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그 역설의 진리

정지홍/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6/11/28 [11:10]
역설(paradox)은 논리적으로는 모순을 일으키지만, 그 모순 속에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역설은 무조건적인 모순이 아니라 모순을 통한 진리의 강조입니다. 성경이 그와 같은 역설의 진리를 담고 있고, 교회는 그 역설의 진리를 행하는 공동체입니다.

성경 속에 역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고, 주린 자가 복이 있고, 박해를 당한 자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가난한 것보다는 부자가 되어야 행복하고, 애통하는 것보다는 웃는 것이 더 행복하고, 주린 것보다는 배부른 것이, 박해를 당하는 것보다 편안한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정반대입니다. 가난해야 행복하고 애통해야 행복하고 굶주려야 행복하고 박해를 당해야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이 역설적인 말씀에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이 있고, 애통하는 자에게는 위로가 있고, 주린 자에게는 배부름이 있고, 박해를 당한 자에게 하늘의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은 누구든지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라며 겸손의 역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큰 사람으로 되려면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하고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스스로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천국에서는 오히려 가장 낮은 자가 가장 큰 자가 됩니다. 천국은 역설의 진리가 통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은 넓은 길을 가지 말고 좁은 길을 가라고 하십니다. 넓은 길은 편안하고 사람들도 많이 찾는 길인데 반해서 좁은 길은 험하고 협박해서 사람들이 잘 찾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많이 찾는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로 가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좁은 길에만 좁은 문이 있고 천국의 문은 좁은 문이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마을 가까이에 사는 음악가들이 찾아와 축하 노래를 불러주거나 음악을 연주해 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한 아이의 탄생이 그 집안만의 기쁨이 아니라  온 마을의 기쁨이요 축제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생일을 맞으면 케이크에 촛불을 밝히고 어김없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릅니다. 'Happy birthday to you, 생일 축하합니다.'...
 
최고의 역설, 성탄
 
그런데 2천 년 전 이 같은 축하 노래나 연주를 받기는커녕 허름한 마굿간에서 태어난 아기가 있었습니다. 그 아기의 신분이 비천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기는 육신으로는 이스라엘 최고의 가문인 다윗의 후손이었고, 성결의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아기에 대해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베들레헴의 허름한 마굿간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기는 하나님의 하나 뿐인 독생자였습니다. 그 아기의 어깨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메어 있었고, 그 아기의 또 다른 이름은 '경이로운 분', 또 '조언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아기의 또 다른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영존하시는 아버지시고, 평강의 왕이었습니다.  
 
이렇듯 신분만 놓고 보면 그 아기는 누구보다 존귀하게 태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의 축복과 환영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아기는 허름한 곳에 태어났고, 환영받지도 못했습니다. 물론 축하하는 노래도 없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사람들과 악한 세상이 이 아기의 탄생의 원하지 않았습니다. 제 멋대로 자기 욕망대로 살던 인간들은 메시아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아기의 탄생이 반갑지 않았고, 당시에 유대 땅을 다스리던 헤롯 왕은 그 아기를 죽이려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두 살 이하의 어린 아이를 전부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 아기의 탄생을 이렇게 빗대어 기록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9-11).

그 아기의 탄생은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참 빛과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하듯이 세상은 그 아기를 알지 못했고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아기가 태어났다고 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연주해 줄 리가 없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그 아기가 스스로 낮은 곳에 태어난 것입니다. 이 땅에서 가난하고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로하고 소망을 주고 궁극적으로 구원하기 위해 낮고 허름한 마굿간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 아기가 바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 아기가 태어난 날이 성탄절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렇듯 여느 아이들처럼 축하도 받지 못하고 축가를 불러주는 사람도 연주를 해주는 음악가도 없었습니다. 온 세상의 구원자는 그렇게 성탄하셨습니다. 이보다 더한 역설이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께 영광 사람들 중에 평화
 
사람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지 않자 하늘에서 천군과 천사들이 축하합니다. 이 세상이 예수님의 탄생을 반기지 않자 하늘에서 수많은 천군과 천사들이 대대적인 환영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 노래의 가사가 이렇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4)
 
천군과 천사들은 하나님께 영광 사람들에게는 평화를 노래했습니다. 이것이 성탄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은 평화를 누리는 것 그것이 성탄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가장 낮은 곳에서 성탄하셨지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성탄이었고, 또 예수님의 탄생은 사람들에게 전혀 환영받지 못했지만 “사람들 중에 평화”를 주시는 성탄이었습니다. 이 또한 역설입니다. 
 
역설의 진리로 세상을 바꾸자
 
이렇듯 성경의 진리는 온통 역설의 진리입니다. 세상과는 정반대여서 우리 눈에는 모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 역설의 진리가 한 인생을 바꾸기도 하고 세상을 새롭게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힘을 잃고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이유도 역설의 진리를 버리고 세상의 방법, 세속의 길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과 같다면, 그리스도인이 예수 믿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간다면, 과연 누가 성경의 진리를 갈망하겠습니까?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분명 다른 길을 가야 합니다. 그때 세상이 교회를 달리 보고, 교회를 찾을 것입니다.
 
옛날의 교회는 가난했고, 가진 것도 없고, 건물도 없었지만 분명 세상과 달랐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세상과 다른 교회를 찾았고, 세상과 다른 교회는 세상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세상과 다른 역설의 진리만이 우리 자신도 새롭게 하고 세상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성탄의 시즌에 다시금 역설의 진리를 깨닫고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어가기를 소망합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마치며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또 부족한 글을 읽고 골드코스트에서부터 타스마니아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들이 격려해 주셨습니다.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새해에도 여러분 샬롬!

정지홍|좋은씨앗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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