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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28일, 연말의 분주한 일정 속에서도 기자와 권 발행인은 「크리스찬리뷰」가 후원한 ‘암환우 목회자 가정을 위한 자선음악회’에 참석했다.
한여름의 열기가 아직 남아 있던 시드니의 오후, 이날 음악회는 그 이름처럼 고통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을 위한 따뜻한 위로의 자리였다. 출연진 모두가 마음을 다해 무대에 섰고, 350여 명의 참석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깊은 공감과 감동을 나누었다.
그날 유독 기자의 눈과 귀를 붙잡아 세운 순간이 있었다. 테너 김영우가 무대에 올라 부른 찬송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였다. 이 찬송은 교회와 예배, 장례와 집회 자리에서 수없이 불러왔고 들어온 곡이었다. 너무 익숙해 새롭게 들을 이유가 없다고 여겼던 노래였다.
그러나 그날 김영우가 부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는 익숙한 찬양이라는 감각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에는 천둥처럼 예배당을 가득 채웠다가 이내 믿기지 않을 만큼 작아지며 섬세한 숨결로 가라앉았다.
강함과 절제, 확신과 기도가 한 곡 안에 공존했다. 그것은 ‘잘 부른 찬양’이라기보다 한 사람이 살아낸 시간이 소리로 흘러나오는 고백처럼 들렸다.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이 찾아왔고 공연이 끝난 뒤에도 그 울림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이날 음악회는 참석한 이들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공연을 마친 뒤 참석자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참 잘 온 자리였다”는 말이 오갔고 여운이 남은 채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고 담소를 나누었다. 그 흐름 속에서 기자 역시 김영우와 짧은 인사를 나누며 기념사진을 함께 찍었다.
그리고 그 순간 뜻밖의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낯선 무대에서 만난 이 성악가는 한참 후배이지만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었다. 반가웠다. 그는 그렇게 공연장의 인물에서 갑자기 삶의 기억을 공유하는 인연으로 다가왔다.
그날 기자는 즉시 테너 김영우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세계 무대에서 활동 중인 성악가로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의 주인공 ‘칼라프’ 역으로 초청 공연을 앞두고 있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자선 음악회를 위해 기꺼이 무대에 섰다는 사실은 그의 노래가 단순한 공연이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어졌다. 무대 위의 성악가가 아니라 그 노래 뒤에 놓인 시간과 선택, 그리고 삶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오페라 오스트레일리아에 연락했고 몇 차례의 조율 끝에 인터뷰가 성사됐다.
1월 21일, 시드니 시티 서리힐(Surry Hills)에 위치한 오페라 오스트레일리아 사무실에서 테너 김영우를 만났다.
운동선수의 꿈에서, 성악가의 길로
김영우의 출발점은 음악이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노래하는 사람을 꿈꾼 이가 아니었다. 학창 시절 그의 관심은 늘 몸을 쓰는 일에 있었고 운동을 좋아했다.
실제로 그를 무대에서 처음 보았을 때도 성악가보다 운동선수가 먼저 떠올랐다. 큰 키와 넓은 어깨, 다부진 체구는 무대 위 성악가라기보다 운동선수가 더 잘 어울리는 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그가 진지하게 품었던 꿈 역시 대통령 경호원이었다.
“그때는 대통령 경호원이 되고 싶었어요. 몸 쓰는 일도 좋았고 누군가를 지키는 역할이 멋있어 보였거든요.”
음악은 아직 그의 삶의 중심이 아니었다. 교실 한편에 놓여 있던 다른 세계에 가까웠다. 전환점은 고등학교 시절 한 음악 교사의 권면이었다. 성악을 전공한 음악선생은 수업 시간마다 가능성이 보이는 학생들에게 조심스럽게 성악을 권했다고 한다.
“저희 음악 선생님이 성악 전공이셨어요.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친구들한테 성악을 많이 추천하셨죠. 사실 저한테도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미 말씀을 하셨었어요.”
하지만 그 권면은 곧바로 선택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때를 “굉장히 늦게 시작한 경우”라고 표현했다. 실제로 성악을 시작한 시점은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을 마친 뒤였다.
