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6일, 기자 일행은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주 센트럴 코스트(Central Coast) 지역에서 활동하는 타운 크라이어(Town Crier, 마을 전령) 스티븐 클라크(Stephen Clarke) 씨를 인터뷰하기 위해 와용(Wyong)으로 향했다.
여름 햇살이 스며든 와용 타운 파크(Wyong Town Park)는 한적했지만 이곳은 수십 년 동안 수많은 공식 행사와 공동체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온 장소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의 제안에 따라 와용 타운 파크에서 ‘목소리로 공식 행사를 여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스티븐 클라크는 센트럴 코스트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타운 크라이어다. 그러나 이 직함은 한국인에게는 물론 기자에게도 매우 낯선 이름이다.
‘타운 크라이어’라는 직업은 현대 사회에서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호칭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티븐 클라크는 센트럴 코스트에서는 이미 잘 알려진 인물이다. 시민권 수여식, 지역 축제, 기념행사, 그리고 국가적 추모의 순간들 속에서 그는 늘 특유의 복장과 또렷한 목소리로 공동체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번 인터뷰는 본지 권순형 발행인의 추천으로 시작되었다. 몇 년 전부터 권 발행인은 틈이 날 때마다 호주의 다양한 기념행사와 자연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촬영해 왔다. 그러던 중 그는 헌터 밸리 하이랜드 게임(Hunter Valley Highland Games)을 촬영하게 되었고 그 현장에서 매번 인상적인 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전통적인 복장을 갖추고 행사의 진행을 맡아 전체 분위기를 이끌며 축제의 품격을 한층 끌어올리는 사람이었다. 바로 스티븐 클라크였다.
지난해 역시 헌터 밸리 하리랜드 게임 현장에서 스티븐 클라크가 변함없이 행사를 진행하는 모습을 지켜본 권 발행인은 기자에게 그를 인터뷰하자고 제안했다.
“저 사람을 한 번 취재해 보면 좋겠습니다.”
단순한 행사 진행자를 넘어 그가 서 있는 자리에는 어떤 이야기와 시간이 축적되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 제안을 받은 기자는 곧바로 스티븐 클라크에 대해 조사해 보기 시작했다. 그의 공식 직함은 ‘타운 크라이어’. 생소한 이름이었다. 기자 역시 이 직업을 처음 접했기에 자연스레 검색창에 그 이름을 입력했다.
타운 크라이어의 기원, 고대, 중세 유럽의 공공 소통 방식, 현대 지방자치 사회에서의 상징적 역할에 대한 설명들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단순한 전통 재현이 아니라 공동체의 기억과 정체성을 ‘목소리’로 매개하는 역할이라는 점이 마음에 와닿았다.
타운 크라이어(Town Crier): 광장에서 울려 퍼지던 목소리
오래전 보았던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글래디에이터’ 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등장한다. 로마의 식민지 광장에서 한 남자가 군중 앞에 서서 황제의 칙령과 정치적 소식을 큰 목소리로 외치는 장면이다.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가 전하는 말은 곧 권력과 질서, 그리고 공동체의 현재를 규정한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다소 극적인 연출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장면은 고대 사회의 매우 일상적인 소통 방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신문도, 방송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대에 공동체는 어떻게 중요한 정보를 공유했을까? 그 역할을 맡았던 사람이 바로 ‘타운 크라이어’(Town Crier, 마을 전령)였다. 그는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라 도시와 권력, 그리고 시민을 연결하는 공식적인 목소리였다.
중세 유럽의 광장과 거리에서 타운 크라이어는 왕의 법령, 시장의 공지, 재난과 축제의 소식을 알렸고, 그의 목소리는 곧 공공의 언어였다.
근대 이후 인쇄술과 대중매체가 발전하면서 이 역할은 사라진 듯 보였다. 그러나 타운 크라이어의 기능은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다. 오히려 현대사회에서는 그것이 또 다른 방식으로 변주되어 살아남았다.
