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담과 하나님

영국의 법철학자, 정치가, 변호사인 ‘제레미 벤담’

원광연/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7/01/31 [11:13]
▲ 제래미 벤담의 실물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은 영국의 법철학자요 사회개혁가요 정치가로서 우리에게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이상으로 삼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를 주창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개인의 자유, 경제적 자유, 교회와 국가의 분리, 표현의 자유, 여성의 동등한 권리, 이혼의 권리, 노예제 폐지, 사형제 폐지, 육체적 형벌의 폐지 등, 현대 사회에서 당연시되는 여러 가지 권리들을 주창한 바 있습니다.
 
벤담은 여러 계층의 사회적 약자들로 하여금 대학교육의 혜택을 누리게 하고자 런던대학교(University College of London)를 세워 영국 사회에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1832년 임종하기 전 유언을 통해 런던대학교에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하였습니다.
 
여기까지는 특이한 사항이 별로 없습니다. 큰 뜻을 품고 대학을 세운 사람도 많고, 대학에 재산을 헌납한 사람도 많으니까요. 그런데 벤담의 유언에는 아주 유별난 한 가지 조건이 붙어있었습니다. 곧, 자신이 죽은 후 시신을 해부하여 유골에 밀랍을 씌우고 옷을 입혀서 대학교의 회의실에 안치할 것이며, 대학교는 이사회를 진행할 때에 자신의 시신을 출석시키고, 또한 사회자는 회원 점명 시에, “제레미 벤담, 출석하였으나 투표는 하지 않음!”(“Jeremy Bentham, present but not voting!”)이라고 자신을 호명하도록 하라는 것이 그 조건이었습니다. 
 
벤담이 사망한지 18년 후인 1850년, 런던대학교는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골을 대학교 내에 안치하였고, 대학교의 설립 100주년과 150주년, 그리고 2013년에 벤담의 유골을 이사회에 출석시켜 그의 유언대로 이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유골은 현재까지도 런던대학교 건물 내에 안치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습니다.
 
적어도 벤담으로서는,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라도 런던대학교의 당국자들이 설립자인 자신의 뜻을 존중하여 사회의 공익을 위하여 대학교를 운영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에서 그런 우스꽝스런 유언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의 시신이 과연 대학교 이사회에서 무슨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죽은 벤담에게서 무슨 적극적인 역할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런 일입니다. 죽은 벤담은 그냥 거기에 있을 뿐입니다.
  
벤담의 이 괴상한 이야기는 오늘날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큰 교훈을 줍니다. 런던대학교 이사회가 죽은 벤담의 유골을 앞에 출석시켜놓고 회의를 진행하듯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그렇게 죽은 벤담처럼 취급하여 교회의 각종 회의에 출석시켜놓고, 그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우리 자신의 뜻대로 온갖 종교적인 일들을 도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때라 여겨집니다.

 
실천적 무신론

 
말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적인 행위로는 그런 믿음이나 고백과는 전혀 걸맞지 않는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가리켜 “실천적 무신론”(Practical atheism)이라 부릅니다만, 이런 자세가 현대 교회에 만연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물론 입으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사역 속에, 우리의 예배 속에, 우리의 찬양 속에, 우리의 기도 속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고 또한 그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겉모양만 그렇게 보일뿐, 속마음에는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리의 일에 구체적으로 관여하신다는 분명한 믿음이 없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인정하면서도, 실제로 일을 도모할 때에는 하나님이 계시하신 거룩한 뜻이 무엇인지를 찾기는커녕 마치 무신론자와 전혀 다를 바 없이 처신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 유다 백성들의 불신앙적인 자세를 책망하며,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라고 말씀합니다만(사 29:13), 이것이 과연 우리의 신앙적 자세의 적나라한 모습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천적 무신론은 종교적 실용주의(Religious pragmatism)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살아계셔서 통치하신다면, 그의 백성인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하도록 모든 일을 행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감히 어떻게 거스르겠습니까?
 
그러나 실천적 무신론이 자리 잡게 되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 따위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데, 그의 거룩한 뜻이나 의도 따위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곧바로 사람이 의도하는 계획과 목표가 모든 것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 버립니다.

 
20세기 선지자, ‘에이든 토저’

 
어떤 방법을 쓰든 간에 사람이 세워놓은 사역의 목표를 이루기만 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식의 사고가 주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실질적으로 안 계신 것과 마찬가지이니, 사람이 보기에 합당하고 바람직하면 그것이 최선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20세기의 선지자라 일컬어지는 미국의 에이든 토저(Aiden W. Tozer: 1897-1963)는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모습에만 관심을 쏟는 나머지 눈에 보이지 않는 참된 영적 생명의 뿌리는 무시해 버리는 것이 오늘날의 세태다. 즉각적인 ‘실적’이 전부다. 다음 주나 내년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고 당장의 성공을 입증하는 인스턴트 증거들에만 관심을 쏟는 것이다.
 
정통 교회 내에서조차도 종교적 실용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효과를 내는 것은 무엇이든 진리로 인정받는다. 결과가 좋으면 무엇이든 다 좋다.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한 가지 판단 기준 밖에는 없다. 곧, 성공이 유일한 기준이다. 무엇이든 다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실패는 결코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진정 살아계셔서 역사하심을 똑똑히 직시하지 않으면, 죄악된 인간은 언제나 이런 실천적 무신론과 종교적 실용주의라는 악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사고는 그야말로 그릇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분명 살아계셔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이런 실용주의적 처신에 대해 살아계신 하나님은 하늘에서 코웃음치십니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시 2:4, 9).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또한 지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역사하시고 섭리하시므로, 하나님이 없다거나 혹은 하나님이 계신다 해도 계시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동일한 조건에서도 언제나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똑바로 직시하고 그 믿음에 근거하여 전진하는 법입니다. 모세가 바로 그렇게 행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점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히 11:24, 27). 우리는 과연 모세처럼 믿음의 행진을 하고 있습니까?〠


원광연|주의영광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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