“저는 고3 수능 끝나고 시작했어요. 수능 끝나고 한 2주 정도 레슨받고 곡 몇 개 외워서 그냥 시험을 봤어요.”
문제는 조건이었다. 그는 인문계로 수능을 치렀고예체능 전형으로 지원할 수 있는 길이 거의 없었다. 그때 선택할 수 있었던 곳은 단 한 곳, 추계예술대학교였다. 당시 수도권 대학 가운데 인문계 수능 성적으로 성악과 지원이 가능했던 거의 유일한 학교였다.
“그때는 인문계로 수능을 쳤기 때문에 예체능 지원 자체가 안 됐어요. 그런데 추계예대만 가능했어요. 정확한 용어는 기억이 안 나는데 교차 지원 같은 걸로요. 그래서 그 학교 시험만 딱 봤죠.”
준비된 계획이라기보다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내린 선택에 가까웠다. 성악 레슨을 본격적으로 받은 것도 그 무렵이 처음이었다. 그는 그 시절을 돌아보며 담담히 말한다.
“운이 좋았죠. 어쨌든 그렇게 학교에 들어가게 됐어요.”
늦은 출발이었고 충분히 준비된 길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선택은 분명했다. 노래는 그렇게 그의 삶 주변에 머물던 세계에서 중심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꼴찌에서 1등까지
추계예술대학교는 김영우에게 쉬운 선택지가 아니었다. 해외 진출이나 이후의 길을 생각하면 결코 유리한 출발선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 학교를 택한 이유가 있었다. 한 사람 때문이었다. 당시 추계예술대학교에는 한국 성악계의 전설로 불리는 테너 김영환 교수가 재직 중이었다.
“그분보다 뛰어난 테너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요. 그분한테 배우고 싶어서 추계예대를 선택한 게 제일 컸죠.”
그러나 입학이 곧 그분에게 배움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추계예대에서는 입학 후 성악과 모든 신입생이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고 교수들이 직접 제자를 선택하는 과정을 거친다. 김영환 교수에게 사사받을 수 있는 정원은 단 한 명. 그 마저도 여유가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는 그 과정을 운처럼 회상했다.
“들어간다고 해서 다 그분 제자가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그런데 정말 감사하게도 그때 제가 뽑혔어요.”
최고의 스승을 만났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는 입시 준비 과정 자체가 거의 없었다. 성악을 시작한 지 불과 몇 주 만에 대학에 들어왔고 음악 이론은 거의 백지에 가까웠다.
“악보를 못 봤어요. 계이름도 제대로 몰랐고 화성학은 전혀 따라갈 수가 없었죠.”
수업은 벽처럼 느껴졌다. 시험 성적표에는 F가 반복됐다. 이론 과목은 특히 그를 괴롭혔다. 결국 실기 시험에서도 그는 바닥을 찍었다. 31명 중 공동 꼴찌. 그 숫자는 오랫동안 그의 기억에 남아 있다.
“실기 시험을 쳤는데 제가 꼴찌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31명 중에 공동 3명이 꼴찌를 해서 공동 28등을 한 적이 있는데 그게 공동 꼴찌인 거죠”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꼴찌를 함께 했던 한 여학생이 연습실에서 반주를 해주겠다고 했다. 기대보다 호의에 가까운 제안이었다. 그러나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그녀의 피아노가 꽝 하는 소리와 함께 거칠게 멈췄다. 그리고 그녀의 한마디는 그에게 비수처럼 와 꽂혔다.
“야, 너 노래 진짜 못한다.”
그 말은 날카로웠다. 그는 그 순간을 “그의 인생에서 처음 받은 정신적인 충격”으로 기억하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 한참을 울었다. 왜 성악을 시작했는지이 비싼 등록금을 내며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처음으로 자신을 대면해서 스스로에게 묻는 밤이었다.
그날 이후 그는 결정을 내렸다. 수업 대신 연습실로 향했다. 아침 일찍 학교 문이 열리면 들어가고 밤 늦게까지 남았다. 물과 두 개의 도시락을 챙겨 연습실에서 목에 피가 나도록 연습했다.
매일 스피커를 들고 연습실에 틀어 박혀 대가들의 노래를 틀어놓고 따라 불렀다. 한 달이 아니라 학기 내내 치열하게 연습했다.
