임명할 때 세 가지 생활지침을 정해 놨어요. 주일성수, 십일조 생활하고 가정이 온전할 것, 여기에 안 맞는 사람은 그 교회 창립에 어떤 공이 있더라도 집사 임명에서 제외했어요. 그러니까 제가 생각해도 그 사람들이 화가 났을 겁니다. 그 사람들이 교회를 세우고 목사님 청빙까지 했는데 집사 임명할 때 그 사람들이 다 떨어졌어요. 한 사람도 안 된 겁니다. 그때 최일파 장로님은 용접을 하고 저는 보일러 메이커로 일하고, 이렇게 근근이 사는 사람들이 전부 집사가 되었으니까 화가 난 거지요. 최일파| 저는 호주에 온 이후 그리스도한인교회를 개척했어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장로교 합동 측 교회에 다녔기 때문인지 신학노선에 갈등을 하는 가운데 어느 수요일에 홍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죠. 그때 이곳이 내가 있을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후 한인교회로 옮겼습니다. 얼마 후 홍 목사님이 주일날 갑자기 호주장로교회를 탈퇴한다고 선언을 하시는 겁니다. 사실 그 당시 목사님의 목회철학에 많은 사람들이 반발을 했어요. 왜냐하면 수요예배를 드리고 새벽기도를 한다고 하니까 반발을 한 겁니다. 하지만 홍 목사님의 목회철학을 따라서 개척할 때 나오신 분들은 건전한 신학노선을 좋아했습니다.
홍관표| 지금 얘기를 들으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았는데 저를 쫓아내려고 연판장을 돌렸다는 것을 전혀 몰랐어요. 목사를 쫓아낸다는 이야기는 참 무시무시한 얘긴데 목사를 어떻게 쫓아냅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인데요. 제가 초창기에 개혁주의 신학노선을 택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와서 보니까 교인들의 생활이 이건 신앙생활이 아닌데도 그러면서도 신앙이라고 하고 이 분들에게 청교도적인 생활을 실천하면서 가르쳐야 되겠다, 그래서 초창기부터 제가 굉장히 강력하게 보수적인 목회를 시작한 것 같아요. 사실 처음에 오자마자 20분 이상 설교를 하지 마십시오, 여기는 전부 이민자들이기 때문에 피곤하니까 낮에 한 시간 정도하고 그냥 식사하면서 교제를 할 수 있도록 거기에 중점을 두십시오. 그리고 그땐 저녁예배나 새벽기도회가 전혀 없었고요. 그래서 제가 어느 날 저녁예배부터 시작을 하면서 새벽기도회도 합니다 라고 공포를 해버렸어요. 그리고 구역회를 시작하고 성경공부에 중점을 두고 가르치고 그렇게 해서 2년 동안 굉장히 부흥이 됐어요. 그런데 그때 호주장로교회를 보면 완전히 좌경화되어 버렸어요. 뭐 여 목사, 여 장로, 담배를 다 피우고 엉망이었어요. 노회도 참석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주의 신학이었고 교단지침을 따르라고 강력하게 요구했어요. 자유주의하고 보수신학하고는 노선이 다릅니다. 자유주의라는 것은 인간 비위에 맞춰서 이성으로 판단해서 믿을 건 믿고 그러니까 성경대로 믿지 않는 겁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아무래도 새롭게 내 목회에 맞는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한 교회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죠. 제가 나올 때 장로교회 노회원들이 다 와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이 교회는 누가 맡더라도 문제가 됩니다. 그러니까 목사님, 이 교회를 사임하더라도 장로교단은 떠나지 마십시오. 장로교회는 지금 무어 칼리지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있으면 늙은 사람들은 물러나게 되니까 그때까지 우리하고 투쟁합시다, 그런 정도까지 얘기가 됐어요. 그러나 저는 그때가 되면 당신들하고 다시 유대를 가지겠소, 그러나 난 일단 떠나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떠난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은 신학적인 문젭니다. 사회자| 격동의 이민사회 속에서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고자 하셨던 목사님의 생각은 개혁주의 신앙노선에 청교도적인 신앙생활이었고 결국 이 목회철학이 중앙장로교회의 시작이 됐습니다. 그리고 이 토양 속에서 뿌려진 중앙장로교회는 씨앗이 발아해서 지난 30년을 지나 장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교회성장을 위한 사역들과 프로그램은 어떤 것이었나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교회 성장을 위한 섬김과 프로그램은 김측도| ‘하나님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의 구호가 그냥 구호가 아니고 이 교회에 뚜렷한 하나의 지침이자 목사님 스스로 그것을 실천하셨어요. 저도 교회에 처음 나가서 목사님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왜냐하면 직사포거든요. 피터샴에 있을 땐데 장사를 하게 됐습니다. 목사님에게 위로나 받을까 싶어 찾아갔어요. “목사님 다음 주부터 교회에 나오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왜요?”“플레밍톤 마켓에서 장사를 해야 되겠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대뜸 “그렇게 살기 힘듭니까. 주일날 빠져가면서요?” 그때 그 말을 들었을 땐 화가 나더라고요. 잘되면 돌아오라 이렇게 얘기했으면 좋겠는데 본지 얼마 안 된 분이 그렇게 톡쏘아대면 어떻게 하냐. 그런데 그런 것들이 나중에 교회로 돌아오기 위한 메시지가 되더라고요. 저는 얼렁뚱땅하면 말 안 듣거든요. 교회가 Dulwich Hill로 옮겨갔을 때 공원에서 남선교회 선거를 한다고 했던 것 같아요. 교회에 잘 안 나갈 때인데 공원에 내 딸을 찾으러 갔었어요. 그런데 저쪽에서 사람들이 막 오라고 그래요. 가니까 모두 웃으면서 하는 얘기가 나를 남선교회 회장으로 선출했대요. 속에서 열이 확 나더라고요. 사람을 붙들려고 하면 다른 방법으로 해야지 이렇게 감투 같은 걸 주나, 하면서 그 다음에 교회를 안 나갔어요. 그러니까 목사님이 심방을 오셨어요. 열심히 나오셔야지요, 하셔서 따졌어요. 사람을 붙잡으려고 하면 다른 방법으로 해야지 이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했더니 목사님이 이렇게 된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느냐 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니까 주신 거다, 하시고 가셨어요. 그런 후 가만히 생각하니까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이런 것을 순종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구나 생각하고 교회를 나갔지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 감사합니다. 