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손으로 쓴 판결문

엄상익/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7/09/25 [11:00]
간첩사건을 맡았던 적이 있었다. 해안선의 경비실태를 비롯해서 탈북자들의 삶을 동영상 파일로 만들어 북한에 보냈다. 핵심 군사기밀을 빼내기도 했다. 그는 코웃음을 쳤다. 모든 증거가 북에 있는데 판사인들 별 수 있겠느냐고. 그 소리를 듣고 나는 변호를 중단했다. 그런 교활함이 싫었다.
 
간첩사건에 미란다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유로 무죄가 선고되면서 본체보다 형식논리에 치우쳤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과거에 대한 반동인지도 모른다.
 
법관이 정치에 주눅이 들어 간첩으로 조작된 사람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업보가 있기 때문이다. 승진을 목전에 둔 부장판사가 선거법 위반사건을 판결하면서 사심이 가득한 판결을 했다는 비난의 글이 인터넷에 올라 기사가 됐다. 판사가 판사를 비판한 글이다.
 
선거법 위반사건도 판사가 정치화될 위험성이 농후한 사건이다. 정치권력과 타협한 한 법관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정권의 유력자와 고위 법관사이에 막후 흥정이 있었다. 특정인을 유죄로 빨리 확정해 주면 앞날을 보장해 주겠다는 뒷거래였다. 약속이 이행되고 담당법관은 선망하던 자리에 올라갔다.
 
판사면 누구나 꿈을 꾸는 지위였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신문 사회면의 귀퉁이에서 나는 그 법관이 한강다리에서 떨어져 자살했다는 기사를 봤다. 언론은 원인불명의 죽음이라고 보도하면서 막연히 우울증으로 추정했다. 그 기사를 보면서 나는 권력의 핵심이 내게 해 줬던 정권과 법관의 거래가 떠올랐다.
 
권력 자체였던 그 역시 금년에 세상을 떠났다. 법관이 정치적 흐름에 너무 가볍게 편승하는 경우도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에 관련된 사건을 맡은 적이 있었다. 친일파를 다시 정리하자는 정치적 폭풍이 불었다. 소급입법이 되고 급조된 위원회에서 많은 사람들을 친일로 낙인찍었다.
 
친일은 다양한 스펙트럼의 역사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다. 그 마지막 보루가 법원이었다. 역사관과 지식이 부족한 담당 재판장은 경솔했다. 다른 재판부에서 결론을 내린 게 있으니 자기는 그냥 그걸 따라가겠다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사건마다 사람이 다르고 입장이 다른데 재판장은 획일적인 정치적 잣대 하나인 것 같았다. 법원전체가 정치적 광풍에 납작 엎드린 느낌마저 받았다.
 
해방 직후의 존경받았던 법관들이 고민 끝에 작성한 판결조차도 너무 가볍게 뒤집혔다. 해방 후 친일파를 재판한 법관들은 시대적 아픔을 겪은 생생한 체험이 있었다. 지조를 꺾지 않았기 때문에 해방된 나라의 판관이 되었다. 그들의 철학이나 지식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들 중에는 대통령이 만나자고 해도 공정성을 해친다고 하면서 거절한 대쪽 같은 법관도 있었다. 그런 선배판사의 심오한 판결을 신세대 판사가 능멸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담당 재판장이 변호사가 됐다.  주위 동료가 그가 담당했던 친일사건에 대해 물어보았다. 재판장이었던 그는 친일파가 아닌 것 같았다고 사견을 얘기했다. 법대에서는 정치에 편승하고 개인적 소신은 다른 법관이었다.
 
30년 가까이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많은 법정을 드나들었다. 현실 법정은 거짓말 대회장일 때가 많다. 거짓말만 듣다 불신병에 걸린 법관들도 많다. 자신이 없으면 그들은 형식논리 쪽으로 도망을 갔다. 그게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런 속에서 궤변이 진실로 둔갑하기도 했다. 범죄나 사건은 비상식 비논리적인 세계인 까닭이다.
 
시대적 바람이 법정 안까지 몰아치기도 한다. 출세를 목표로 공부만 한 흰 손이 쓴 판결문은 그 바람을 타고 높이 올라가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또 오랜 세월 의뢰인을 만났다. 국민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 그들이 법관에게 바라는 건 뭘까?
 
외국의 판례이론이나 소송규칙을 잘 아는 지식이 아니다. 그들만의 비상한 머리로 알아낼 수 있는 사실도 아니다. 누구나 다 보는 진실을 공적으로 확인해 달라는 것이다. 여론과 정치적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사심 없는 묵직한 바위처럼 법관이 정의를 선언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시대적 흐름이 어떻든 가장 중요한 건 진실이다. 오랫동안 변호사를 하면서 억울한 사연들을 많이 듣고 또 직접 피를 흘려보기도 했다. 지혜로운 판사들이 많아야 한다. 지혜가 별게 아니다. 사심 없이 보고 진실을 선언하면 된다.〠

엄상익|변호사, 크리스찬리뷰 한국지사장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