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블리키-피터슨(Johannes Bjelke-Petersen, 1911-2005)은 1911년 1월 13일 뉴질랜드 노스 아일랜드에서 덴마크계 이민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그가 어린 시절 호주로 이주해 퀸즐랜드(Queensland)주 킨가로이(Kingaroy) 인근에 농장을 차렸다. 그는 14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농업에 전념했다. 이후 킨가로이에서 땅콩과 소를 키우는 농부로 성공을 거뒀으며, 항공기를 이용한 파종과 농약 살포 기술을 선구적으로 도입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아 평생 다리를 절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체력과 의지로 농장을 일구어냈다. 독실한 루터교 신자로 자란 그는 정치 생활 내내 종교적 신념을 강하게 드러냈고, 지역 교회는 그의 대중 이미지를 구성하는 중요한 상징이 됐다.
1952년 플로렌스 길모어(Florence Gilmour)와 결혼했으며 그녀는 단순한 아내를 넘어 정치적 파트너로서 큰 역할을 했다. 그녀는 1980년 연방 상원 의원으로 당선돼 국민당 소속으로 퀸즐랜드를 대표했으며, 남편의 강경한 이미지를 부드럽게 보완하는 서민적 매력으로 당의 인기를 끌어올렸다.
두 사람의 콤비는 ‘조 앤드 플로 쇼’(Joh and Flo Show)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블리키-피터슨은 1946년 킨가로이 지방의회 의원으로 선출되며 정치에 입문했고, 1947년 주 의회 선거에서 내나고(Nanango) 선거구를 대표하는 카운트리당 의원으로 퀸즐랜드 의회에 진출했다.
이후 바람바(Barambah) 선거구(1950~1987)로 지역구를 옮겨 40년 이상 의회에 몸담았다. 1963년 공공사업·주택부 장관으로 처음 내각에 입각했고, 1968년 주지사(Premier)가 되었다.
1968년부터 1987년까지 19년간 퀸즐랜드 주지사로 재임하면서 퀸즐랜드 역사상 가장 오래 집권한 지도자로 기록됐다. 집권 기간 동안 그는 퀸즐랜드를 호주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성장하는 주 중 하나로 탈바꿈시켰다.
그가 자랑스럽게 여긴 업적으로는 위븐호 댐(Wivenhoe Dam)과 버드킨 댐(Burdekin Dam) 건설, 게이트웨이 브리지(Gateway Bridge) 완공, 퀸즐랜드 철도망의 전철화 및 현대화, 1982년 브리즈번 영연방 게임(Commonwealth Game) 유치, 1988년 세계박람회(World Expo 88) 개최가 있다.
또한 브리즈번에는 퀸즐랜드 문화 센터, 그리피스 대학교(Griffith University), 사우스이스트 고속도로(Southeast Highway), 의회 별관 등이 건설됐으며, 제임스 쿡 대학교(James Cook University)도 이 시기 설립됐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는 단순히 블리키-피터슨 개인의 역량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고위 공무원들이 사회 인프라 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재무 담당자들은 퀸즐랜드의 대외 금융 신용 등급을 유지하고 해외 투자를 유치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블리키-피터슨은 공식적인 정부 절차를 자주 무시했지만,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관료 집단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통치를 탁월하게 했다.
경제 정책에는 탁월한 점이 있었지만 그는 권위주의적으로 통치했다. 블리키-피터슨은 퀸즐랜드 주 의회에 상원이 없다는 점과 야당인 노동당이 취약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악용했다. 나아가 연립 파트너인 자유당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용해 사실상 일인 통치에 가까운 지배 구조를 구축했다.
특히 시위 탄압은 그의 권위주의를 가장 잘 보여주었다. 1971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럭비팀이 호주를 방문 때, 다른 주에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유색인종 차별 정책에 대한 강력한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하지만, 블리키-피터슨 퀸즐랜다 주 수상은 한 달간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600명의 경찰을 브리즈번에 집결시켜 시위대를 강제 해산했다.
1977년 9월에는 아예 정치 시위를 전면 금지해 우라늄 반대 시위대, 노동조합원, 학생, 진보주의자들과 수차례 충돌을 빚었으며, 시위자들은 경찰의 폭력에 그대로 노출됐다. 이 때문에 그의 퀸즐랜드는 종종 "경찰 국가"라는 오명을 얻었다.
