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자기 삶을 불태운 사람

글|주경식 사진|권순형 | 입력 : 2025/12/22 [12:18]

▲ 크리스찬리뷰가 지난 36년 동안 역사 안에서 꺼지지 않고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은 편집인 김명동 목사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은 세들스 레스토랑 호숫가에서.©크리스찬리뷰     

 

착한 사람의 기록 - 36년의 길

 

“그의 글을 읽으면 늘 진정성이 느껴진다.”

  

기자로서 김명동 목사(76)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다. 그는 눈에 띄는 사람도,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지난 36년간 「크리스찬리뷰」가 역사 안에서 꺼지지 않고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은 그 배후에는 “보이지 않게 자신의 몸을 갈아 넣었던 사람 김명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10일(월), 센트럴 코스트의 마운트 화이트(Mount White). 호수와 숲이 어우러진 세들스(Saddles) 레스토랑에서 그를 만났다.

  

“인터뷰는 싫다”며 내내 피하던 그였기에 기자 일행은 그저 점심이나 함께 하자며 억지로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식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크리스찬리뷰」의 역사를 꺼내자 다행히 굳게 닫힌 그의 입술에서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말하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 그는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들을 수 있었다.

  

사실 그는 기자의 대선배다. 기자가 고작 10년을 「크리스찬리뷰」와 함께했다면, 그는 무려 36년, 강산이 세 번 바뀌고도 반 바퀴 더 도는 세월 동안 이 잡지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사람이다.

  

초대 편집국장이었고 지금까지도 편집인으로 남아 매달 첫 페이지 ‘포토에세이’에 시를 올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품어온 노병이다.

  

▲ 지난 10월, 네 번째 암수술을 앞두고 검사를 받기 위해 로열 노스 쇼어 병원(RNSH)에 입원 중인 김명동 목사(가운데)를 문병간 장경순 목사(왼쪽)와 권순형 발행인.©크리스찬리뷰     

 

그런 그가 12월 18일, 네 번째 암 수술대를 앞두고 있다. 깨어날 수도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 속에서 기자는 그가 다시 살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불안함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서 발행인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지금이 아니면 우리는 그를 기록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인터뷰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만남이었다.

  

세들스 레스토랑 한 켠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나누며 듣게 된 그의 이야기. 그것은 겸손한 사람의 고백이었고 소리 없이 오래 버텨낸 사람의 이야기였으며 무대 뒤에서 잡지를 지탱해 준 한 영혼의 기록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깨달음이 밀려 들었다. 이 글은 단순한 인터뷰가 아니라 한 사람의 생애가 남긴 아름다운 빛의 흔적을 기록으로 보존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병천에서 시작된 한 소년의 길

 

김명동 목사의 고향은 충남 병천이다. 그는 순대 냄새와 흙먼지가 섞인 오일장의 추억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김명동은 전쟁이 빼앗아간 한 사람의 빈자리 속에서 자랐다. 

  

▲ 김명동 목사의 아버지는 병천에서 이름난 의사였는데 의학 도서가 귀하던 시절에 그는 의학정보를 노트에 일본어로 꼼꼼하게 기록해 두었다.©크리스찬리뷰     

 

아버지는 지역에서 이름난 의사였지만 한국전쟁 중 북쪽으로 끌려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남겨진 것은 아버지가 남긴 미완의 소설 원고였다.

  

홀어머니는 두 아들과 딸을 품고 가난을 견디며 아이들을 키웠다. 어떻게 보면 그의 문학적 재능은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글을 읽게 되면 그의 문학적 유산은 결핍의 골짜기 속에서 시작된 것임이 분명하다.

  

중학교 3학년 어느 날 그는 가난이 싫어 가출을 감행했다. 무작정 서울역에 도착하여 찾아간 곳이 남산이었다. 남산 언덕 벤치에 누워 노숙을 하다 보니 며칠 되지 않아 거지꼴이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를 불쌍하게 본 사람이 신문배달을 하면 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해서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여러 날 있다 보니 친해진 보급소장이 이것저것 그의 사정을 물어왔다. 나중에 보급소장은 소년 몰래 충청도 병천 중학교로 전화를 걸었다.

  

며칠 후 어머니와 교장선생이 금호동 신문배달소로 찾아왔다.

  

“이 놈의 새끼야! 어머니가 저를 보시자마자 귀싸대기를 때리시더라고요.”