“아침 9시부터 밤 10시, 11시까지 계속 연습했어요.”
결과는 생각보다 빠르게 나타났다. 그는 학기 말 시험에서 1등을 했다. 꼴찌에서 1등까지 단 한 학기 만의 변화였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확신했다.
“아, 내가 이걸 정말 열심히 하면 남들과는 다른 결과를 낼 수 있겠구나.”
그 확신은 이후의 길을 힘 있게 밀어 올렸다. 대학원에 진학한 뒤 스승과 함께 처음 도전한 중앙음악콩쿠르에서 그는 대망의 1위를 차지했다.
김영우는 당시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그때는 중앙음악콩쿠르가 정말 성악가들에게는 등용문 같은 대회였어요. 거기서 1등을 하면 이제 이름이 알려지고 길이 열리는 그런 무대였죠.”
실제로 그 대회는 당대 성악가들에게 가장 권위 있는 관문으로 여겨졌고 추계예술대학교 출신 성악가로서는 그의 우승이 첫 사례였다. 늦게 시작했고 기초도 부족한 상태에서 출발했지만 그는 그 무대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
목소리를 잃다 – 4년의 침묵과 기도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찬란했던 순간은 가장 깊은 고통의 시간으로 이어졌다. 중앙음악콩쿠르 1위라는 성취는 그에게 단숨에 이름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감당하기 벅찬 무게를 남겼다.
“나가면 무조건 1등을 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었다. 실력과 경험이 아직 충분히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맞닥뜨린 기대는 점점 그를 조여왔다. 그는 그 시기를 “독이 든 성배 같았다”고 회상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성대결절이 아니었다. 성대 신경마비였다. 한쪽 성대가 움직이지 않는 병, 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고음은 물론 중음조차 버거웠다.
찾아간 병원에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내일 갑자기 돌아올 수도 있고 일 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길면 10년이 걸릴 수도 있어요.”
수술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기는 몸보다 마음이 먼저 지쳐 있던 시간이었다. 중앙음악콩쿠르 1위 이후 쏟아진 기대 무대에 설 때마다 따라붙던 부담감, ‘이제는 실패하면 안 된다’는 압박감이 그를 몰아붙였다.
목소리는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멈춰 버린 것이다. 대학원을 졸업하던 무렵 그렇게 그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목소리를 잃어 버렸다. 연습실에서는 삑사리가 잦아졌고 소리는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어느 날은 옆 연습실에서 들려온 말들이 귀에 박혔다.
“쟤 목 갔다더라.” “교만하더니 그럴 줄 알았다.” 그 조롱의 말들은 가슴에 꽂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날이면 그는 자주 울었다. 왜 성악을 시작했는지 왜 이 길에 서 있는지,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보면 그 시간은 멈춤의 시간이 아니라 내려놓음의 시간이었다. 그는 자신이 교만했음을 인정하게 되었고 더 이상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마주했다. 남은 것은 기도뿐이었다. 그는 매일같이 기도했다.
그 시간 속에서 그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고 고백한다.
“그동안 교회는 다녔지만, 성가대에서 솔리스트 하면서 돈 벌려고 다녔어요.”
이전까지의 신앙은 이름에 가까웠다. 필요할 때 교회에 서고 찬양은 일이었다. 그러나 목소리를 잃은 자리에서 그는 처음으로 십자가 앞에 섰다.
“피 묻은 십자가의 예수님이 제 가슴에 들어오셨어요. 그때 제가 구원받은 성도라는 게 분명해졌습니다.”
그 순간 그는 확신했다. 노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생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기도의 내용도 달라졌다. 목소리를 돌려달라는 간구는 점점 사라졌고 대신 예수님께 집중하며 자신의 존재를 내려놓는 기도가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중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오페라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하나님께서 ‘나는 너를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로 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나 그 응답은 곧바로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3년 6개월 동안 아무런 변화는 없었다. 침묵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군 복무를 마치고 소집해제되던 날 아침, 그는 이전과 다른 감각을 느꼈다. 목소리가 달랐다. 확신은 없었지만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는 곧바로 병원을 찾았다. 검사를 마친 뒤의사는 짧게 말했다.