선거 지역 조정도 그의 장기 집권을 떠받치는 정치적인 핵심 사항이었다. 농촌 선거구를 도시 선거구보다 훨씬 유리하게 구성해 실제 득표율보다 더 많은 의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
성소수자 정책에 있어서도 극도로 보수적이었다. 1980년대에는 게이와 레즈비언 교사의 채용을 막고 게이 학생들이 지지 모임을 만드는 것을 금지했다. 에이즈가 호주로 확산되자 성소수자 집단을 공개적으로 낙인찍었고, 다른 호주 주들이 남성 동성 행위를 비범죄화하는 동안 오히려 레즈비언 행위를 범죄화하고 반게이 허가법을 도입하려 했다.
1986년 주 선거에서 역대 최다 의석을 차지하며 승리한 뒤, 블리키-피터슨은 연방 총리 자리에도 도전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1987년 1월 1일 공식적으로 연방 하원 출마를 선언해 ‘Joh for PM’ 캠페인이 시작됐다. 그는 모든 국민에게 25% 단일 세율을 적용하는 세제 개혁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워 사업가들과 우파 성향의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냈다.
그러나 이 캠페인은 퀸즐랜드 내 독특한 정치 구조가 연방 무대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점을 간과한 전략적 실수였다. 퀸즐랜드 국민당이 연방 연립에서 탈퇴를 선언하자 보수 진영 내 분열은 극에 달했다.
결국 1987년 연방 선거에서 밥 호크(Bob Hawke)가 이끄는 노동당이 역대 최다 의석으로 압승을 거뒀다.
결정적인 몰락의 계기는 언론의 폭로였다. 탐사 기자 크리스 마스터스(Chris Masters)가 ABC 방송 ‘포 코너스’(Four Corners)를 통해 퀸즐랜드 경찰의 조직적 부패와 범죄 연계 의혹을 폭로했고 이를 계기로 조사위원회가 출범했다. 이 위원회는 1987년부터 1989년까지 2년에 걸쳐 광범위한 정치적·경찰 부패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의 두 명의 주 각료와 그가 특별 발탁해 기사 작위까지 수여했던 경찰청장이 부패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블리키-피터슨은 당내 경선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결국 1987년 12월 1일 주지사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1991년 9월 23일 위증 및 부패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나 배심원단 의견이 엇갈려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후 배심원단 대표가 국민당 당원이자 그의 법률 비용 모금을 도운 인물로 밝혀지면서 재판 자체의 공정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퀸즐랜드 정부는 배심원법을 개정하고 상설 형사사법위원회를 설치했다.
블리키-피터슨의 통치에는 독특한 측면이 있었다. 그는 형식적인 각료 회의나 웨스트민스터 관례에서 종종 벗어나 개인적 판단에 의존했다.
한 저널리스트는 그를 ‘힐빌리 독재자’(hillbilly dictator)라 불렀으며 그가 퀸즐랜드 지방색을 의도적으로 과장해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매우 예리한 정치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그는 연방 정부, 특히 고프 휘틀럼 노동당 정부의 정책에 강력히 반발하며 지방 정부 권한 확대와 연방 정부 간섭 최소화를 일관되게 주장했다.
블리키-피터슨은 1991년 회고록 『걱정하지 마세요: (Don't You Worry About That)』을 출간했다. 이 제목은 그의 말버릇에서 따온 것으로, 그의 여유롭고 자신만만한 정치 스타일을 잘 드러낸다.
말년에는 파킨슨병과 소아마비 후유증을 오랫동안 앓다가 2005년 4월 23일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퀸즐랜드 주정부는 국장을 거행해 그의 긴 정치 생애를 공식적으로 추모했다.
그의 유산은 오늘날에도 첨예하게 엇갈린다. 지지자들에게 그는 경제 성장을 이끌고 보수적 가치를 지킨 선구자로 기억된다. 반면 비판자들에게 그는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정치인으로 시민의 권한을 억압하고 제도적인 부패를 방치한 책임자로 남아 있다.
그의 이야기는 강력한 행정 권한과 민주적 책임 사이의 긴장을 보여주는 호주 현대 정치사의 대표적인 상징적 사례다.〠
정지수|본지 영문편집위원, 캄보디아 지사장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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