  

▲ 아버지를 빼어나게 닮은 김명동 목사는 힘든 군생활중에도 불구하고 병영수첩에 하루의 일과를 그림과 함께 기록해 두었다.©크리스찬리뷰     

 

▲ 아버지를 빼어나게 닮은 김명동 목사는 힘든 군생활중에도 불구하고 병영수첩에 하루의 일과를 그림과 함께 기록해 두었다.©크리스찬리뷰     

 

그렇게 그는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서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렇게 그는 중학교 졸업장을 손에 쥐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형의 도움을 받아 고등학교를 마쳤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배우가 되고 싶었다.

  

그는 남산 드라마센터 부설 연극 아카데미(현 서울예술대학 전신)에 합격했다. 무대와 연기에 대한 꿈으로 가슴이 뛰었다. 개학 첫날,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왔다.

  

“네 놈이 그거 하게 생겼냐!” 불호령을 내리며 어머니는 사람들을 개의치 않고 그를 끌고 나갔다. 합격증을 쥐고도 교실 문턱을 넘지 못한 채 꿈을 접어야 했다.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공부해서 연세대학교 정법대(현재 로스쿨)에 진학했다. 그러나 입학 후에도 그의 생활은 넉넉지 않았다. 그는 입주 과외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했다.

  

그 과정에서 뜻밖의 인연이 찾아왔다. 과외를 하던 집의 장로님 내외는 그의 성실함과 진정성을 보고 장로님이 평소 예쁘게 보고 있던 신앙 좋은 한 자매를 억지로라도 맺어주고 싶어 했다.

  

심방이 있다는 어느 수요일, 장로님 내외는 그 자매를 그의 방에 우격다짐으로 밀어 넣고 문을 잠갔다. 그 자리에서 그는 그녀를 처음 보았다. 그러나 아직 그는 결혼할 처지가 아니었다. 며칠 뒤 다시 전화가 왔다며 그를 등 떠밀어 약속 장소로 내밀었다. 약속장소로 나가보니 그녀 역시 친구에게 떠밀려 나왔다며 그 앞에 서 있었다.

  

▲ 블루마운틴에 살던 시절, 자택을 방문한 지인들에게 남편의 시를 낭송을 하고 있는 김영숙 사모.(왼쪽) ©크리스찬리뷰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바퀴 걸어볼까요?”

  

그 짧은 산책이 두 사람의 인생을 바꾸었다. 눈발이 흩날리던 겨울 길을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얼마 후 그녀의 집에 초대받아 갔는데 형제들은 많고 가난했지만 웃음이 끊이지 않는 가족의 풍경은 그의 마음을 깊이 움직였다.

  

“생각지 못한 만남이었지만 그 인연이 제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이었습니다.”

  

그렇게 만나 결혼했던 평생의 동반자였던 김영숙 사모는 안타깝게도 오랜 숙환 끝에 2024년 11월, 74세 일기로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민으로 향한 두 번째 길

 

그는 사시를 꿈꿨지만 “네가 사시에 합격해도 네 아버지 때문에 공직에 오르기 어렵다”는 선배의 한마디에서 당시 한국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던 연좌제의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할 수 없이 그는 사법시험을 접고 직장을 선택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생존의 결단이었다.

  

다행히 직장생활은 순조롭게 안착했다.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도 빨랐고, 사회적 성공의 길을 밟아가는 듯 보였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랐다.

  

▲ 김명동 목사는 최근에 40여 년의 호주 이민생활 중 틈틈히 수집한 많은 자료들을 관련 단체나 개인에게 전달하고 많은 도서들도 정리했다.©크리스찬리뷰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있으니 시험도 간섭도 없기를 바랐던 것이다. 열심히 직장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시기 그는 문학에 대한 오래된 갈망을 떨치지 못하고 밤마다 원고지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렇게 써 내려간 단편소설 <휴가>가 ‘일간스포츠’에 당선되었다. 그렇게 그는 조용히 문단의 문을 두드렸다. 그는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다”고 웃어넘기지만 그 순간은 잊힌 꿈이 다시 살아난 자리였고 그때의 문학에 대한 작은 불씨는 이후 그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불꽃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시련은 그가 예상한 방향이 아니었다. 승진이 이어질수록 술자리가 잦아졌고, 야근이 일상이 되었다. 출퇴근은 불규칙해지고 신앙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여보, 우리 교회 가요.”

  

“싫어! 당신이나 가. 난 할 일이 많아.”

