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살짜리 크리스찬의 걸음

노영란/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6/02/23 [10:33]

 

▲ ©Alexas Fotos     

 

요즘 유튜브를 열고 쇼츠를 보면 자주 뜨는 영상이 있어요. 짧은 영상 속 경쾌한 음악과 함께 얼굴에 흰 분칠한 광대가 나오는 영상인데요, 그 광대는 색색의 가발과 커다란 안경을 허리춤에 걸쳤다가 어떤 사람을 흉내낼 때 비슷한 것들을 재빨리 꺼내어 써요.

  

그리고는 사람들의 걸음걸이와 표정을 따라 하는데 놀랍게도 그는 자신이 흉내내는 사람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걸을지를 미리 알고 동시에 따라 해요.

  

그가 흉내 내는 것은 사람들의 ‘걸음걸이’지만, 드러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 방향과 무의식’이어서 마치 그 중심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스스로도 모르게 반복하는 습관, 걸음에 배어있는 성격, 그 걸음을 만든 삶의 속도 같은 것들 말입니다. 누군가가 그대로 비춰주기 전까지는 쉽게 의식되지 않는 것들이죠.

  

광대가 자신을 따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사람들의 반응은 주로 3부류로 나뉩니다. 대부분은 펄쩍 뛰며 당황하다가 곧 광대와 함께 신나게 웃어요. 보는 사람도 즐겁죠. 드물게는 분노하는 이도 있고, 매우 자주 무표정한 이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들켰을 때 자기 마음을 순간적으로 드러냅니다.

  

자신의 모습이 과장되게 재현되어 웃음거리가 될 때 그것을 유희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비교적 탄력적이고 안정적인 자아를 지닌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내려놓는 마음의 여유와 자기 수용이 있는 그 웃음은 광대를 향한 것이 아니라 사실 자기 자신을 향한 웃음이거든요.

  

가장 강렬한 반응은 분노예요. 광대가 자신을 따라 했다는 이유만으로 화를 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순간적이지만 공격적으로 대들기도 해요. 표면적으로는 과민반응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종종 깊은 수치심이나 억압된 분노가 숨어 있는 거죠.

  

다스려지지 못한 분노는 사라지지 않아요. 이 또한 광대를 향한것이 아니라 오래 눌려 있던 자기 비명처럼 보여져요.

  

그런데 영상 중 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흉내 내는 광대를 보고도 표정에 변함이 없어요. 그 사람들이 저의 눈길을 끌어요. 무표정은 중립처럼 보이지만 종종 ‘방어’에 가까워요. 자신이 해석되거나 노출되는 상황을 원치 않는 것이고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위험하다고 학습된 마음도 있을 것이며 감동에 대한 무관심과 삶에 대한 낮은 기대감이 이 방어 기제를  지지해요.

  

예수님 시대에도 무표정한 사람들이 많아서 그 마음 상태에 대한 성경 구절들이 있어요. 기적을 보고도 말씀을 듣고도 아무 일 아닌 듯 돌아선 사람들이죠.

  

마음이 굳어 스스로 듣지 않기로, 보지 않기로 선택

하고 오히려 마음을 닫아 하나님을 거부하는 영적 상태… 무표정은 악함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인 피로감일 수 있고, 반복된 상처의 결과일 수 있으며 더 깊은 거절일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분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상태는 노골적인 분노보다 이런 ‘아무 반응 없음’이었어요.

  

2026년 2월 11일은 제가 시드니한인연합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지 2년째 되는 날입니다.

  

예수님을 뵙고도 10여 년을 반응 없이 지냈어요. 조금 천천히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뭉기적거릴 때 조삼열 목사님이 등 떠밀어 주셨습니다. 평소 입을 일이 없었던 롱 스커트를 입었기에 교회로 소심하게 걸어갔던 그 날을 기억합니다.

  

걸으면서 “아이고…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눈을 뜨고 준비했을 것을…” 하고 생각했네요.

  

세례받고 첫 해였던 작년 이맘때의 제 글 ‘한 살짜리 크리스찬’을 다시 읽어보니 하나님이 물들인 석양처럼 그 시간이 아름답고 평화로웠음에 감사가 충만해 있더군요.

  

이제 두 살이 되어 다시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그 광대가 흉내 낸 사람들 속에 저도 있었어요. 하나님이 드러내 주신 제 영적 습관과 그로 인해 굳어진 결점들을 인정하는 순간, 오히려 깜짝 웃을 수 있었고 또 그것이 큰 은혜가 되었지요.

  

“은혜로구나” 그렇게 감사해 하니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주셨어요. 지난 크리스마스에 교회 권사님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고 무척 감사해했더니 그 다음 주에 또 선물을 안겨주시던 것처럼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면 분노하고 스스로를 학대했을 그런 날들이 세례받은 후에도 있었어요. 삶이 나를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상처는 반복되었으며, “왜 나만 이 길을 걷는가”라는 질문이 마음을 채웠어요.

  

그때마다 하나님은 ‘믿음이 없는 자여..’라고 꾸짖기보다 마치 그 광대처럼 말없이 제 곁을 따라 걸으셨어요. 광대가 슬픈 얼굴을 하면 그것처럼 마음을 짠하게 하는 것도 없지요.

  

저는 차마 분노할 수 없었고 그저 묻고 또 물었어요. 그랬더니 여러 날 동안 계속해서 예레미야 29장 11절 말씀을 들려주시더군요. 평범한 단어였던 그 ‘소망’의 위력을 단번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얼굴은 광대의 하얀 얼굴처럼 속을 알 수 없이 천진하셨어요. 저는 그분 옷자락을 툭 치고는 곧 함께 웃었습니다.

  

저는 두 살짜리 크리스찬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젖을 흠뻑 먹고 걸음마를 떼었으며 매주일마다 교회 권사님들이 정성껏 지으시는 하얀 밥을 거르지 않고 먹어 부쩍 자랐습니다. 벽을 잡고 걷다가 뒤뚱거리고 똥 기저귀를 차고 막무가내로 걸어도 하나님은 ‘우쭈쭈’ 해주셨습니다.

  

세례받던 그날 하나님 앞에 ‘저의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저는 늘 바쁘고 성급해서 보폭이 넓고 투박한 걸음을 걷습니다.

  

고급진 신을 두고도 낡은 신발굽이 경계선을 넘어 닳아 없어지도록 반복해서 신는 무척 고집스러운 사람입니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것도 두려워했지요.

  

그래서 세례를 받으러 걸어 들어갈 때 새로 준비한 굽 높은 신발이 올무 같은 긴 치마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해달라 기도했습니다.

  

예배당의 복도는 하나님이 저를 기다려준 세월만큼 길었어요. 걸어가며 그 와중에도 사방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눈부신 빛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평생에 걸쳐 굳어진 불안정한 걸음걸이를 고치라고 다그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저와 함께 걸으시고 비춰주십니다. 예수님도 오히려 그 연약한 걸음을 입고 이 땅을 걸으셨지요. 그분은 우리의 걸음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아시면서도 끝까지 같은 속도로 걸으셨습니다.

  

함께 걸어주시는 은혜는 저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저를 숨기지 않게 만드는 과정이며,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하시고 심히 즐거워하셨던 그분의 형상으로 닮아가도록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광대 영상 속에는 자신을 흉내 내며 따라 걷는 광대를 발견하고 박장대소한 뒤, 잠시나마 걸음을 고쳐 단정하게 걷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바른 걸음이 반복되면 언젠가는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 믿는 마음 때문에 그들의 걸음은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노영란|시드니한인연합교회 성도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