공식 행사에서 공동체의 시작을 알리고 시민권 수여식에서 새로운 시민을 맞이하며 기념식과 추모식에서 공적인 순간을 열고 닫는 역할, 그 모든 장면에는 여전히 ‘공식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호주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 나라 곳곳에는 오늘날에도 타운 크라이어가 존재한다. 후에 인터뷰에도 나오지만 스티븐에 의하면 호주 전역에 30여 명의 타운 크라이어가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지방자치단체와 공동체를 대표하여 역사와 현재를 잇는 상징적 인물로 활동한다. 단지 전통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의 언어를 몸으로 살아내는 존재들이다.
우리가 와용 파크에서 만나기로 한 스티븐 클라크는 그 전통이 오늘도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고대의 목소리가 지금 이 공원에서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이 만남을 특별하게 만든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스티븐 클라크를 만나게 되었다. 그의 목소리는 단지 소리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공동체를 열고 기억을 불러내는 하나의 언어였다. 그리고 그 언어의 중심에는 오랜 시간 다져진 소명 의식과 조용하지만 분명한 신앙의 결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음은 그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 먼저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공적 삶을 살아오는데 가족이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도 궁금합니다.
“저는 센트럴 코스트 태스콧(Tascott)에서 자랐습니다. 이 지역은 제 삶의 뿌리와도 같은 곳입니다. 마을 이름조차 개척자 토머스 앨리슨 스콧(Thomas Allison Scott)의 이름에서 왔다는 사실을 저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포인트 클레어 초등학교와 고스포드 고등학교에서 보낸 학창 시절 역시 지금도 이 지역의 일부로 제 안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제 삶에서 가장 큰 응원자는 언제나 어머니였습니다.
‘무엇을 하든, 상을 받든 작은 성취를 이루든, 저는 가장 먼저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늘 기뻐하며 저를 자랑스러워해 주셨죠.’
어머니는 2004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 격려와 사랑은 지금도 제 삶의 중심에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아내 팻시(Patsy)가 저의 가장 든든한 동반자입니다. 그녀는 은퇴한 목회자로 40년 전 우미나 비치(Umina Beach)에서 ‘굿뉴스 처치’(Good News Church)를 개척했고 그 교회는 지금 ‘호프유씨’(Hope UC, Hope Unlimited Church)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공식 선언문을 쓸 때마다 아내에게 보여 주는데 그녀는 문장 하나하나를 함께 다듬어 주며 제 사역을 조용히 지탱해 줍니다. 우리는 늘 이 길을 함께 걷고 있습니다.”
- 타운 크라이어가 되신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처음부터 계획했던 길은 아니었습니다. 제 인생의 출발점은 사실 음악과 교회였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구세군(Salvation Army) 교회에 다녔고 그곳의 브라스 밴드에 들어가 코넷(cornet, 트럼펫 계열의 관악기)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소리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경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경험은 제 삶을 자연스럽게 음악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이후 저는 오스트레일리안 부시 밴드에서 베이스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게 되었고, 1980년대 초에는 ‘올드 시드니 타운’(Old Sydney Town)이라는 역사 테마파크에서 연주를 하며 일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제 인생이 크게 방향을 틀게 됩니다. 그 테마파크에는 두 명의 타운 크라이어가 있었는데그들이 후임자를 찾고 있었고 제 목소리와 무대 경험에 주목해 저를 훈련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전통적인 ‘크라이’와 발성, 선언문 낭독을 배우게 되었고 이 역할이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 공동체를 섬기는 공적 소명이라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저는 1990년에 공식적으로 고스포드(현재의 센트럴 코스트) 타운 크라이어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음악은 지금도 제 삶의 중심에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HopeUC 교회에서 기타리스트로 예배를 섬기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코넷을 불며 시작된 제 음악의 여정은 지금도 예배와 공공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사람들을 잇는 다리가 되고 있습니다.”
