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있으라 하신 자리에 있었을 뿐가나에서 자란 선교사 자녀, 사업가를 거쳐 한국 주재 가나 대사가 되기까지
1992년 1월, 그는 부모의 선교 사역을 따라 가나로 갔다. 어린 시절에는 선교 현장에서 ‘생존형 MK’로 자랐고 대학 시절에는 학비를 벌기 위해 그래픽 디자인과 인쇄업, 인터넷 카페, 통신 관련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전자 결제 솔루션 사업으로 확장해 가나의 여러 정부기관과 금융기관, 기업들과 연결되는 사업가가 되었다.
동시에 그는 아버지의 북부 개척 선교를 돕고 가족과 함께 매달 교회들을 순회하며 선교적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오랜 시간 쌓은 신뢰와 관계 속에서 한국 주재 가나 대사로 임명되었다.
2025년 12월,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한국으로 보내셨다. 이번에는 선교사의 자녀가 아니라 한국 주재 가나 대사라는 전혀 새로운 자리였다. 그는 이 자리를 “내가 준비한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리”라고 말한다.
그 고백 속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놀라움과 감사 그리고 책임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까지 담겨 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리라면, 그 자리에서 피어날 열매 또한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그의 발걸음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이어져 왔다. 어린 시절 선교사의 자녀로 가나 땅을 밟았던 그가, 수십 년이 지나 다시 한국 땅에 ‘대사’라는 이름으로 서게 되기까지의 여정은 인간의 계획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길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자리를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리에서 피어나는 열매는 언제나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는 은혜라는 것을 그는 삶으로 증언하고 있다.
지난 2월 11일, 우리는 한남동에 있는 가나 대사관을 방문했다. 대사관 직원은 조용한 미소로 우리를 집무실로 안내했다. 문이 열리는 순간 그 공간에 담긴 시간과 이야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책상 옆에는 가나 국기가 단정하게 세워져 있었고벽에는 가나 대통령 ‘존 드라마니 마하마’(John Dramani Mahama)의 사진과 역대 주한 가나 대사들의 사진이 차례로 걸려 있었다. 그 사진들은 마치 이곳을 지나간 사람들의 발자취가 조용히 숨 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탁자 위에는 가나를 소개하는 책자와 가나 초콜릿이 놓여 있었고 소파 옆에는 최 대사와 마하마 대통령이 함께 찍은 사진, 그리고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한 사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작은 액자들 속에는 한 사람의 정체성과 뿌리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끌어 오신 긴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했다.
다음은 본지 영문편집장 김환기 사관과 주한 가나 최고조 대사의 인터뷰 내용이다.
- 먼저 본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요즘 가장 편하게 저를 설명하는 표현은 “Born in Korea, made in Ghana”입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적인 기초와 원리를 배우며 자랐고 가나에 가서는 그곳 사람들의 삶과 문화, 가치관을 몸으로 익히며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제 안에는 한국적인 토대와 가나적인 삶의 감각이 함께 섞여 있습니다. 저는 두 문화의 가치와 원리가 한 사람 안에서 어우러진, 조금은 독특한 배경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 가나에는 어떻게 가게 되셨습니까?
“선교사 자녀들은 보통 부모님이 가시는 곳으로 따라가게 됩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모님이 선교지로 가시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함께 가나로 가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가나는 어느 날 선택해서 들어간 나라라기보다 부모님의 소명 속에서 함께 들어가 살아가게 된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 부모님은 지금도 가나에서 사역하고 계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지금도 가나에 계시고 연세가 여든이 넘으셨지만 여전히 매우 적극적으로 사역하십니다. 함께 사역하는 현지 목회자들을 초청해 세미나도 열고 성경 읽기와 암송 대회도 진행하시고 여러 교회를 다니며 목회자들을 격려하고 위로하십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지금도 쉬지 않고 현장을 다니시는 분입니다.”
