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빌 토마스 보너(Neville Thomas Bonner)는 1922년 3월 28일 뉴 사우스 웨일스주(New South Wales) 북쪽에 위치한 트위드 강(Tweed River)의 우케레바흐(Ukerebagh)섬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줄리아 벨은 원주민이었고, 아버지 헨리 케네스 보너는 영국 이민자였다. 그의 외조부 로저 벨은 브리즈번 강의 재게라(Jagera) 부족의 구성원이었다.
그의 독특한 민족적 정체성은 보너가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기도 했지만 자아 정체성 형성 시기에 많은 혼란을 주었다.
보너는 당시 많은 원주민 아이들처럼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1935년 2월부터 12월까지 보데저트 주립 농촌 학교 3학년에 등록한 것이 그가 받은 유일한 정규 교육이었다.
그의 외할머니 아이다는 손자들에게 교육을 시키기 위해 퀸즐랜드로 돌아왔지만, 1935년 6월 할머니가 사망한 후 6개월 만에 보너는 뉴 사우스 웨일스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삼촌 잭에 의해 퀸즐랜드의 우라빈다 원주민 정착촌으로 보내졌다. 우라빈다에서 보너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 후 자신을 원주민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으로 원주민 부족 의식에 참여했고 원주민 장로들로부터 원주민의 문화와 전통을 배웠다.
보너는 퀸즐랜드와 뉴사우스웨일스 북부를 돌아다니며 낙농장 일꾼, 목장 일꾼, 카우보이로 일하면서 때로는 채소를 따거나 땅을 개간하고 울타리를 치는 일을 했다.
북부 퀸즐랜드의 목장에서 첫 번째 아내 모나를 만난 후 부부는 1943년 그녀의 고향인 팜 아일랜드로 돌아가 결혼했다.
팜 아일랜드의 원주민 보호구역에서 가족과 함께 살면서 보너는 지역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나중에 정치인으로서 활용하게 될 많은 기술을 배웠다. 그는 그곳에서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배웠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사람들과 함께 지역 공동체를 발전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가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의 정치적 역량이 크게 발전했다.
한편, 1969년 그의 아내 모나가 사망했다. 그녀는 다섯 명의 아들들을 낳았다. 보너는 3명의 딸들을 입양했다.
1960년 보너는 입스위치(Ipswich)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온건한 원주민 권리 단체인 OPAL(One People of Australia League, 호주 하나의 민족 연맹)의 이사회에 합류했다. 그는 1970년 이 단체의 퀸즐랜드 지부 회장이 되었다.
1967년 원주민을 호주 시민으로 인정한 국민투표 이후, 보너는 정치에 입문할 결심을 했다. 그리고 그는 노동당이 아닌 자유당에 입당했다.
1971년 상원의원 애너벨 랭킨의 사임 후 보너는 결원을 채우기 위해 선택되었고 호주 의회에 입성한 최초의 호주 원주민이 되었다. 1971년 6월 11일 상원에 임명된 보너는 전국의 원주민과 토레스 해협 섬 주민들의 희망과 기대를 짊어졌다.
그는 1972년, 1974년, 1975년, 1980년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는 의회 첫 연설에서 퀸슬랜드 주민들을 위해서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시대가 요구하는 역할을 감당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상원의원으로 재직하는 동안 보너는 수많은 상원 및 의회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보너는 자신이 속한 자유당 정책이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충돌할 때마다 반대표를 던졌다. 그는 무려 23번이나 당론을 거부했다.
1981년 보너는 유일하게 집권당의 의원으로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Great Barrier Reef)에서 석유나 가스 시추를 허용하는 법안에 반대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이 법안을 반대한 것이었다.
보너는 원주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그는 1976년 경찰이 원주민들을 심문하는 것을 규제하는 법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이 법안은 비록 의회에서 통과되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보너는 상원 의원으로 원주민들을 위한 법안들을 만들면서 많은 아픔을 느꼈다. 특히 자신만이 수많은 인종차별주의자들과 싸우는 것 같은 느낌을 자주 받았다. 1978년 프레이저 정부가 퀸즐랜드주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개입하겠다는 약속을 철회했을 때 보너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는 의회에서 원주민들의 권리를 향상시키기 위해 목소리를 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동료 의원들로부터 무시당했다.
1982년 자유당은 퀸즐랜드 상원 후보 명단에서 그를 1순위에서 3순위로 강등시켰다. 그 이유는 그가 자주 당론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보너는 자유당에서 사퇴하고 무소속으로 1983년 선거에 출마했지만 근소한 차이로 의석 유지에 실패했다.
1983년 6월, 밥 호크가 이끄는 노동당 정부는 그를 호주방송공사(ABC) 임원으로 임명했다. 그는 1984년 4월에는 잠시 ABC 의장 대행을 맡았으며, 1986년 6월에 재임명되었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그리피스 대학교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고, 공로를 인정받아 1993년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보너는 1979년 올해의 호주인으로 선정되었다.
보너는 1999년 2월 5일 오랜 암 투병 끝에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보너가 사망하자 여러 단체에서 그를 기념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2000년에 연방 정부가 네빌 보너 기념 장학금을 설립했는데, 이 장학금은 호주 원주민들이 정치학이나 관련 과목의 박사 학위를 공부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사용되었다.
2004년에 호주 정부는 그의 이름을 따서 퀸즐랜드 연방 선거구 이름을 ‘보너’라고 명명했다. 또한, 2025년에는 퀸즐랜드 정부는 의사당 부지에 보너를 기념하는 동상을 세웠다.
보너는 호주 정치사에서 획기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호주 의회에 입성한 최초의 원주민으로서 미래의 원주민 정치인들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그 이후로 16명의 호주 원주민들이 모든 주요 정당과 무소속으로 하원과 상원에서 정치인으로 봉사했다.
상원의원 로버트 힐은 1999년 보너의 사망 후 추도사에서 그의 삶이 우리 모두에게 교훈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그가 역경을 극복하고 호주 정치인이 된 것과, 정치인으로서 호주 원주민들을 위해 봉사한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너는 보수적이면서도 자신의 혈통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하는 호주 사회에서 원주민의 권리를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 인정받아 마땅하다.
그의 정치적 유산은 단순히 '최초'라는 것을 넘어서, 원칙과 일관성, 그리고 자신의 민족을 위한 헌신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정지수|본지 영문편집위원, 캄보디아 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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