“돌아왔습니다.”
네 해의 기다림 끝이었다. 그 기다림의 끝에 한줄기 빛이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군복무 소집 해제되는 날 하나님이 치유해 주신 거죠.”
아일랜드에서 만난 평생의 스승
목소리가 돌아온 뒤 그는 곧바로 무대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 그는 분명하게 느꼈다. 다시 노래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대로는 오래 노래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이 돌아왔을 때 바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이제는 다시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마음이 더 컸어요.”
이미 좋은 스승을 만났지만 그는 더 넓은 세계에서 소리를 처음부터 다시 점검하고 싶었다. 그렇게 그는 유학을 결심했고, 목소리를 맡길 수 있는 스승을 찾아 유럽으로 향했다.
그는 유학지로 더블린의 아일랜드 왕립 음악원(Royal Irish Academy of Music)을 선택했다.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아일랜드 왕립 음악원에는 해외 학생을 대상으로 한 장학 과정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곳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인생을 바꿀 한 사람을 만난다. 아일랜드 오페라의 전설로 불리던 소프라노 베로니카 던(Veronica Dun)이다.
첫 레슨에서 그는 노래를 채 한 소절도 끝내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베로니카 던은 갑자기 노래를 멈추게 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렇게 외쳤다.
“만세! 나는 너를 기다렸었어.”
그리고 그를 꼭 안아주었다. 그 순간을 그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노래를 평가받는 느낌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받아들여지는 느낌이었어요.”
베로니카 던은 이미 정년을 넘긴 나이였지만 그를 위해 하루 여섯 시간 많게는 여덟 시간까지 레슨을 이어갔다. 때로는 식사도 함께하며 발성의 기초부터 호흡, 소리의 방향, 무대에서의 태도까지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그녀는 마지막 ‘벨칸토 시대’를 직접 살아낸 사람이었고 세계적인 테너들과 호흡을 맞춰온 산증인이었다.
“그분은 소프라노였지만 테너의 소리를 정확히 알고 계셨어요. 어떤 소리가 건강한지 어떤 소리가 오래 가는지요.”
아일랜드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경제적 여유는 없었고,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비가 오고 바람이 거센 날에도 하루 15~20km를 걸어 통학했다.
우산조차 펼 수 없는 날씨 속에서 우비를 뒤집어쓴 채 걷던 길 위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다시 마주했다. 그는 훗날 그 시간을 “노래보다 삶을 다시 배우던 시기”로 기억한다.
그에게 베로니카 던은 단순한 스승이 아니었다. 노래를 다시 시작하게 한 사람이었고 목소리를 맡길 수 있게 해준 사람이었으며 무엇보다 다시 성악가로 서게 해준 평생의 스승이었다.
아일랜드에서의 일 년은 길지 않았지만 그의 노래와 삶을 지탱하는 깊은 뿌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 뿌리 위에서 그의 다음 여정은 독일로 이어진다.
독일 쾰른에서,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로
아일랜드에서 수료를 마칠 즈음 뜻밖의 소식이 찾아왔다. 독일 쾰른 오페라극장 오페라 스튜디오(인턴과정) 합격 통보였다. 준비된 계획이라기보다 막차처럼 다가온 기회였다.
그는 아내와 함께 짐을 꾸려 독일로 향했다. 화려한 시작은 아니었다. 월세를 내고 나면 손에 남는 것은 많지 않았고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도시를 걸어 다니는 날이 잦았다. 단칸방에서의 신혼생활, 생계를 걱정하며 버텨야 했던 시간들이 이어졌다.
쾰른 오페라극장의 오페라 단역배우는 그가 표현한 대로 ‘서바이벌’에 가까운 곳이었다.
주역이 아닌 단역으로 수많은 작품에 투입됐고 하루에도 여러 리허설과 공연이 이어졌다. 독일어, 음악, 연기, 체력까지 모두가 시험대에 올랐다. 무대 위에서는 늘 긴장했고 때로는 지휘자의 질책을 홀로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았다. 무대 뒤에서 주역 가수들의 호흡과 선택을 지켜보며언젠가 자신이 서게 될 자리를 조용히 준비했다.