- 처음 가나로 가신 배경은 무엇입니까? 교단 파송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저희 아버지는 대형 교회나 교단의 정식 파송으로 가신 분이 아닙니다. 1991년 당시 가나 한인사회 안에서 “한인교회가 필요하다”는 요청이 있었고 마침 아버지는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초청을 받아 1992년 1월 가나에 들어가셨고 1998년까지 6년 동안 한인교회를 섬기신 뒤 그 이후에는 북부 지역 개척선교로 들어가셨습니다.
정식 파송 단체가 없었기 때문에 후원도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큰 후원 교회나 기관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는 분들이 조금씩 후원해 주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제게는 ‘왜 좀 더 체계적으로 후원을 받지 않으실까’라는 답답함도 있었습니다.
IMF 시기에는 아버지가 받으신 선교비가 월 천 달러도 안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돈으로 집세를 내고 가족이 생활하고 또 선교를 계속하셔야 했으니 인간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늘 “하나님이 필요한 만큼 채우신다”는 믿음으로 사셨습니다.”
- 그런 환경에서 MK(선교사 자녀)로 사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당연히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MK도 크게 두 부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후원이 잘 되는 교단이나 교회에서 파송 받아 비교적 좋은 교육 환경에서 자라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저희처럼 현지에서 거의 현지인처럼 살아남으며 자라는 경우입니다.
저는 분명히 후자였습니다. 저희는 선교지에서 특별대우를 받는 아이들이 아니라 그 땅에서 실제로 부딪히며 살아야 하는 아이들이었습니다.”
- 형제자매 이야기도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형님과 누님이 있고 제가 막내입니다. 셋 다 가나 국립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누나는 공부를 정말 잘했습니다. 당시 해외 명문 대학원 진학 기회도 있었고 장학금도 받았지만 가정 형편상 그 기회를 충분히 살릴 수 없었습니다. 이후 한국에 들어와 서울대 국제대학원 장학금을 받고 국제백신연구소와 외교부에서도 일할 정도로 뛰어난 역량을 보였지만 지금은 네 아이를 키우며 커리어를 내려놓았습니다. 제게는 그 삶도 매우 귀한 헌신으로 보입니다.
형님은 가나에 남아 아버지의 사역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목회자이면서 동시에 텐트메이커로 살아갑니다. 한국 교회의 후원에 기대기보다 스스로 일하면서 학교와 교회, 교육 사역, 축구 아카데미 같은 다양한 현장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형님의 삶도 참 존경합니다.”
-본인은 어떤 길을 걸어오셨습니까?
“저는 가나에 남아 ‘비즈니스 애즈 미션’(BAM), 다시 말해 사업과 선교를 함께 품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의 선교를 돕고 동시에 현지 사회 안에서 스스로 살아가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일과 사역이 함께 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미셔널 라이프’를 살아온 셈입니다. 광주의 포도원교회에서 저의 삶을 보고 아프리카 선교사로 파송해 주셨지만 물질 후원보다 기도의 후원을 받으며 살다가 예상하지 못했던 대사 임명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 결혼과 가정 이야기도 들려주시죠.
“ 장인 어른은 광주의 교회를 섬기시는 목사님이십니다. 그 교회에서 따님을 가나로 보내 영어와 선교를 경험하게 했는데 저는 그 만남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게 예비하신 사람”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을 어렵게 설득하고 아내가 대학을 마칠 때까지 3년 반을 기다린 끝에 2008년에 결혼했습니다. 지금은 자녀가 여섯 명입니다.
저는 가정도 선교의 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선교지를 돌고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나눔과 섬김을 몸으로 배우도록 했습니다.
저희 가족은 한 달에 한 번씩 꼭 아버지가 개척한 북부 지역 교회들을 순회했습니다. 어떤 곳은 차로 15시간이 걸리고 가까운 곳도 1시간 반에서 2시간은 가야 합니다.
갈 때마다 한 마을을 정해 아이들과 함께 준비하고필요한 물품과 도움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저에게 선교는 개인의 직업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살아내는 삶입니다.”
- 아버님의 선교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까?
“아버지는 지금까지 14개 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1998년 한인교회 사역을 마친 뒤 북쪽으로 올라가시며 교회가 없는 마을을 찾으셨던 일입니다. 가는 곳마다 이미 교회가 있었는데 부르키나파소 접경 지역의 봉고 지역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니 드디어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는 마을을 찾으셨습니다.