홍 목사님을 만났기 때문에 새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이민교회의 역사는 곧 중앙장로교회의 역사이고 중앙장로교회의 역사는 홍 목사님과 같이 동고동락 했던 일이 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홍순도| 저는 92년도 말 중앙장로교회에 왔으니까 20년 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30년 역사와는 거리가 좀 있습니다. 그런데 호주에 오기 전부터 중앙장로교회를 알고 왔어요. 또 호주에 가면 교회가 많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그 많은 교회들 중에 어느 교회로 가야 할지 고민이 되더라고요. 사실 전 고신보다 더 보수적인 순장교회에 다녔어요. 어쨌든 호주에 도착하자마자 홍 목사님께 전화를 했어요. 제가 지금 교회를 찾고 있는데 어느 곳으로 가면 좋겠습니까? 댁이 어디냐, 파라마타입니다, 그랬더니 퉁가비에 있는 한 교회를 소개해 주시더라고요. 그 교회를 몇 주 다녔는데 아이들이 적응을 못하고 저도 말씀에 은혜가 안 되더라고요.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중앙장로교회를 찾아간 거지요. 첫째는 말씀인데 말씀이 참 좋았어요. 아이들도 좋아하고요. 그리고 성경공부 시간에 말씀도 깊이 있게 잘 가르쳐 주셨어요. 최일파| 제가 덧붙이면, 초창기에 이민와서 힘들고 갈급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었던 것 같아요. 그 당시 교회가 몇 개 있었지만 많은 분들에게 소문이 나게 된 것이 말씀 같아요. 말씀이 좋아서 왔다는 분들이 상당이 많았거든요. 또 기도를 많이 했어요. 우리가 함께 모여 어떤 때는 밤 12시-1시까지 기도를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교인이나 어려운 사람들이 목사님한테 전화를 하면 목사님이 찾아가 보라고 전화를 주십니다. 그러면 새벽 1시라도 찾아갔어요. 그러니까 목사님의 말씀과 찬양대와 정신없이 봉사하고 뛰어다녔던 이런 모든 분들의 헌신이 부흥의 요인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최유찬| 맞아요. 목사님 댁에서 식사 대접을 받을 때인데요, 사모님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목사님이 없어지셨어요. 그 날이 토요일이었는데 보니까 녹음기 갖다 놓고 설교준비를 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 정도로 열심히 설교준비를 하셨기 때문에 설교를 듣고 우는 사람이 많았어요. 왜냐하면 이민 와서 고생을 많이 하고 생각하면 서글프고 영주권도 없지요, 이렇게 힘들어 있는데 그 말씀이 다 가슴에 와 닿는 겁니다. 성경공부도 철저히 가르치시고 참 열심히 하셨어요.
그리고 이민 초창기였기 때문에 구역장님들 수고 많이 하셨어요. 복덕방 돌아다니며 집 찾아주고 아이들 학교 넣어주고 우리가 이렇게 섬김을 다했죠. 목사님은 오로지 설교준비 하시라고요. 또 어떤 문제가 있을 때마다 기도하시고 난 후 제가 기도하고 지금 의논을 드리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신뢰를 가지고 그러면 목사님이 알아서 결정하세요, 우리는 그저 따라가겠습니다, 하면서 신뢰를 가지고 섬겼어요. 목사님과 교우들 간의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느끼고 있습니다. 권창식| 설교준비도 철저히 하셨지만 시간관념도 정확하세요. 한 번은 총영사 따님이 결혼식을 했어요. 총영사 따님이니까 캔버라 대사관에서도 손님들이 왔어요. 그런데 신부가 도착을 안 했는데 목사님이 시간이 되었다고 시작을 하시는 겁니다. 보통 결혼식을 하면 반시간 늦는 건 관행처럼 되어 있잖아요. 목사님이 정시에 딱 시작을 하니까 신부 없이 결혼식이 시작된 겁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신부를 데려오고 야단법석이었어요. 그날 캔버라 대사관에서 오신 분들이 내 옆에 앉았는데 아, 이런 교회도 있느냐 결혼식을 하는데 이렇게 정확한 시간에 한 교회는 처음 보았다고 얘기하더라고요. 설교도 그래요. 설교를 반 시간 정해놨으면 딱 반 시간에 설교를 끝내십니다. 예배시간도 한 시간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많이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민교회 하는 분들 중에 교회행정에 대해서 모자라는 부분이 참 많지 않습니까? 목사님은 교회행정에 대해서 잘 아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회법이라든지 내규라든지, 그래서 우리교회 출신들이 다른 곳에 가면 이런 부분들을 얘기 하더라고요.
사실 초창기 때 분위기도 참 좋았어요.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없었어요. 우리는 서로를 잘 알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김측도 장로님을 세워주려고 무척 애를 썼어요. 왜냐하면 그 당시 우리는 노동하고 있었는데 교회가 제대로 되려고 하면 좀 똑똑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선교회장으로 세웠는데 회장이 되니까 가끔 농땡이는 피웠지만 열정이 있었어요. 나 같은 사람은 신앙생활은 오래 했지만 미지근했거든요. 아무튼 굉장히 열심히 했고 홍 목사님을 만나 훌륭한 일꾼이 된 겁니다. 그때 교회가 수요예배를 안 볼 때인데 우리끼리 모여서 수요예배를 봤잖아요. 교인들 이삿짐 날라주고 심방도 했어요. 목사가 가야 심방이지 하며 나중에 목사님한테 야단도 많이 맞았습니다. 우리들 그때 정말 대단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아, 내가 줄을 잘 섰구나, 나 같은 사람 좋은 목사 만나고 좋은 동료들 만났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서있구나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김측도| 이런 이야기 나오면 끝이 없어요. 어쨌든 우리가 말씀으로 훈련을 잘 받았지요. 직분을 받고도 모임에 참석을 안 하면 목사님에게 크게 혼났어요. 솔선수범하고 앞장서서 일하고 교회를 섬기는 이런 과정들이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독립교회로서 일찍부터 우리는 평신도 선교사 파송하는 일, 원주민 선교 시작하는 일, 창립 10주년기념 부산장로성가단 초청하는 일 등 큰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세계선교대회도 저희 교회가 주관이 되어 성대히 치렀습니다. 