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던컨 앤더슨(John Duncan Anderson)은 호주 현대사에 이름을 남긴 정치인이다. 그는 1999년부터 2005년까지 호주 제11대 부총리와 국민당(National Party) 대표로 활동했다.
6대째 내려온 뉴사우스웨일스(New South Wales)의 목축업자 가문 출신으로, 1989년부터 2007년까지 19년간 연방 의회에서 활동했고 존 하워드(John Howard) 정부에서는 부총리로 활동했다.
앤더슨은 기독교 집안 출신이 아니다. 그가 신앙을 갖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앤더슨은 평소에 존경하는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가 가지고 있던 기독교 신앙과 세계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선생님은 앤더슨에게 복음을 전했고 앤더슨은 복음을 받아들였다. 대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는 중 세속적 인본주의가 결국 세계 대전을 불러 왔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 앤더슨은 기독교 신앙에 더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앤더슨의 삶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자.
앤더슨은 1956년 11월 14일 시드니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1840년대부터 뉴사우스웨일스 북부 멀러레이(Mullaley)에서 목축업에 종사했다. 그의 아버지 던컨 앤더슨(Duncan Anderson)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북아프리카에서 호주 경기병부대(Australian Light Horse)로 복무했다.
어린 시절의 비극적 사건들이 앤더슨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세 살 때 어머니가 암으로 사망했다. 또한 1970년에는 그의 여동생 제인(Jane)이 공놀이를 하던 중 당시 13살이었던 앤더슨이 친 공에 맞아 사망했다. 이러한 가족의 비극은 그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앤더슨은 전통적인 호주 엘리트 교육 과정을 밟았다. 그는 시드니 파라마타(Parramatta)에 위치한 킹스 스쿨(The King's School)에서 공부했다. 이후 시드니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과를 옮겨 역사학을 공부해 학위를 받았다.
앤더슨은 1984년 국민당의 탐바 스프링스(Tambar Springs) 지역의 지부장이 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1989년 귀디르(Gwydir) 선거구에서 출마해 여러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1990년에는 존 하워드(John Howard)의 비서관으로도 일했다. 1993년에 앤더슨은 피터 맥가우란(Peter McGauran), 존 샤프(John Sharp), 브루스 스콧(Bruce Scott)을 물리치고 국민당의 부대표로 선출되었다.
1996년 호주 연방 선거에서 앤더슨은 존 하워드와 함께 국가 유산 복원을 위한 10억 달러 기금 설립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워 승리했다. 선거 승리 후 그는 1차 산업 및 에너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앤더슨은 디젤 연료 환급, 호주 검역 및 검사 서비스, 농업 연구 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러한 것들은 예산 지출 삭감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 동안 정부는 양모, 밀, 낙농 부문을 규제 완화하고 육류 및 축산업의 많은 부분을 민영화했다. 앤더슨의 재임 기간은 호주 농업 부문에 중대한 구조조정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앤더슨은 양모 산업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정부 소유의 호주 양모 공사(Australian Wool Corporation)가 다량의 양모 재고와 약 20억 달러의 부채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앤더슨과 연립정부는 양모 생산자들에게 3억 달러를 지급하고 호주 양모 공사의 민영화를 추진했다.
호주 양모 공사는 2001년 8월까지 완전히 민영화되어 울스톡 오스트레일리아(Woolstock Australia)가 되었다.
1997년 존 앤더슨은 교통 및 지역 개발 장관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맡았다. 이 직책에서 그는 호주의 도로, 철도, 수자원 시스템 개선을 담당했다. 또한, 그는 호주 철도 트랙 공사(Australian Rail Track Corporation) 설립을 도왔다.
앤더슨은 교통 정책에도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오스링크(Auslink)를 통해 국가 교통 인프라를 대폭 개선했고, 국가 교통 인프라를 통합된 시스템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를 통해 그는 호주의 교통 인프라를 현대화했다. 그의 노력으로 지방 지역 간의 연결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앤더슨은 1999년 7월 20일에 국민당 대표로 선출 되었고, 호주 연방정부 부총리가 되었다. 존 하워드 총리가 해외에 있을 때 앤더슨은 총리 대행으로 활약했다.