그렇게 2년의 오페라 스튜디오 과정을 지나 그는 쾰른 오페라극장의 전속 솔리스트로 남게 되었다. 어느덧 10년. 독일 무대는 그를 단단하게 만들었고 하루하루를 가볍게 여기지 않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독일의 시간이 뜻밖의 인연을 통해 남반구로 이어졌다.
2023년 여름, 영국의 낙소스 섬에서 한 오페라 페스티벌 무대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에서 그는 바쿠스 역을 맡아 무대에 섰다. 그 공연을 남반구에서 온 오페라 오스트레일리아의 캐스팅 디렉터가 지켜보고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 디렉터는 그의 목소리에 반해 그를 오스트레일리아로 초청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2024년, 그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무대에 섰다. 푸치니의 ‘토스카’에서 ‘카바라도시’ 역이었다.
그러나 이 무대가 그에게 특별했던 이유는 단지 세계적인 극장이어서가 아니었다. 사실 그는 20대 초반 아무것도 아닌 여행자로 시드니를 찾았던 시절이 있었다. 찬양선교팀 멤버로 시드니를 찾았을 때 그는 오페라하우스 앞에 서서 조용히 기도한 적이 있었다.
“내 생애에 이곳에서 노래를 부를 기회가 있을까? 언젠가 여기서 노래할 수 있다면 너무나 감사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는 오랜 시간이 지나 현실로 이루어졌다.
독일에서 단련된 시간과 아일랜드에서 다시 배운 소리 그리고 젊은 날의 기도가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그에게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성공의 상징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에필로그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기도가 노래가 되기까지
2026년은 김영우에게 또 다른 이정표가 된 해이다. 그는 호주 오페라 오스트레일리아 시즌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에서 주인공 ‘칼라프’ 역을 맡아 무대에 섰다. 이번 투란도트 시즌에서 칼라프는 한 사람의 목소리에만 맡겨지지 않았다.
총 세 명의 테너가 장기공연 중 역할을 나누어 맡았고 그중 김영우는 시즌의 문을 여는 초반 주요 공연들을 책임지며 무대의 중심에 섰다. 1월 중순부터 2월 10일까지 이어진 그의 칼라프는 단순한 캐스팅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제작진이 그에게 맡긴 것은 한 역할이 아니라 시즌의 시작을 이끄는 무게라고 보여진다.
인터뷰를 마친 뒤 오페라 오스트레일리아의 초대로 지난 1월 28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조안 서덜랜드 오페라극장에서 기자와 권 발행인은 그의 무대를 경험했다.
‘투란도트’는 몇 년 전에 이어 두 번째 관람이었지만 이전에 보았던 공연과는 분명히 달랐다. 익숙한 장면과 음악 위로 전혀 다른 결의 감정이 겹쳐졌다. 무대 위의 김영우는 ‘노래하는 칼라프’라기보다 그 인물을 살아내는 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클라이맥스,
‘네순 도르마’(Nessun dorma, 아무도 잠들지 말라) 그 아리아는 그날따라 유난히 오래 귀에 남았다.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았고 감정으로 과장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절제된 호흡과 단단한 중심이 만들어내는 여백이 노래를 더 깊게 만들었다.
이렇게 ‘네순 도르마’를 감칠맛 나게 들은 적이 있었던가 스스로에게 묻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 소리 안에는 네 해의 침묵이 있었고 기도의 시간이 있었으며 아일랜드의 비바람과 독일 무대의 긴장감이 겹쳐 있었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한 인생의 궤적이 들리는 시간이었다.
이 무대는 청년 시절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언젠가 설 수 있기를 조용히 바랐던 기도가 현실이 된 순간이었고 또한 긴 여정의 결실이자 다음 여정의 출발점으로 보여진다.
공연이 끝난 후 객석 위로 올라온 박수는 한 사람의 성취를 넘어 그의 삶 전체를 축복하는 듯한 긴 여운을 남겼다. 우리는 그날 한 성악가의 노래를 들었지만 실은 한 사람이 기다림 속에서 어떻게 살아내는지를 목격한 것처럼 와닿았다.〠
주경식|본지 편집국장(Ph.D) 권순형|본지 발행인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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