120명이 모였는데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인재들도 있었고 섬김이 있었고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합니다. 또 하나 기억이 나는 것은 원주민 선교사 에드워드입니다. 우리가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해서 원주민 선교사를 키웠다는 것은 저희들의 자랑거리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부산장로성가단이 이곳에 와서 비전을 보고 기금을 마련해줘서 우리가 허버트 에드워드라는 원주민 선교사를 길러냈는데 정말 그 사람은 기르기 힘든 사람이었어요. 조금 돈만 생기면 가서 술 먹고 마약하고 그때 선교 담당하던 분들은 그이야기만 들으면 그 사람을 찾아가서 같이 끌어안고 울고 같이 기도하고 돌아오면 얼마 후 또 없어지고, 한 5년 동안에 일곱 번 정도를 들락날락하면서 계속 섬겼는데 나중에 이 사람이 통곡하면서 울었어요. 성령이 이 사람을 터치한 겁니다. 나는 태어나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뭔데 나에게 이런 사랑을 베푸는 것이냐 하며 통곡을 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원주민 지역으로 가서 섬기고 있습니다. T 목사님도 오랫동안 계속 후원하여 키워가지고 현지 지도자로 쓰는 이런 일들은 좋은 본보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동안 투닥거리기도 했어요. 그런데요 그때는 교회의 일이라면 첫 번째로 했어요. 그러니까 교회 행사가 있으면 직장을 쉬고 전부 오는 걸 원칙으로 했으니까요. 교역자협의회에 식사를 대접한다고 그러면 전부 다 나와 우리가 직접 서빙했습니다.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교회당 구입할 때도 교회당을 구입할 때까지 우리도 집 안사겠다, 집을 가진 분들은 내 집을 팔겠다, 이런 헌신과 열정들이 있었어요. 지금 교회가 30주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우리는 열정이 살아있어요. 그래서 교회를 위해 후세대를 위해 기도하고 뒤에서 보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지 않느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홍관표| T 목사님이 처음에 호주 올 때는 공산주의자로 왔거든요. 그래서 우리 청년들 하고 공산주의가 왜 나쁘냐며 굉장히 옥신각신 했어요. 그런 분이 변화되여 중국에 가서 자기 가족들 친척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예수 믿게 하고 그리고 고신대학에 가서 신학을 해서 목사가 됐어요. 지금 중국에서 교회를 세워 사역하고 있는데 교회가 상당히 충실한 교회로 세워져 있고 신학교를 세웠어요. 사실 중국에 복음적인 일꾼이 별로 없어요. 이 분이 그걸 느끼고 아무래도 복음적인 일꾼들을 양성해야 되겠다면서 신학교를 세웠는데 가보니까 한 30여 교회 전도사님들이 와서 교육을 받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중국에 벌써 우리교회가 한 교회만 세운 것이 아니고 30여 교회를 세운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정도로 중국에서 큰 일을 하고 있어서 대양주한인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직영 신학교로 해서 교회별로 많은 후원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중앙장로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가 그만한 일을 했으니까 중앙장로교회가 중심이 돼서 지금도 후원이 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앞으로 그 신학교를 통해서 복음주의적인 일꾼들이 중국에 많이 배출되면 중국의 교회사정이 많이 달라질 것이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권창식| 언젠가 우리 교회 여자청년이 결혼을 하는데 한국에서 초청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우리 교회에서 열심히 활동을 잘하는 청년입니다. 목사님께 와서 한국에 있는 그 사람을 초청하려면 결혼했다는 사인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는데 목사님이 안 된다고 하셨어요. 결혼도 안 했는데 왜 했다고 그러느냐 해줄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 청년이 우리 교회를 떠났어요. 목사님이 그런 성경적인 목회를 하시는 것이 우리들 눈에 많이 보였어요. 그리고 지금도 우리 교회에 있는데 초창기 멤버입니다. 그 분의 딸이 동거를 했어요. 딸의 주례를 목사님께 부탁을 했어요. 목사님이 안 된다, 나는 동거하는 사람 주례는 절대 안 한다, 그 집사님이 우리하고 친했기 때문에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서 목사님이 다른 사람에게도 그러시는지 물어요. 목사님은 이렇게 기준을 세워놓고 이 기준에 어긋나면 절대로 안 하셨어요. 좀 섭섭한 사람이 있더라도 불만할 수가 없는 겁니다. 왜? 똑같이 그렇게 하니까요. 불법이면 절대로 안 해주고 주례도 교회에서 아무리 충성하는 사람이라도 법에 어긋나면 안 해줍니다. 목사님이 이렇게 카리스마적인 목회를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직선적으로 공격도 하고 그러셨지만 교회가 부흥된 것은 이렇게 일관성 있는 목회를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왔지 않은가 생각을 해봅니다. 사회자| 중앙장로교회 사역은 너무 방대하고 엄청나서 다 들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 중에 관심 있는 부분이 선교와 새가족반인데 선교는 이미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새가족반 운영에 대해서 언급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측도| 사실 우리교회 새 가족반은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부교역자가 없는 교회들을 보면 이 부분에 상당히 어려움이 많더라고요. 우리교회는 처음 시작할 때 새신자반으로 출발을 했는데 홍 목사님이 저한테 맡기셨어요. 그때 저는 부족하지만 순종하는 게 축복의 통로라 생각하고 시작을 했는데 교재도 없었고 아무 준비도 없었어요. 그것이 발전이 되어 새가족반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정착이 된 건데 김영수 목사님이 오셔서 모델을 보여주시면서 가르쳐 주셨어요. 새 가족반이 교회의 중요한 시스템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일단 교회에 처음 오시면 어떤 직분을 가졌던지 새 가족반 과정을 거치도록 하고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직분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성가대하겠습니다. 교사하겠습니다, 절대 세우지 않아요. 아직도 복음이 제대로 정리가 안 된 사람들을 직분자로 세울 수는 없잖아요.
