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배트맨은 호주 멜번의 건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개척자다. 1801년 1월 21일 뉴사우스웨일스(New South Wales)의 파라마타(Parramatta)에서 태어나 1839년 5월 6일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목축업자, 사업가, 탐험가로서 멜번의 역사에 깊이 새겨진 인물이지만 동시에 원주민에 대한 폭력 행위로 인해 논란의 중심에 있는 복잡한 인물이다.
영국 출신인 배트맨의 아버지 윌리엄(William)은 도난품 질산염을 취득한 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호주로 추방되었으며 어머니 메리(Mary)는 자유인으로서 자녀들을 데리고 남편과 함께 호주로 왔다.
배트맨의 부모는 긴 항해 끝에 1797년 6월 2일 시드니에 도착했다. 그들은 파라마타에 정착했고 2년 후에 둘째 아들 존 배트맨을 낳았다.
윌리엄은 석방 허가를 받고 파라마타에 목재 야적장을 차렸고, 그곳에서 다섯 아들과 딸이 자랐다. 그의 형기는 1810년에 만료되었고, 윌리엄은 후에 독실한 감리교 신자가 되었는데 그의 자녀들은 성공회-감리교 신자로 훈련을 받았다
존 배트맨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816년부터 시드니에서 대장장이의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몇 달 후 그의 스승이 절도죄로 처형되어 더 이상 대장장이의 일을 배울 수 없었다. 배트맨은 대장장이의 일을 그만두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1821년, 20세의 나이로 배트맨은 형 헨리(Henry)와 함께 반 디멘스 랜드(현재의 타스마니아)로 이주했다. 목축업자로 일을 시작한 배트맨은 타스마니아 정부에 육류를 공급하면서 많은 돈을 벌기 시작했다. 1824년에는 600에이커의 토지를 구입했다.
1828년에는 죄수 출신인 엘리자 톰슨과 결혼했는데, 당시 이러한 결혼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 시기 배트맨은 타스마니아에서 탈옥한 죄수를 추적하는 일을 했다. 또한 영국 식민지 개척자들과 타스마니아 원주민들 사이에 일어난 전쟁(Black War)에 참여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원주민 학살에 가담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배트맨을 학살자로 비난하기도 한다.
1834년, 배트맨은 가축들이 늘어나 목초지가 부족해지자 새로운 목초지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포트 필립 협회(Port Phillip Association)를 설립하여 새로운 지역으로 목축 사업을 확장할 기회를 모색했다.
1835년 5월, 이 조합은 정착지로 적합한 장소를 찾기 위해 포트 필립 만(Port Phillip Bay)을 탐험했다. 그는 포트 필립 만에서 도시를 건설할 수 있는 좋은 땅을 발견했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멜번이다. 그는 이 땅을 ‘배트매니아’(Batmania)라고 명명했다.
1835년 6월, 배트맨은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원주민 지도자들과 협상을 진행했다. 전직 타스마니아 법무장관의 법률 자문을 받았고 다른 지역에서 온 원주민 조력자들의 도움도 받았다. 이때 이루어진 이 협상을 ‘배트맨 조약’이라고 부른다.
배트맨은 원주민 지도자들과 약 25만 헥타르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조약'에 서명했으며 그 대가로 담요, 도끼, 밀가루 등의 물품과 연간 임대료를 약속했다. 구체적으로는 담요 40장, 도끼 30개, 칼 100개, 가위 50개, 거울 30개, 손수건 200개, 밀가루 100파운드, 셔츠 6벌이 제공되었다.
그러나 뉴사우스웨일스 총독 리처드 버크(Richard Bourke)는 배트맨의 조약을 불법으로 선언하고 정착민들을 무단침입자로 규정했다. 버크 총독은 당시 법에 따라 영국 왕실이 토지의 소유권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약은 유럽인이 호주 원주민과 토지에 대해 협상을 시도한 유일한 사례로써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협상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다.
1835년 4월 30일, 존 파스코 포크너(John Pascoe Fawkner)가 이끄는 또 다른 정착민 그룹이 엔터프라이즈호를 타고 야라 강(Yarra River)에 들어와 첫 영구 정착지를 건설했다.
2년 만에 350명 이상의 사람들과 5만 5천 마리의 양이 들어왔고 목축업자들은 이 지역에 대규모 양모 생산 농장을 세웠다.
한편, 배트맨은 1835년 9월 2일에 도착해 포크너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먼저 정착지를 건설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분노했지만, 배트맨은 포크너와 협상해 토지를 나눠 가졌다.
배트맨은 이후 타스마니아의 모든 재산을 팔고 가족들과 함께 자신이 개척한 정착지에 이주했다. 그는 1836년 4월, 현재 배트맨스 힐(Batman’s Hill)로 알려진 언덕 기슭에 집을 지었다.
그러나 멜번에 정착한 이후 배트맨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는 병으로 고통 속에 살았다. 1837년 말에는 걷지 못하게 되어 목축업을 포기하고 무역과 자본 투자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의 사업은 날로 어려워졌고 건강도 악화되었다.
생애 마지막 몇 달 동안 배트맨은 원주민 하인들의 보살핌을 받았으며 그들은 그를 유모차에 태워 다녔다. 1839년 5월 6일, 배트맨은 배트맨스 힐의 집에서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배트맨은 멜번이라는 호주의 주요 도시를 건립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배트맨 조약은 원주민의 토지 점유를 인정하고 협상하려 한 최초의 시도였다. 다른 지역에서는 이러한 협상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런 점에서 배트맨의 협상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배트맨이 타스마니아 원주민에 대한 학살에 참여했다는 사실로 인해 심각한 비판을 받고 있다. 그의 이웃 사람들 중 한 사람은 배트맨을 "악당, 도둑, 사기꾼, 거짓말쟁이, 원주민 살인자이며 내가 만난 가장 비열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기도했다.
현대에 들어서 배트맨의 유산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2016년 다레빈(Darebin) 시의회는 노스코트(Northcote)의 배트맨 공원 이름을 원주민 지도자 윌리엄 바락의 조카딸이었던 검브리의 이름을 따서 검브리 공원으로 변경했다.
2017년에는 예술가 벤 퀼티가 멜번 중심부에 있는 배트맨의 동상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를 ‘집단 살인자’라고 규정했다.
존 배트맨은 처음에 구 멜번 묘지에 묻혔으나 이후 발굴되어 현재는 그의 동료이자 경쟁자였던 존 파스코 포크너의 이름을 딴 포크너 묘지에 안장되었다.
1922년에 건립된 청석 오벨리스크가 그를 기념하고 있으며 라틴어로 ‘주위를 돌아보라’(circumspice)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존 배트먼의 삶은 호주 식민지 역사의 복잡성을 보여준다. 그는 멜번이라는 위대한 도시의 건립자로 기억되는 동시에 원주민에 대한 폭력과 부당한 토지 거래로 비판받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오늘날 호주 사회가 식민지 역사와 원주민 권리에 대해 계속해서 숙고하고 대화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정지수|본지 영문편집위원, 캄보디아 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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