 

 “일 다하고 가려면 죽는 날까지 교회 못 가겠어요.”

  

세상물정 모른 채 손해를 감수하고 사는 아내가 답답하게만 보였던 그는 늘 자신이 아내보다 우월하고 옳다고 믿었다. 그 교만은 속에서 바벨탑처럼 자라고 있었지만 아내는 눈물로 기도하며 그를 붙들었다.

  

“여보, 단 한 편의 글을 써도 영혼을 울리는 글을 써요. 그것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요.”

  

그 말을 흘려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이민 갑시다. 여기서는 당신을 지킬 수 없어요.”

  

한국 사회의 속도와 가치 체계 안에서는 남편을 지킬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쾌속으로 달리던 기관차 같은 삶에 갑작스레 브레이크가 걸린 순간이었다. 그리고 1986년 9월 1일, 가족은 호주 땅을 밟았다.

  

이민자의 삶은 화려하지 않았다. 밤에는 청소를 하고 새벽에는 플레밍턴 마켓에서 책 상자를 날랐다. 그는 새로운 땅 호주에서 모든 이민자들이 그랬듯 바쁘고 정신없이 살았다.

  

30대 말, 육체는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처음 느껴보는 평안을 경험했다. 아무도 그의 사회적 위치를 묻지 않는 나라, 호주는 다행히 그에게 여백이 있는 땅이었다.

 

크리스찬리뷰와 함께 한 35년의 길

 

▲ 김명동 목사는 최근에 40여 년의 호주 이민생활 중 틈틈히 수집한 많은 자료들을 관련 단체나 개인에게 전달하고 많은 도서들도 정리했다.©크리스찬리뷰     

 

그즈음 「크리스찬리뷰」가 세상에 첫 선을 보였다. 정확히 1990년 1월에 창간호가 탄생되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기독교 수필과 칼럼을 보내는 필자로 참여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글 속에서 묻어나는 온기와 문학적 힘을 알아본 권순형 발행인은 그에게 편집부장직을 부탁했다. 그렇게 편집부장이 된 그는 원고지에 기사를 밤새워 쓰기도 하고 취재 현장에서 녹음기를 쥐고 뛰었다.

  

당시에는 컴퓨터로 원고를 쓰던 시대가 아니었다. 원고지에다 친필로 일일이 글씨를 써내려가야 했다. 때로는 원고 독촉을 피하려 ‘잠수’를 탄 적도 있다. 옆에 있던 권 발행인이 당시의 심경을 토로한다.

 

“연락은 안 돼, 집에 찾아가도 사람은 없어, 마감시간은 지났는데 제 속이 얼마나 타들어갔겠습니까?”

  

그 역시 잠수를 탄 이유를 내놓는다.

  

“초창기 때는 인터뷰, 현장 취재기사를 서너 개씩 써야 할 땐 밤을 꼬박 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결국 마감시간에도 마치지 못해 권 발행인이 우리집에 들이닥쳐 '원고 내노라'며 사정할 땐 정말 죽을 맛이었습니다. 그래서 잠수를 타기도 했습니다. 하하.”

  

▲ 한호선교 130주년을 맞아 경남지방을 방문한 선교사들과 문창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린 후 기념촬영을 했다. 오른쪽부터 박웅걸 목사, 편집인 김명동 목사, 권순형 발행인, 편집고문 지태영 목사, 이형준 문창교회 담임목사, 김기현 문창교회 원로목사, 존 브라운 선교사, 엘리슨 크로프트 선교사, 알란 스튜어트 선교사 아들 크리스와 스튜어트 선교사(2019. 10.6) ©크리스찬리뷰     

 

▲ 부산 유엔기념공원을 찾아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호주 용사들의 희생을 기리며 참배하는 김 목사.©크리스찬리뷰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원고지를 채웠는지 오랜 세월 펜을 쥔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박혀 있다.

  

“여기 좀 보세요. 그때 박힌 굳은살이 아직도 그대로 있어요.” 그는 검지에 박힌 두툼한 굳은살을 기자에게 내보였다. 마치 그것이 그의 훈장이라도 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렇게 그의 원고지와 펜 끝에서 한 달 한 달 잡지가 새롭게 탄생했고 그의 글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와 위로가 탄생했다. 「크리스찬리뷰」는 그가 자신의 생을 갈아 넣어 키워 온 삶의 제단이었다.

  

그는 지난 36년 동안 많은 일을 해왔다. 물론 권 발행인과 함께한 공동의 여정이었지만 그 발걸음 속에는 분명 그의 손끝이 새긴 흔적이 남아 있다.

