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가정 세우기

원광연/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7/04/24 [10:24]

오늘날 현대의 복잡한 사회 속에서 많은 가정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가정불화와 가정 폭력, 아동 유기 등의 극단적인 사례들이 연일 매스컴의 단골 메뉴가 되어 사람들의 눈과 귀를 자극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이런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죄악성이 내재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가장 가깝고 친밀한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가정이야말로 이런 죄악성에 가장 취약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원수인 마귀가 우리의 약점들을 노리고 언제나 올바른 하나님의 백성의 정도에서 벗어나 파멸에 이르도록 온갖 방식으로 늘 부추기고 있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론들이 도입되고 개발되어오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연구하는 심리학의 눈부신 발달로 각종 해결책과 치료요법들이 개발되어 적용되고 있습니다. 각양 매스 미디어의 갖가지 대담 프로그램과 상담 프로그램들을 통해서 이런 최신의 방법론들과 연구 결과들이 대중에게 곧바로 소개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이런 방법론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쩌면 시간 문제였다 할 것입니다.
 
교회들도 너도나도 곧바로 이런 문제에 깊은 관심을 쏟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에 식견과 소위 비전을 가진 목회자가 교회들마다 환영을 받게 되고, 가정세미나, 부부세미나, 자녀 교육 세미나 등을 통하여 이러한 심리학적 연구 결과들을 목회에 적용시킴으로써 해결책을 모색해오고 있고, 심지어 심리학적인 방법론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마치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인 것처럼 여기는 풍조가 만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어느 원로 신학자의 말처럼, 오늘날 현대 교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왕은 바로 심리학이요, 하나님은 마치 아무런 적극적인 역할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취급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옛날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 2:17)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명령이요, 또한 그 명령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그들의 본분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사탄의 꾀임에 빠져서 다시 보니, 하나님이 금하신 그 나무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창 3:6) 했기 때문입니다. 나무를 보니,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어기는 위험을 감수할 만큼의 무언가 큰 매력이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최고로 여기며 그의 베푸신 뜻을 좇아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우리의 최고의 목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의 거룩하신 뜻을 새기며 나의 구체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해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우리 자신에게로 돌리는 순간, 하나님은 옆으로 제쳐지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갑니다. 우리 자신의 문제점들이 가장 시급하고도 가장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섬기는 일은 무시되고 마는 것입니다.
 
심리학적인 온갖 방법론들의 최종 목표는 인간을 인간답게 섬기는 것이요, 인간의 인간다운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에 있습니다. 심리학적인 방법론들을 최선을 다해 적용시킨다고 해도,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가정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으니, 이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심리학적인 방법론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방법론들을 통해 일정 부분 효과도 있었습니다. 서로 어긋나기만 하던 부부의 관계가 친밀해졌고, 서로 괴리 상태에 있던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소통을 통해서 서로 가까워졌고, 그리하여 가정 내에 평화와 행복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입니다.
 
아무리 심리학적 방법론이 효과가 있다 해도 이 이상 한 치도 도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초점이 사람에게 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초점을 자기 자신에게 두도록 만드니, 오히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할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친밀하고 가깝다고 해서 과연 그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명령을 거역하고 타락할 때에 과연 그 두 부부의 관계가 어땠습니까? 두 부부가 서로 뜻과 생각을 같이하여 사이좋게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타락한 것이 아닙니까? 타락 이후 부부 관계에 금이 가고 둘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만, 적어도 타락할 당시에는 서로 뜻이 잘 맞았습니다.
 
그러니 부부 사이가 친밀해지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이라는 식의 사고는 전혀 헛된 사고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부부 사이가 나빠야만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부부 사이가 친밀해지고 가정이 평안해진다고 해서, 그 자체가 하나님을 높이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목표가 수정되는 것이 옳습니다. 가족 구성원 사이를 친밀하게 하고 갈등을 제거함과 동시에, 모두로 하여금 시선을 하나님께로 두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여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이런저런 방법론을 통해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삶 속에 개입하셔서 역사하사 우리의 삶의 방향과 패턴을 바꾸어주셔야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점을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6장에서 가르치는대로, 부부 관계, 부모 자식 관계, 종과 상전의 관계 등 각종 인간관계를 올바로 갖는 열쇠는 그럴싸한 방법론의 개발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 (5:18)에 달려 있음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성령께서 그 모든 관계에 개입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보다 분명한 사실이며, 따라서 성령의 그런 개입하시는 역사에 온전히 순종하여 좇아가는 것이 열쇠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음에서 보듯이, 부부 관계나 부모 자식 관계나, 종과 상전의 관계나 하나님과 상관 없는 우리들끼리만의 관계가 아니고, 모두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상관되는 관계임이 분명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5:22-24).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5:25)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6: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6:4)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6:5-7)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6:9) 〠

원광연|주의영광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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