- 언제부터 이 역할이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소명’이라고 느끼게 되셨고, 36년 동안 이 일을 계속해 오신 힘은 무엇입니까? (저희 크리스찬리뷰도 올해로 36년이 되었는데, 동갑입니다. 참 특별한 인연처럼 느껴집니다.)
“정말 그렇네요. 우리가 같은 나이라는 것이 참 의미있게 느껴집니다. 저는 이 일을 시작한지 이제 36년이 되었고 그 시간 동안 제 삶의 중심이 되어 왔습니다. 처음부터 저는 이 역할이 무대에서 주목받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타운 크라이어는 사람들의 시선을 자신에게서 시장(Mayer)과 행사, 그리고 공동체로 돌려주는 사람입니다. 그 순간 저는 이것이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공동체를 섬기는 공적인 자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곧 소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길을 계속 걷게 해 준 힘은 결국 사람들입니다. 시민권을 받는 분들, 축제를 즐기는 아이들, 추모식에 참석한 가족들… 매번 다른 얼굴과 다른 이야기가 있지만 그 모든 순간이 너무도 소중합니다.
사람들이 삶의 중요한 순간을 맞이할 때 그 자리에 함께 서 있다는 것, 그것이 저를 36년 동안 이 자리에서 버티게 하고 기쁨으로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든 이유입니다.”
- 시민권 수여식에서 많은 이들의 새로운 출발을 함께해 오셨는데 그런 중요한 순간에 함께하는 것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제가 평생 해온 일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순간들 중 상당수는 시민권 수여식에서 일어났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코소보(Kosovo)에서 전쟁을 피해 온 한 가족이 시민권을 받던 날이었어요. 그 가족은 단상 위에 서서 말 그대로 감정이 폭발했습니다. 어른들은 눈물을 흘렸고 아이들은 기쁨에 그 자리에서 뛰어올랐습니다. 그리고 국가를 부르는데 그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너무 강해서 그 자리에 있던 우리 모두가 그 의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시민권은 단순히 서류를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우리는 안전하다’는 선언이었고, ‘이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런 순간에 제가 서서 그 절차를 열고 제 목소리로 그 시간을 시작하게 된다는 것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특권입니다. 저는 그 순간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을 느낍니다.
사람들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할 때제가 그 자리에 함께 있다는 사실이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 여러 차례 타운 크라이어 내셔널 ‘챔피언에 선정되었는데 당신에게 훌륭한 ‘타운 크라이어’란 무엇이며 그 우승들은 어떤 의미였습니까?
“좋은 크라이는 단지 큰 소리가 아닙니다. 명확해야 하고 존중이 담겨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듣는 사람들이 그 공동체를 더 사랑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대회에서는 보통 100~125 단어 안에 그 모든 것을 담아야 하는데 그 짧은 순간에 도시의 이야기와 자부심,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결국 크라이어는 소리가 아니라 소통입니다.
저는 2012년, 2013년, 2016년, 2018년, 2019년, 그리고 2024년에 ‘챔피언 오브 챔피언스’라는 타이틀을 받았습니다. 그 상은 개인의 기교를 겨루는 것이 아니라 제가 얼마나 품격 있게 공동체를 대표했는 지를 묻는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무대에 설 때마다 저는 늘 생각했습니다. ‘이 순간이 나를 드러내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속한 사람들과 도시를 드러내는 시간이어야 한다.’ 우승의 순간들은 분명 드라마틱했지만 그보다 더 큰 보람은 제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자부심과 소속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제 ‘크라이’를 듣고 그곳에 가보고 싶어 하고 그 공동체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타운 크라이어로서 가장 큰 보상입니다.
- 버글러(Bugler)로서의 역할도 하고 계십니다. 이 일과, 그리고 버글이라는 악기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버글은 아주 단순한 악기입니다. 밸브도 없고 음을 바꾸는 장치도 없습니다. 연주자는 입술과 호흡, 그리고 마음으로만 소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버글의 소리는 매우 직접적이고 숨길 수 없는 진실성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그 점이 이 악기의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버글을 부는 자리는 대부분 안작데이(ANZAC Day), 전몰장병 추모식, 그리고 군 관련 기념행사입니다.