 

‘한·호선교 100주년에서 130주년까지의 기록’을 발굴하며 잊혀져있던 호주 선교사의 한국 선교 역사를 새롭게 드러낸 것, 그 결과 순직 호주 선교사 묘원 성역화 사업과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이 세워진 것 역시 그의 취재와 기록이 남긴 결실이었다. 또한 캄보디아 헤브론병원 현장을 취재한 기사는 후에 KBS 다큐멘터리 ‘어꾼 헤브론’의 기획에 영감을 제공하기도 했다.

  

▲ 캄보디아 헤브론 병원에 의약품을 전달한 김명동 목사(오른쪽).©크리스찬리뷰     

 

▲ 캄보디아 프놈펜 다일공동체에서 밥퍼 사역에 동참한 김명동 목사.©크리스찬리뷰     

 

이밖에도 그가 「크리스찬리뷰」와 함께 걸어온 36년 안에는 일일이 적어낼 수 없는 수많은 사건과 서사, 기록과 눈물이 켜켜이 쌓여 있다. 이단이 집까지 찾아와 곤란을 겪었던 날도 있었고 반대로 그의 글을 읽고 소망을 되찾았다며 눈물로 고백한 독자들도 있었다. 그에게 「크리스찬리뷰」는 단순한 잡지가 아니었다.

 

 그는 「크리스찬리뷰」를 ‘인생의 학교’라고 부른다.

  

“크리스찬리뷰는 제게 배움의 터전이었죠. 다양한 인생 고수들과 독자들의 만남을 통해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나누며 깨달은 지혜와 용기는 생생한 공부였지요. 그래서 저는 「크리스찬리뷰」를 학교, 권순형 발행인을 교장, 「크리스찬리뷰」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이었다고 표현합니다.

  

독자들의 후원으로 만들어 가는 잡지이니 저는 독자들이 주신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닌 셈입니다. 장학금을 받으면 의무 연한이란게 있듯이 35년 넘게 한자리를 지키는 우직함이 독자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 여겼습니다.”

 

▲ 취미생활로 그림(수채화)을 그리는 김명동 목사. 첼리스트인 사위에게 선물로 줄 그림을 완성 중에 있다.©크리스찬리뷰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

 

그는 글과 인터뷰를 통해 많은 잠든 이야기를 깨우고 진실을 드러내는 창이 되었다. 무너진 마음을 품어 주었고 숨겨져 있던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끌어올렸으며 낙심한 이들에게는 소망을 길을 잃은 이들에게는 나침반이 되었다. 그의 글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숨결이었다.

  

김명동은 거대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가장 오래 버틴 사람, 착한 사람, 진정성으로 글을 살아낸 사람이다. 「크리스찬리뷰」가 지난 36년을 살아남은 이유는 어쩌면 기술도 자본도 아닌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버텨온 이런 분들의 숨은 헌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크리스찬리뷰」 잡지를 펼치면 첫 페이지를 수놓은 ‘포토에세이’가 독자를 맞이한다. 거기에는 매 호마다 그의 따뜻한 인간미가 배어 있는 시 한 줄 한 줄이 여전히 숨쉬고 있다. 그 시들 중 일부는 훗날 세 권의 시집 「내 아들아」, 「그 단칸방 시절」, 「삶의 종착역에서」로 묶여 세상에 나왔다.

  

▲ 김명동 목사가 만난 사람들.©크리스찬리뷰     

 

그의 시처럼, 작은 풀 한 포기도 햇살을 향해 몸을 세우듯, 그는 그렇게 글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꼿꼿이 서 있다. 기자 역시 그의 글에 빚진 사람이다.

  

십여 년 전, 치사한 배신과 밥 한 그릇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들의 위선을 보며 깊은 회의에 잠겨 있던 때 ‘포토에세이’ 속 그의 시 한 줄이 빛처럼 스며들어 다시 일어설 용기를 갖게 해주었다. 그 시는 여전히 내 안에 살아있다.