물론 교회마다 다르지만 제가 첫 번째 반을 맡았는데 이 반에서는 복음의 심플한 것을 요약해서 전해드리고 홍 목사님 반에 들어가면 8주 과정으로 마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이단성이 있는 사람도 걸러지고 이 사람을 직분자로 세워도 되는가, 거기서 모두 걸러져요. 그래서 교회의 비전에 공유가 될 수 있는 사람이래야 어느 자리에 가던 봉사를 할 수 있는 이런 시스템은 교회를 바르게 세우는데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 과정을 거친 분들이 봉사를 하게 되고 직분을 맡게 되는 거죠. 또 이 과정을 통해 교회 소속감도 생기게 됩니다. 최유찬| 우리 교회에 새가족반 인원이 참 많았어요. 그런데 그분들이 이구동성으로 얘기하는 것이 뭐냐면 홍 목사님의 설교는 기본적인 설교인데도 왜 그렇게 은혜가 되냐, 그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교리 부분이라든지 심플한 설교에 감동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가 말씀중심으로 기초를 잘해야 교회가 부흥되겠구나, 그런 걸 느꼈습니다. 사회자| 한국교회가 양적으로 급성장하던 시기에, 교회를 바르게 세우고자 했던 목사님의 비전과 여러분들의 섬김이 중앙장로교회가 질적으로 성장하게 하는 요인이었습니다. 결국 교회성장의 중요한 축을 형성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이는데요, 그동안 힘들고 어려웠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특히 후임자 문제는 중앙장로교회의 위기가 아니었나 생각을 하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 말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힘들고 어려웠던 때 김측도| 그렇습니다. 후임자 문제로 2-3년간 힘들었습니다. 홍 목사님이 은퇴하시고 한 일 년 사이 그리고 오성광 목사님이 부임하신 1-2년 그 사이가 중앙장로교회 위기가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회개를 많이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당회원들이 교만했구나 왜 그런 생각을 했냐하면 우리가 당회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중앙장로교회 당회만큼 튼튼한 당회는 없다, 우리는 단결도 잘되고 열정이 있고 우리만한 당회가 어디 있느냐 이런 얘기를 하곤 했어요. 그런데 어려움이 찾아온 것을 보고 우리가 교만했구나 그래서 하나님이 철저하게 부스러뜨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후임 목사님을 모시는 과정 속에서 과연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기도하였는가, 우리는 우리 머리로만 계산을 하고 생각을 하지 않았느냐,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이런 과정이 없었지 않았느냐, 제가 보기에는 없었어요. 저도 기도를 안 했으니까요. 우리가 이 문제를 놓고 합심기도하고 함께 부르짖은 적이 없어요. 그런데 교회당 구입 때는 함께 모여 철야하면서 금식기도를 했거든요. 가장 중요한 시기에 이런 과정을 놓쳤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했느냐, 저는 그때 그랬어요. 하나님,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 모든 것을 해결해달라고 계속 기도를 했어요. 심지어 당회원 간에도 갈등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 때 저는 교회를 떠나야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하나님, 하나님이 떠나라 하면 떠나겠습니다. 그러나 내 고집대로 떠나지는 않겠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어떤 문제가 생기잖아요. 앞으로도 이런 문제 일어날 수 있거든요. 저희들이 이 과정을 지나면서 겪은 선배로서 꼭 들려주고 싶은 것은 교회는 사회단체와 다르다, 그래서 세상의 가치로 따지고 해결하려고 하면 풍비박산이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이 문제를 올려드릴 때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홍순도| 이 어려운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역사하신 것을 느꼈습니다.사실 저희들이 개인주의나 이기주의로 움직였다면 더 많은 고난이 있었을 것인데 교회에 유익을 주기 위해 다들 참고 늦게나마 함께 기도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김 장로님의 지적대로 당회원과 성도들에게 교만한 점이 있었습니다. ‘중앙장로교회 교인들이 최고다’라는 교만으로 어려움이 생겼고 이를 고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터치해 주신 것 같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장자교회, 장자교회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전 과정을 경험하면서 느낀 것이 뭐냐하면 우리 교우들이 말씀으로 훈련이 잘 돼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으로 우리 모두가 다시 회복할 수 있었던 좋은 계기가 되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주변에서는 과연 중앙장로교회답다. 중앙장로교회가 그 어려운 시기에도 목사님이 잘 가르쳐 놓았기 때문에 결국 크게 흔들리지 않고 위기를 잘 넘겼다는 말들을 들었습니다. 다른 교회 같으면 벌써 무너지고 분리되고 흩어졌을 텐데 교회가 신앙적 기반이 든든하여 위기를 잘 넘기고 은혜 가운데 서 가는걸 보면 부럽다는 얘기들을 주변에서 많이 했습니다. 권창식| 개인적으로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초창기에 있던 사람인데 별로 한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좋은 목사님 만나고 주위에 믿음의 동지들이 있어 괜찮았습니다. 