그때 제가 솔로로 연주하는 ‘라스트 포스트’(Last Post)는 단순한 곡이 아니라 기억과 존경을 소리로 표현하는 언어입니다. 말로는 전할 수 없는 감정, 슬픔, 감사, 그리고 희생에 대한 경외가 모두 그 몇 마디 음 안에 담겨 있습니다.
저는 특히 사람들이 그 소리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주시합니다. 어떤 이는 고개를 숙이고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며, 어떤 이는 침묵 속에서 기억합니다. 그 순간 공동체 전체가 하나의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버글을 불 때마다 이것이 단지 음악이 아니라 공동체의 기억을 열고 닫는 공적인 행위라는 것을 느낍니다. 그 소리를 불 수 있다는 것은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영광입니다. 말이 필요 없는 순간에 버글이 대신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 언제 신앙을 갖게 되셨고 그 신앙은 오늘날 당신의 공적 사명과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저는 1986년에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때 저는 단순히 교회에 다니는 신자가 아니라 삶의 주인이 바뀌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매일 주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도하고 의지하고 맡기는 삶, 그것이 제 일상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 신앙은 제 공적 역할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하나님의 대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대할 때 더 친절하려고 하고 더 정직하려고 하며 어떤 자리에서도 존중과 품격을 잃지 않으려 애씁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듯이 저는 제 목소리와 태도를 통해 그 사랑이 드러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타운 크라이어로서 공식 행사를 열고 버글러로서 추모의 순간을 지킬 때도 저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섭니다. 사람들의 인생에서 중요한 장면을 제 목소리로 열 수 있다는 것은 큰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주님을 신뢰하며 섬김의 자리에서 충실하게 살아가고자 합니다.”
- ‘선포하는 목소리’와 ‘기억을 울리는 소리’로써의 삶을 돌아볼 때 어떤 유산을 남기고 싶으십니까?
“호주 전역에는 공식적으로 활동하는 타운 크라이어가 약 30명 정도뿐입니다. 저는 이 일을 36년째 해오고 있는데, 「크리스찬리뷰」 역시 올해로 36년이 되었다고 하니 묘한 동질감을 느낍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사람들이 저를 이렇게 기억해 주는 것입니다.
‘그는 끝까지 성실했고, 늘 그 자리에 있었으며,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는 사람이었다.’
가능하다면 이 길을 50년까지 이어 가고 싶습니다. 화려한 명성보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공동체 곁을 지키는 사람으로 남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에필로그
와용 타운 파크의 여름 햇살 아래에서 스티븐 클라크의 목소리는 오래된 종소리처럼 잔잔하게 퍼져 울렸다. 그것은 단지 한 사람의 음성이 아니라 세대를 건너 이어져 온 공동체의 기억과 약속이 담긴 소리였다.
시민권을 받는 이들의 떨리는 숨결, 전쟁의 상처를 안고 선 가족들의 침묵, 축제를 맞이하는 아이들의 웃음, 그 모든 순간을 그는 한결같은 목소리와 나팔 소리로 품어 왔다.
그의 공공의 삶은 우리에게 묻는다.
“오늘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 어떤 목소리로 공동체를 섬기고 있는가?”
스티븐 클라크가 말했듯 진정한 소명은 자신을 드러내는 무대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 빛나도록 길을 열어 주는 자리다. 그의 ‘크라이’와 ‘버글’은 그래서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섬김의 언어이자 기억의 기도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시드니로 내려오는 동안 우리는 이 도시에 여전히 ‘공식의 목소리’가 살아 있으며 그 목소리의 중심에 조용하지만 단단한 신앙과 성실한 삶이 자리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 이야기를 기록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경식|본지 편집국장(Ph.D) 권순형|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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