  

밥 한 그릇

“밥 한 그릇 받아놓고 생각한다 / 사람은 왜 밥을 먹는가 / 살려고 먹는다면 왜 사는가 / 한 그릇의 밥을 먹기 위하여 / 나는 굽히고 싶지 않은 / 머리를 조아리고 / 마음에 없는 말을 지껄이고 / 정작 해야 할 말을 숨겼다 / 나는 왜 밥을 먹는가, 오늘 / 다시 생각하며 내가 마땅히 했어야 할 양심을 속이고 / 그 대가로 받았던 끼니에 대하여 / 부끄러워한다 / 밥 한 그릇 앞에 놓고, 아아 / 나는 가룟 유다가 되지 않기 위하여  기도한다. / 밥 한 그릇에 / 나를 팔지 않기 위하여.”

 

삶의 종착역에서

 

‘삶의 종착역에서’는 그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시집의 제목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이 제목은 그의 육신의 여정을 비추는 한 줄의 예언처럼 들린다.

  

기자는 그의 시집이 다시 나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의 글은 단지 아름다운 문장을 넘어 사람을 살리고, 진실을 흔들어 깨웠으며, 어두운 골짜기에서도 믿음의 불씨를 지키게 하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네 번째 암 수술을 앞두고 있다. 그는 담담하게 수술 과정을 설명하지만 그 말 속에는 깊은 내면의 싸움이 배어 있었다.

  

“지금껏 암 수술을 세 번 받았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좀 어려운 수술이 될 것 같다고 하네요.”

  

그는 과거의 수술을 돌아보며 자신의 죄와 부족함이 주마등처럼 스쳤다고 고백했다.

  

히스기야 왕은 “진심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라고 했는데 그처럼 담대하게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가장 무거운 짐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친 것도 사실 아닙니까?”

  

그 기도는 한 신앙인의 마지막 솔직한 고백이었다.

 

 “그동안 나는 너무 큰 것만 바라보고 거창한 이야기에만 빠져 있었어요.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작고 사소한 행복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들을 너무 깔보며 살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투병생활하면서 내 주변에 작지만 작은 행복의 재료들이 될 만한 일들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갖게 됐고요. 그래서 우리 주변에 우리가 생각만 조금 바꿔 먹으면 널려 있는 이 작고 사소한 행복들을 더 찾아보고 더 알아보고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작은 행복이 모여 큰 행복이 되니까요.”

  

그의 시처럼 -

작은 풀 한 포기도 햇살을 향해 몸을 세우듯 그는 지금도 믿음으로 몸을 일으키며 하나님을 향해 서 있다. 끝을 향한 걸음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는 영혼으로 나아가는 또 한 번의 시작처럼.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모아 간절히 기도한다. 그의 이야기가 여기서 닫히지 않기를 그리고 그의 글이 또 다른 이의 마음속에서 다시 숨쉬기를. 언젠가 그의 네 번째 시집이 이 삶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이름으로 우리 곁에 돌아오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 투병생활중인 김명동 목사. 네번 째 암 수술 후 건강을 되찾아 밝게 웃는 날이 오기를 기도한다.©크리스찬리뷰     

 

에필로그

 

김명동 목사는 시인이자 소설가로 충남 병천에서 출생했다. 호주 이름은 데이비드 김(David Kim)이다.

  

현재 호주 시드니 콩코드에 거주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연세대학교 정법대를 졸업했고, 호주 서던크로스대학 신학과를 졸업했다.

  

1979년 「일간스포츠」 단편소설 ‘휴가’가 당선되었고, 2008년 「좋은문학」에 시 ‘아침의 노래’, ‘호숫가에서’로 시인으로 등단했다. 대표작으로는 시 ‘그 단칸방 시절’, ‘아내의 칫솔’, ‘삶의 종착역에서’가 있고, 소설 ‘낭패’, ‘이방인’ 등이 있다.

  

저서로는 시집 ‘내 아들아’, ‘그 단칸방시절’, ‘삶의 종착역에서’, 공저 ‘한국을 빛내는 작가들’, ‘시와 자매세계’, ‘한국시인 대표작 1’, ‘한국시인 사랑시 1’가 있으며, 동인지 「호주한국문학」, 「기독교문학」 등에 참여하고 있다.

 

‘경춘선-강촌역사 시화전시’(2013~2017). ‘한국항공우주박물관 공동시화전’(2013)에 참여했다. 그리고 호주한국문학협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한국문인협회, 세계모던포엠작가회, 좋은문학작가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크리스찬리뷰」 편집부장(1990. 10-1992. 12), 편집국장(1993. 1-2005. 12)을 거쳐 2006년 1월부터 현재까지 편집인으로 36년간 활동해 왔다.〠

 

주경식|본지 편집국장(Ph.D)

권순형|본지 발행인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