흠이라면 리더십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좀 서로가 갈등이 일어나 상처를 받았는데 우리에게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우리가 교만했고 앞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뾰쪽한 모서리를 깎아내야 하는데 그 모서리를 그때 다 깎아내진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내 눈의 들보는 못보고 상대방에 있는 티만 보고 뭐라고 한 겁니다. 그때 서로가 다 그랬어요.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하고 믿음이 좋다했는데도 그런 문제가 생기니까 똑같더라고요. 김측도 장로님이 얘기했지만 말씀과 기도로 깨어져야 했는데 다 그러질 못했어요. 참 교만했어요. 그래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들 스스로 깨닫게 하시고 또 교회적으로도 이런 과정이 필요했어요. 항상 얘기했잖아요. 우리가 장자교회라고요. 교계를 지도하다보니까 우리가 턱없이 교만해진 겁니다. 그래도 사랑하셔서 제2대 목사님이 오실 때 그 거품들이 다 빠지는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과정을 주셨지만 내 자신부터 회개를 많이 했고 또 다른 분들도 다 같을 겁니다. 서로가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니까 이런 마음이 합쳐져서 원로들이 함께 이번 30주년 기념식 때 찬양도 했지 않습니까? 홍 목사님이 욕도 많이 들으시고 적도 많이 생기고 했지만 성공적으로 목회를 하셨다는 것은 교회는 어떻게 됐든 당회장 목사님 중심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목사님은 24시간 기도하고 24시간 생각하시니까 목사님 중심으로 하고 당회원 중심으로 직분자들이 목사님을 잘 보필하는 식으로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목사님이 잘못 갈 경우 우리가 직언도 해야 되고 그래서 우리 교회는 목사님이 좋은 목회철학을 가지고 계시고 비전도 가지고 계시니까 잘 보필하면 앞으로 30년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홍관표| 우리 교회가 그동안 상당히 평탄하게 왔거든요. 그러니까 교회의 어려움을 전혀 의식들을 못하고 , 교회는 이렇게 해나가는 것이고 또 우리 목사님이 지도하는 데로 가면 된다, 그렇게들 생각하신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장로님들 중심으로 평신도 목회를 했어요. 그래서 우리 장로님들을 너무 키워 놓았는지 좌우간 조금 교만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기에 장로님들이 한 번 얻어맞긴 얻어맞아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일동 웃음) 어쨌든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시련을 주지 않았나, 이런 시련을 겪어야 교회가 매듭을 짓고 나갈 수 있고 이 교회가 좀더 견고한 교회로서 면모를 갖추지 않겠는가,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의 문제는 인간에게 포커스를 맞추는 게 아니고 우리 하나님께 포커스를 맞춰 하나님이 이 모든 걸 다 하신 일이다 그렇게 결론짓고 그래서 거기에 대하여 속상하거나 그런 것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제는 그런 시련을 겪었으니까 잘 될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동안 오 목사님이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짊어지고 수고를 많이 하셨는데 교회는 이제부터 잘 성장해 나가지 않겠는가, 그런 기대를 가지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사회자| 오성광 목사님은 2004년 1월 3일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하셨지요? 오성광| 그렇습니다. 저는 독일에서 10년 목회하다가 한국으로 들어가 광주에서 5년 정도 목회했는데 그때 제가 교회 안에서 해야 될 일이 다 끝났다고 생각을 하고 기도하는 중에 있었습니다. 홍 목사님하고는 제가 독일에 있을 때 안식년으로 오셨을 때 뵌 적이 있습니다. 그때 홍 목사님과 처음 대면했고 중앙장로교회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뒤로는 연결되는 부분은 없었죠. 그런데 이상규 목사님이 임시 목사님으로 이제는 떠나야 하는 입장이 되어서 갑자기 전화가 온 겁니다. 이상규 목사님도 제가 개인적으로는 학부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뵌 적이 없었습니다. 그 분도 제가 유럽에 있을 때 강사로 오셨을 때 개인적으로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분이었죠. 사실 저는 이민교회를 경험해봤고 또 한국에 들어가 보니까 이민교회보다는 한국이 좀 따뜻하고 여러 가지 좋은 대접과 조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다시 부르시는 구나,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청빙을 결정한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알고 받아들이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교회가 결정을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12월 31일 송구영신예배까지 섬기고 다음날 아침 2004년 1월 1일 새벽에 출발하여 다음날 시드니에 도착하는 급한 일정으로 시드니중앙장로교회에 부임하면서 ‘새해벽두부터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서둘러 이곳으로 오게 하시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시작한 목회였습니다.