앤더슨의 부총리 재임 기간은 국제 테러와의 전쟁 시기와 겹친다. 그는 1999년부터 2005년까지 호주 국가안보위원회의 회원이었으며 이 위원회는 테러와의 전쟁, 특히 발리 폭탄 테러에 대응했어야 했다.
2002년 10월 12일 오후 11시경 인도네시아 발리 섬에서 세 개의 폭탄이 폭발했으며 두 개는 번화한 해변의 나이트클럽에서, 한 개는 근처 미국 영사관 앞에서 터졌다. 이 폭탄 테러로 호주인 88명을 포함하여 202명이 사망했다.
하워드 총리는 10월 14일 내각에 테러 상황을 알리며 대책을 논의했다. 하워드 총리는 인도네시아 주재 호주 대사에게 모든 수단을 동원해 48시간 내에 호주인 부상자 모두를 호주로 후송할 것을 명령했다.
한편 하워드 총리, 앤더슨 부총리, 사이먼 크린(Simon Crean) 야당 대표 등은 10월 17일에 인도네시아 발리 호주 영사관에서 열린 희생자 추도식에 참석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테러 사건 때 앤더슨은 총리 대행으로 역할을 감당했다. 또한 2004년 인도네시아가 쓰나미로 큰 피해를 입자 앤더슨은 호주 정부를 설득해 인도네시아에 10억 달러를 원조금으로 보냈다.
이는 그가 이룬 중요한 업적들 중 하나이다. 또한, 앤더슨은 2004년 수자원 관리에 대한 체계적인 정책을 수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005년 앤더슨은 건강상의 이유로 국민당 대표와 부총리직에서 사임했다. 그의 두 직책은 마크 베일(Mark Vaile)에게 승계되었다. 그는 2007년 정치계에서 은퇴했다.
정계를 은퇴한 후에 앤더슨은 기업과 공공기관에서 일했다.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이스턴 스타 가스(Eastern Star Gas) 회사의 회장으로 일했다. 또한 2013년에는 호주 원주민 문제에 대한 연구 보고서를 작성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한편 앤더슨은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가난을 퇴치하기 위해 설립된 비영리 단체인 크로포드 펀드(The Crawford Fund)의 회장으로서 일하기도 했다. 이 단체의 목표는 가난한 개발도상국의 농업 공동체와 가족의 복지를 개선하는 것이다.
2017년 그는 다양한 호주 지도층 인사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존 앤더슨과의 대화'(Conversations with John Anderson)라는 인터넷 방송을 시작했다. 역사학자 빅터 데이비스 핸슨(Victor Davis Hanson), 전 노동당 대표 킴 비즐리(Kim Beazley), 조나단 하이트(Jonathan Haidt), 글렌 로리(Glenn Loury),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Jordan Peterson)을 포함한 다양한 사람들이 앤더슨의 인터뷰 방송에 출연했다.
이 프로그램은 호주 사회가 직면한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을 심도 있게 다뤄 많은 청취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또한, 2017년 호주 동성 결혼법 찬반 투표가 진행될 때 앤더슨은 동성 결혼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많은 호주 사람들은 앤더슨을 원로 정치인으로 존경하고 있다. 하워드 총리는 앤더슨 부총리를 자신이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정직한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우리는 앤더슨을 훌륭한 정치인으로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도네시아 발리 테러 사건, 미국 9.11 테러 사건 등 중대한 국제적 위기 상황에서 그가 부총리로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했기 때문이고, 호주 농민들을 위해 당파를 초월해 농민들을 위한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추진한 교통 인프라 개혁과 수자원 관리 정책 등이 국가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고, 인터넷 방송 프로그램인 ‘존 앤더슨과의 대화’가 국가 발전에 중요한 문제들을 토론하는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이다.
앤더슨의 영향력은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
정지수|본지 영문편집위원, 캄보디아 지사장 사진 출처= John Anderson Photo-Gallery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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