텐트를 치고 교회를 시작하셨습니다. 너무 덥고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고 부모님 두 분 다 병에 걸려 거의 돌아가실 뻔하기도 했지만 다시 회복되어 사역을 이어가셨습니다.
아버지의 방식은 아주 분명했습니다. “당신들이 자갈과 흙과 모래를 준비해 놓으면 내가 시멘트와 철근 같은 필요한 자재를 돕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돈으로 다 해주는 방식이 아니라 현지인들이 직접 땀 흘려 함께 교회를 세우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니 교회가 세워질 때마다 그 안에 성도들의 수고와 애착이 생겼습니다. 한 교회가 세워지고 나면 그 교회가 다시 다른 마을에 복음을 전하고 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 결과 북부 지역 여러 마을에 교회가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방식이 굉장히 중요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경우 선교사는 현지인들에게 “도와주는 사람”, 심하면 “현금 지급기”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애초에 돈이 없으셨기 때문에 오히려 그 구조를 만들지 않으셨고 그 결과 현지 교회들은 저희를 후원자가 아니라 함께 걷는 친구와 동역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지금도 어떤 마을은 교회를 짓는다고 해서 저에게 “후원해 달라”고 먼저 오지 않습니다. 스스로 준비하고 필요할 때 함께 협력하는 관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 가나 내 한인사회는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예전에는 한인이 800명에서 900명 정도 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200~300명 정도로 많이 줄어든 것 같습니다. 그 중에는 선원들도 많아서 실제로 한인교회나 한인사회의 중심에는 선교사님들이 많이 있는 편입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한인사회의 규모와 성격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 사업 이야기를 좀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어떻게 시작하셨습니까?
“1999년 대학에 들어가면서 학비를 스스로 벌어야 했습니다. 부모님이 당연히 학비를 대주실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가나에 남아 부모님 사역도 돕고 제 삶도 책임지기 위해 일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래픽 디자인과 작은 디지털 인쇄업을 했습니다. 디자인을 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가나의 큰 통신회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회사에 2년 동안 매주 찾아가 일을 달라고 했지만, 쉽게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 뒤 인터넷 카페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대학 안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인터넷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그 통신회사를 찾아갔더니 오히려 그쪽에서 제 상황을 흥미롭게 보더군요.
결국 대학 내 공중전화 사업권을 받게 되었고 그것이 이동통신회사와의 본격적인 파트너십으로 이어졌습니다. 이후에는 판매 사업권까지 받아 도시 전체의 약 20%를 담당하는 독점권도 갖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제 끈기와 성실함을 그들이 인정해 준 셈입니다.
그 사업은 당시 통신 이용료를 실제로 수납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매출 규모가 굉장히 컸습니다. 물론 그 매출이 다 제 돈은 아니었고 저는 수수료를 받는 구조였습니다. 그러다 2015년 이후에는 제 사업을 따로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전자결제 솔루션 쪽으로 방향을 넓혔습니다.
지금은 가나의 정부기관, 은행, 주요 기업들이 그 솔루션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존 통신사업도 계속하고 있지만 현재는 이 결제 솔루션 사업이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 그렇게 사업을 하다가 어떻게 대사로 임명되신 겁니까?
“가나에서 워낙 오래 살았고 사업을 하며 여러 공적 관계를 맺어 왔습니다. 저는 대통령들과도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고 한국에서 인사들이 오면 통역도 자주 맡았습니다. 대통령 자녀들과도 친구로 지낼 정도로 현지 사회 안에 깊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새로 들어선 대통령께서 ‘한국과 더 가까워지고 싶은데 이 일을 너보다 잘할 사람은 없다. 바쁜 줄 알지만 한국으로 가서 가나와 한국을 위해 일해 달라’고 요청하셨고, 그렇게 이번 임명이 이루어졌습니다.”
- 이민자 배경을 가진 사람이 그 나라의 대사가 되는 일은 흔한 일입니까?