처음에 가졌던 이 질문은 함께 첫 주일예배를 마친 후 한 분 한 분 성도님들을 만나 교제하면서 풀려지기 시작했죠. 이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기대와 계획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성도님 한 분 한 분이 너무 아름답고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오기 전 들었던 소문보다는 훨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기쁨과 평안이 있었습니다. 문제보다는 가능성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20년 동안 목회하신 홍 목사님을 통해 진리의 말씀 위에 든든히 서있는 교회이기에 어떠한 시련의 파도가 몰려와도 끄덕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장로님들이 말씀하셨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니까 그 모든 힘든 부분들이 해결됐습니다. 결국은 성도들에 의해서 매듭이 지어졌던 부분이 성도들에 의해서 풀어지는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됐어요. 그런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지 않으면 그런 결과가 절대로 주어질 수가 없어요. 우리들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주님의 은혜를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채워주셔서 문제가 다 해결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우리 장로님들 30주년 기념식 때 함께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 역시 가슴이 뭉클했어요. 너무 감격스러웠어요. 사회자| 중앙장로교회를 통해 지금까지 뿌려놓은 열매들은 한 세기를 다 거두어도 못 거둘 일을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문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중앙장로교회가 30년을 지내왔는데 이제 건강한 교회로 설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고 안심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설 수도 있고 넘어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30주년을 기념하고 회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의 30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이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그래서 향후 30년을 향한 당부와 바람 그리고 새로운 계획 등을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앞으로의 당부와 바람 그리고 계획 오성광| 이제 중앙장로교회는 앞으로 30년을 지나가면서 하나님이 주신 기도의 눈물과 이미 세워진 비전들이 구체적으로 꽃 피워져가는 그런 시대가 열려지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미 이 교회를 세울 때 주신 그 비전이 확장되어가는 것이지 단절이 아니다, 단절과 체인지가 아니라는 겁니다. 사실은 지난 창립기념 예배 때 홍 목사님이 주신 말씀이 내가 가지고 있는 비전과 너무 정확하게 일치됩니다. 평신도 사역자를 세우기 위해 이미 신학원도 하셨고 많은 기초들이 세워져서 목사가 뛰고 움직이는 교회가 아니라 평신도 지도력이 움직이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성도들을 사역자로, 목회자로 세워서 성도들이 성도들을 돌보는 구조가 되었습니다. 교회개척도 저희 교회를 통해서 많은 분들이 개척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계속 지향할 것입니다. 선교 역시 마찬가지로 그들이 자신들의 민족을 위해 전도하도록 하는 원칙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들이 그들 속에 스스로 지도자를 세워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가 그들을 세우는 그런 형태, 우리가 일방적으로 대신해 주는 선교의 원칙, 특별히 신학교를 세워서 지도자를 양성하는 이 부분에 우리가 도와주면서 그들이 그들 스스로 자기 민족에 대한 전도와 교회설립의 주체가 되도록 하는 이런 부분들, 그 다음에 한 세대가 지나가는 시점인데 본격적으로 다음 세대를 세워야 되겠다는 겁니다. 2세대의 문제가 큰 문제인데 저는 큰 그림에 있어서는 주일날 한 번 교회 안에서 말씀 가르치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세워질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결국 그들이 배우는 지식의 모든 영역이 기독교세계관에 의해서 바르게 가르쳐 줬을 때 다니엘 같은 또 모세와 같은 요셉과 같은 에스더와 같은 예레미야와 같은 영적 지도자가 일어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래서 교회가 이 교육적인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는 것 그것이 다음 세대를 세워나가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 될 수 있겠다싶어서 앞으로 예배당 부지를 찾는다든지 또 새로운 어떤 교회를 개척한다든지 할 때 이런 부분을 생각하면서 일을 감당하려고 합니다. 어쨌든 다음 세대들이 이제는 앞선 세대들이 가졌던 그 열정과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사랑을 이어받아서 이제는 널리 퍼트리는 그런 자리에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30년이 지나가는 가운데서도 열정이 식어가고 있습니다. 점점 세속화되어가면서 그 헌신과 열정과 순수함이 점점 식어져가는 부분들을 보게 됩니다. 전통으로 그냥 답습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성장적으로 계승이 되어져서 이제는 한국적인 토양의 씨를 이곳에 옮겨 심었다면 30년 동안 이 밭에서 이 중앙장로교회에서 이 호주라고 하는 이민사회에서 발아하고 또 새로운 모습으로 자란 이 모종들을 이제는 밭으로 옮겨 심는 작업을 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 안에서 자꾸 키운다고 하는 것은 교회본질이나 사명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또 이민교회를 섬기고 지역교회를 섬기고 다른 민족들을 섬기는, 그래서 중앙장로교회에 주신 비전과 아름다운 신앙유산들이 함께 나누어지고 퍼져나가는 단계 그런 아름다운 시간이 되여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저는 오늘 함께 나누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앞선 세대에 배워야 할 부분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맨 땅에서 중앙장로교회를 일궈냈던 그 부분, 이민사회 초창기에 그 척박한 상황 속에서 교회를 교회답게 이끈 헌신과 믿음을 우리들이 본받지 않으면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속은 점점 약해져가는 그래서 결국 나중에는 세상을 닮아가고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헌신과 열정과 말씀대로 바로 살아가려고 하는 이 부분들이 타협되지 않고 계속 흘러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장로 임기제를 도입했습니다. 