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50달러 지폐의 주인공, 데이비드 유나이폰

정지수/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4/09/20 [12:23]

▲ 호주 원주민으로 호주 50달러 지폐에 나오는 데이비드 유나이폰은 호주 역사에서 주목받는 인물이다. 그는 전도사, 발명가, 작가, 원주민 권리 옹호자로서 호주 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State Library of NSW     

 

호주 50달러 지폐에 나오는 데이비드 유나이폰(David Unaipon, 1872–1967)은 호주 역사에서 주목받는 인물이다. 그는 전도사, 발명가, 작가, 원주민 권리 옹호자로서 호주 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유나이폰이 태어난 곳은 남호주(South Australia) 주의 수도인 아들레이드(Adelaide)에서 약 80킬로미터 떨어진 라우칸(Raukkan)이다. 라우칸에는 호주 원주민들 중에서 나린제리(Ngarrindjeri) 종족이 주로 거주했다.

 

선교단체인 ‘호주 원주민 친구 협회’ (the Aborigines' Friends' Association)는 라우칸에 선교 센터를 설립하고 원주민들을 위해 라우칸 교회와 라우칸 원주민 학교를 세웠다. 

 

라우칸 원주민 학교는 선교사인 조지 타플린 (George Taplin)에 의해 설립되었고, 많은 원주민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다. 

 

데이비드 유나이폰도 라우칸 교회를 다녔고, 라우칸 원주민 학교에서 공부했다.

 

데이비드 유나이폰은 1872년 9월 28일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빛을 가지고 태어난 자" 또는 “탁월한 정신을 가지고 태어난 자”라는 뜻을 지닌 유나이폰(Unaipon)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의 아버지 제임스 유나이폰 (James Unaipon)은 호주 원주민 사회에서 존경받는 원로이자 부족 지도자였다. 그는 기독교를 받아들여 라우칸 교회 출석하기 시작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교회의 성도가 되었다. 

  

후에는 호주 원주민 최초로 교회 집사가 되었다. 그의 아내이자, 데이비드 유나이폰의 어머니인 마가렛(Margaret)은 숙련된 직공이자 약초 재배자였다.

  

데이비드 유나이폰도 부모님과 함께 라우칸 교회에 다녔고, 그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영적 유산은 그가 호주 사회에서 위대한 인물로 성장하는 데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유나이폰 가족은 호주 원주민인 나린제리(Ngarrindjeri) 종족의 전통에 깊이 뿌리를 두고 살았다. 그의 부모는 유나이폰를 원주민 방식대로 양육했으며, 그를 원주민의 지식과 언어와 관습에 몰두하게 했다.

  

한편, 그 당시 호주의 공교육은 원주민들에게 허락되지 않았지만, 유나이폰은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싶어 했다. 

  

이런 그의 지적 호기심은 그를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스쿨(Mission School)인 라우칸 원주민 학교로 인도했다. 그곳에서 그는 영어를 배웠는데 읽기와 쓰기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미션스쿨인 라우칸 원주민 학교는 그가 더 훌륭한 인재로 성장하도록 도왔다.

  

또한, 유나이폰의 지적 호기심은 그로 하여금 새로운 것들을 발명하게 만들었다. 그는 다양한 것들을 발명했는데, 그의 발명품은 농업 기계부터 일상 업무의 효율성을 개선하는 데 목적을 둔 장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의 발명품 중에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양털 깎는 기계였다. 그가 발명한 이 기계는 양털을 빨리 깎을 수 있어 효율성이 높았다. 양털 깎는 사람이 이 기계를 사용하면 힘을 덜 들이고 쉽게 양털을 깎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창의적인 능력은 종종 당시의 인종적 편견 때문에 가려졌다. 그의 업적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그는 자신의 발명품에 대한 특허와 재정 지원을 확보하는 데 수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명가로서의 그의 능력은 날로 발전했다. 그는 인종차별을 겪을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인종차별을 하지 않으신다고 굳게 믿고 어려움을 견뎠다. 

  

요즘 점점 더 많은 호주 역사학자들이 그의 발명품들이 호주 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고 인정하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그를 호주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부른다.

  

유나이폰은 발명뿐만 아니라 글쓰기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의 문학 작품은 호주 원주민 문화와 그들의 이야기를 더 많은 독자들과 공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나이폰의 글은 신문 기고문, 에세이, 책 등 다양한 형식으로 출판되었다.

  

유나이폰의 가장 중요한 기여들 중 하나는 1951년 사후에 출판된 그의 책 ‘호주 원주민 영웅전’(Native Legends)이다. 나린제리 종족의 이야기와 전설을 담은 이 책은 호주 원주민 문화와 영성에 대한 귀중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유나이폰은 자신의 글을 통해 원주민과 비원주민 호주인 간의 격차를 메우고 상호 이해와 존중을 촉진하고자 했다.

  

유나이폰은 또한 저명한 연설가이자 원주민 권리 옹호자였다. 그는 인종 차별과 사회 정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고, 호주 원주민의 권리를 옹호했다. 그의 탁월한 연설과 논리적인 주장은 그를 호주 사회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만들었고, 그의 호주 원주민 옹호 활동은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는데 큰 역할을 했다.

  

유나이폰의 삶은 당시 호주 사회에 만연했던 인종적 편견 때문에 어려움에 처할 때가 많았다. 그의 뛰어난 재능과 공헌에도 불구하고, 유나이폰은 인종 차별을 받았고,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하는 장벽에 부딪히곤 했다. 

  

유나이폰이 직면한 주요 장벽들 중 하나는 그의 발명품에 대한 특허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었다. 특허를 얻는 과정은 복잡했고 원주민 호주인에게는 종종 접근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특허청과 더 광범위한 사회 내의 인종적 편견으로 인해 유나이폰의 업적을 인정하지 않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 호주 지폐 50불에 나오는 유나이폰의 초상화. 유나이폰은 부모와 함께 라우칸 교회에 다녔고, 그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영적 유산은 그가 호주 사회에서 위대한 인물로 성장하는 데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이러한 인종적 불평등을 경험한 유나이폰은 원주민들의 권리 옹호를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원주민들의 요구는 호주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호주 원주민들을 위해 흔들림 없이 헌신했다. 그의 호주 원주민 옹호 활동은 미래 세대의 원주민 지도자들과 활동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최근 몇 년 동안 많은 역사학자들이 유나이폰의 업적을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업적을 인정하고, 그를 호주 사회에 큰 변화를 일으킨 위대한 인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이 세운 라우칸 원주민 학교를 다닌 학생이 성인이 되어 호주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을 볼 때, 교육 선교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다.

  

데이비드 유나이폰은 호주 사람들이 영원히 기억해야 할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정지수|본지 영문편집위원, 캄보디아 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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