“제가 알기로는 적어도 사하라 이남 블랙 아프리카에서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첫 한국계라고 하지만 아프리카 전체 맥락에서는 첫 외국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도계나 레바논계처럼 여러 세대에 걸쳐 아프리카에 정착한 공동체들도 있었지만 혈통을 유지한 외국계 출신이 저같이 임명된 경우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일은 제 개인의 성취라기보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고 아버지의 헌신적인 선교 위에 제가 유업처럼 받은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 외교를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분은 아니신데 그 부분에 대한 부담은 없으셨나요?
“물론 저는 전통적인 외교관 코스를 밟은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세상에도 전략적 임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격증보다 하나님께서 어떤 자리에 누구를 세우시는가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전문 외교인의 길을 밟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 가나와 한국 사이를 실제로 연결하며 살아왔고 양쪽 문화를 모두 이해하며 사람들과 신뢰를 쌓아 왔습니다. 어쩌면 그런 삶 전체가 저를 이 자리로 이끈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 대사로서 기대하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저는 누구보다 한국과 가나를 잘 연결하고 싶습니다. 한국의 좋은 것을 가나에 접목시키고 반대로 가나의 좋은 자원과 가능성을 한국과 공정하게 나누고 개발하는 관계를 만들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아프리카와의 협력에는 공정성과 투명성이 충분하지 않았던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정직하고 투명한 관계를 만들어 갈 가능성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두 나라 사이에 단순한 외교관계가 아니라, 신뢰와 공정성을 바탕으로 한 장기적 협력의 틀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선교와 정치, 외교의 관계는 어떻게 보십니까?
“저는 그것을 억지로 접목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보면 요셉도, 다니엘도 각자의 자리에서 맡겨진 일을 충실히 감당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선교적 이름표’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자리에서 충성되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사람들은 결국 ‘저건 사람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저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또 이번 임명이 MK(선교사 자녀)와 PK(목회자 자녀) 그리고 많은 선교사 가정에게도 하나의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부모의 수고와 헌신이 헛되지 않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유업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어 가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제 자리가 단지 개인 경력의 자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가능성과 위로의 메시지가 될 수도 있다고 느낍니다.”
- 전 세계 디아스포라 한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십니까?
“저는 제가 무언가를 이뤘다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는 저는 그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통로를 지나가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 자체만으로도 하나님께서 어떤 뜻을 가지고 일하시는지 많은 분들이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늘 생각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면 하나님이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그 자리가 감옥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역사적인 회담의 중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장소와 조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있으라고 하신 그 자리에 내가 서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서 있으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저는 그 말 외에는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앞으로의 임기와 계획은 어떻게 보십니까?
“저 같은 경우는 대통령 임명이기 때문에 대통령 임기와 함께 가는 구조입니다. 마두라 대통령의 임기는 앞으로 3년 정도가 남아 있었습니다. 연임 가능성은 열려 있지만 저는 제 계획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더 바라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길도 제 계산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기고 싶습니다.
또한 양국 관계의 수교 50주년이란 중요한 기념 시점을 앞두고 정상회담과 다양한 문화, 사업 협력의 확대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언제나 두 나라를 더 깊고 건강하게 연결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나가는 말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의 삶에서 흘러나오는 깊은 향기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한 사람의 삶을 이토록 길고 깊게 이끈 것은 화려한 전략이나 개인의 야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씨를 뿌렸던 한 선교사의 순종이었고 흔들림 속에서도 오래도록 버텨낸 한 가정의 인내였으며 하나님이 두신 자리에서 끝까지 떠나지 않으려는 믿음이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단지 ‘대사가 된 MK’의 이야기가 아니다. 직함이나 성취로 설명할 수 있는 성공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 사람과 한 가정을 어떻게 빚어 오셨는지 보여 주는 살아 있는 선교의 기록이다.
사람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이 한 걸음씩 길을 열어 오셨다는 사실이 그의 삶 전체에 조용히 새겨져 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우리는 한 개인의 여정을 넘어 하나님께서 세대를 이어 이루어 가시는 은혜의 흐름을 보게 되는 것이다.〠
김환기|본지 영문 편집장 강민석|본지 한국주재 사진국장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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