시무장로 임기는 7년입니다. 그 외 셀 교회를 지향하면서 모든 장로님들이 목양 장로라 해서 셀의 지역장을 맡아서 실제로 성도들을 돌보고 목양하는데 포커스를 두게 됩니다. 김측도| 이 대담이 활자화가 되면 앞으로 계속 교회의 역사가 이어지는 모든 교회들에게도 하나의 지침으로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드는데요. 교회를 바르게 말씀 가운데 세운다, 이런 것도 있었지만 사실은 목사님이 저희들에게 주신 여러 가지 꿈이 있습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많이 터치가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교를 시작할 때도 그런 꿈이 있었지만, 왜 우리를 호주 땅으로 보내서 이곳에 한인교회를 세우게 하셨을까? 왜 우리를 이곳으로 보내서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셨을까? 그런 질문을 하도록 하셨어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꿈이 있을 거라는 거지요. 그렇게 봤을 때 우리가 복음의 빚을 진 이 나라에 복음의 새로운 영역을 일으켜 세우는 그런 불씨 역할을 우리가 감당해야 된다, 그래서 우리가 진 복음의 빚을 갚자, 그런 이야기들이 서로 나누어지면서 실질적으로 20년 전에 우리는 SMBC에 장학금을 보내기 시작했고 지금도 계속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 신학교에 지원을 했느냐, 앞으로 우리 자녀들이 다음 세대 지도자로, 선교사로 자라날 것이 아닙니까? 거기다 씨를 뿌려줘야 자녀들이 그 신학교에 가서 제대로 교육을 받는 토양이 마련되지 않겠느냐 해서 지원을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계속 지원되고 있어요. 그뿐만 아닙니다. 호주 선교단체인 OMF, SIM에도 저희들이 지원을 했습니다. 이분들이 너무 감격을 해서 우리교회에서 멤버를 한 사람 선정을 해달라고 해서 제가 7개월 정도 호주 OMF 멤버로 그분들과 함께 동역을 했어요. 그 후 김관하 집사님을 세워 계속 5년 동안 그분들과 함께 일을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SIM에서도 우리교회를 동역하는 교회로 인정을 해줬고요.
그런데 현재 호주 OMF는 김광섭 장로님이 그분들과 함께 동역하고 있는데 데이비드 맥캔로라는 분이 태국선교사로 나가려고 하는데 후원하는 교회가 없다고 하소연을 해왔어요. 우리 교회가 호주 선교사를 파송하자, 해서 호주 선교사를 우리가 파송했습니다. 이날 호주 OMF책임자가 와서 울먹울먹하면서 감사의 말을 전할 때 정말 감격적이었고 이런 일들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다음 세대를 겨냥하고 영어예배를 처음 시작하게 되었는데 지도자가 없어 어려움을 겪을 때 SMBC에서 계속 동역하는 관계로 지원을 해줬어요. 앞으로도 이런 것들이 활성화가 돼서 호주교계와 동역하는 관계로까지 발전해 갔으면 좋겠어요. 지금 호주교회와 선교기관들을 보면 헌신자도 없지만 후원하는 교회들도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는데 이럴 때 한인교회들이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중심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 다음에 이곳 소수민족 그룹들입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종족이 무려 100여 개 이상이 있잖아요. 이런 곳에 한인교회들이 초점을 맞춰서 사역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안 되면 2세들을 길러 그들로 하여금 일꾼들을 키워 자기의 나라로 보낸다던지 하는 이런 선교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한인교회를 이 땅에 세우신 뜻이 아니겠느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호주 원주민 단체인 AEF도 우리가 한 사람을 길러 후원하니까 그 교단의 책임자들이 찾아왔어요. 멤버로 우리교회를 집어넣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선교위원들과 만났는데 이분들이 와서 하는 얘기가 호주사람들도 자기의 멤버에 못 들어온대요. 그런데 우리는 당신들을 초청한다는 겁니다. 그런 후 연차 총회를 할 때마다 우리가 사람을 보냈어요. 이제 우리는 허버트 에드워드 선교사를 아보리진 사회 속에서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계속적으로 뒷바라지를 해줘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봅니다. 홍관표| 사실 저희 목회 때에는 장로님들이 점심식사 할 때에도 섬기는 자세로 처음 나오시는 분들을 먼저 대접하고 그 다음은 성도들 그리고 집사들은 그 다음, 장로들은 모두 서빙하고 제일 나중에 식사를 하는 그런 순서가 있었어요. 그렇게 봉사정신을 가지고 섬기는 자세로 지금까지 해왔지요. 그리고 저한테 야단 안 맞으신 분이 별로 없으신데 어쨌든 제 목회는 굉장히 강력하게 그리고 제가 한 번 얘기를 하면 책임을 지고 끝까지 약속한 것을 실천했어요. 제가 말 한마디 하면 반드시 그대로 된다, 그렇게들 아시기 때문에 제가 야단을 쳐도 그것을 별로 섭섭하게 생각을 안 하시고 그대로 따라와요. 저는 아니면 아니다 기면 기다 분명합니다. 그래서 아까 권 장로님도 말씀하셨지만 10월 달에 결혼을 하는데 4월 달에 결혼을 한 걸로 해주십시오, 아니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네가 부부가 된 것을 선언도 안 했는데 내가 어떻게 사문서 위조를 하느냐 그래서 안 해줬어요. 다른 교회는 다 해주는데요, 하면서 교회를 떠나는 분이 많았어요. 그러나 나는 분명하게 그런 것을 해나갔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신임을 얻는 그런 쪽으로 목회가 되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30주년 기념식 때도 느꼈지만 우리 시무장로님들이 저래서는 안 되는데 그런 것을 좀 느꼈어요. 왜냐하면 밖에서 줄을 서서 식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젊은 장로님들이 들어와서 자기들 먼저 방에 들어와서 먹는다는 건 나는 장로니까 당연히 먹어야 된다, 대접을 받아야 된다, 그런 자세가 아닌가, 그런 염려가 조금 됐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지적을 할까 하다가 그냥 지나갔거든요. 하여튼 제 목회 때는 “목사님, 이제 우리도 식사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정도로 섬김의 모습을 보여줬어요. 그런데 요즘의 젊은이들은 섬기려고 하는 것보다는 섬김을 받으려고 하고 이론적인 것은 앞서는데 봉사하고 섬기는 일에는 좀 아쉬운 면이 있습니다. 권창식| 이야기가 나왔으니까요. 우리 장로님들, 협동장로님까지 합쳐 11명이었는데 장로님들의 섬김은 정말 잘했어요. 교인이 새로 오면 돌아가면서 대접하고 좌우간 장로님들 집은 전부 오픈되었어요. 그렇게 집에서 대접을 했어요. 요즘 장로님들도 그렇게 하겠지요.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아무튼 섬기는 것은 철저하게 배웠어요. 섬김이 없으면 직분도 잘 못 받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교회 직분은 섬기는 직분이라는 설교말씀을 듣고 대접을 많이 한 것 같아요. 홍순도| 30년을 뒤로하고 30년을 새로 출발을 해야 하는 저희 교회가 앞으로 할 일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그 일을 위해 전진해 나가야 하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해서 40년 동안 광야의 생활을 모르는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습니까?그런데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과거를 자꾸 잊어버리고 살기 때문에 여러 고난을 겪었던 것을 봅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해야 될 것 같아요. 우리교회가 어떻게 지금까지 왔느냐를 기억하면서 이제 다시 새롭게 출발을 해야 하는 그런 과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아까 식사문제를 언급하셨는데 비단 식사문제만이 아니라 섬김을 말씀드린 거지요. 언젠가 할렐루야교회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 오셨을 때 장로님들이 설거지를 하고 계셨대요. 사모님이 그 앞을 지나가시다가 그걸 보고 아니, 장로님들이 설거지를 한다고 사진을 찍어 간 적이 있어요. 교회 벽에 붙여 놓겠다고요. 그러니까 목사님은 기본적인 것을 잘 가르쳐 주셨고 또 그 많은 교인들을 일일이 심방을 하셨어요. 그리고 교인이 오게 되면 목사님이 심방을 가시는데 전도회 회장, 구역장, 교구장과 함께 가셔서 그 자리에서 인수인계를 시켜줍니다. 그러니까 새 교인에게 자기가 가야할 곳을 가르쳐주니까 서로 갈팡질팡 하지 않았어요. 그런 부분들이 굉장히 중요했던 것 같아요. 교회는 이런 원칙이 분명하게 서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최일파| 홍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하시고 성경을 함께 공부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그때가 너무 그립다고 합니다. 지금은 성경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런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세 자녀들과 장년세대 모두에게 주일학교 성경공부를 일관성 있게 시켜야 합니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최유찬| 개척 당시부터 제가 이 교회와 함께 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교육이 절실하게 필요하고 직분자를 세우고 잘 교육해서 영적 지도자를 육성해야만 교회의 미래가 밝아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홍관표| 그동안 저희교회는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셔서 오늘에 이르렀고 또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그런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를 견고하게 세워 나오셨고 또 앞으로도 이 교회를 간섭하셔서 꼭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사실 저도 그렇지만 오 목사님도 개혁주의 신앙노선에 입각한 그런 교회, 그런 목회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주님이 오실 때까지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또 신학적으로 어떤 문제가 일어나든 이 교회를 성경말씀을 중심한 그런 교회로 나갈 것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지키고 달려갈 길을 잘 마쳐서 하나님의 의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그런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우리 세대는 이젠 지나갔고 새로운 세대가 맡아서 해나가야 되는 계승해야 될 입장인데 영어권에 있는 우리 2세대들을 잘 키워서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전통을 계승해 나가야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요즘 세대가 횡적으로 배우고 지식도 있는데 하나님과의 종적인 관계, 그러니까 신앙의 전통적인 곳에는 약해지는 형편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렇게 좋은 게 있다 그러면 그리로 따라가고 저기서 저러면 그리로 따라가고, 이것이 자유주의 신학과 신비주의 운동인데 이것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앙노선의 교회로 굳게 서야지 않겠느냐는 생각입니다. 사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고는 교회를 바로 세워 나갈 수가 없습니다. 좋다고 이리저리 따라가다가는 나중에 큰일 나고 그러니까 말씀을 따라서 나가는 그런 교회로 세워져 갈 때 우리 자녀들도 말씀의 사람들로 바로 신앙이 자라게 되고 우리의 사도적인 신앙도 계승해 나가지 않겠느냐, 그런 뜻에서 이 교회가 말씀에 굳게 서서 반석위에 세워지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사회자|제가 미래를 말할 때 신명기적으로 미래를 말하면 “만약 너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든든히 서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너희들과 함께 하시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흩어질 것이다”라는 말씀과 마찬가지로 말씀운동과 기도운동이 일어날 때 시드니중앙장로교회의 미래는 장밋빛으로 밝을 것입니다. 오늘 긴 시간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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