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사미 VS 유종지미

정지홍/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7/11/27 [14:52]
2017년도 마지막 12월이 되었습니다. 올해 1월에 결심하고 계획한 일들을 얼마나 이루며 살았는지 되돌아 보아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야 2018년을 보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용두사미 인생
 
‘용두사미’(龍頭蛇尾)란 말이 있습니다. 시작은 용의 머리처럼 거창하게 시작을 했는데, 그 끝은 뱀 꼬리처럼 보잘 것 없이 끝나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용 머리에 뱀 꼬리, 참 우스꽝스런 모습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용두사미처럼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도, 공부도, 인간 관계도, 그리고 사역도 처음에는 용 머리처럼 대단하게 시작했지만 중간에 흐지부지되다가 나중에는 볼 품 없는 뱀 꼬리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에는 간도 쓸개도 다 빼줄 것처럼 호의를 베풀고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믿을만한가 보다 하고 나는 신의를 가지고 친하게 지내보는데, 나중에는 내 험담을 하고 돌아다니고, 배신을 해서 그 끝이 좋지 않습니다. 전형적인 용두사미입니다.
 
신앙생활도 용두사미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거나 특별한 계기를 통해, 이제부터는 성경도 날마다 읽고, 기도 생활도 열심히 하고, 교회 봉사도 성실히 하겠다고 굳게 다짐을 합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면서 성경 읽는 시간도 줄어들고, 기도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봉사도 뜸합니다. 그렇게 처음의 다짐이 점점 희미해지더니 연말쯤 되면 뱀 꼬리가 됩니다.
 
분명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용두사미는 좋은 결과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용두사미의 사람은 신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용두사미는 사실 기형입니다. 용 머리에 뱀 꼬리니 이보다 더 기형이 어디에 있습니까? 용두사미의 삶은 기형적인 삶입니다.
 
유종지미 인생
 
그래서 같은 미로 끝나지만 우리는 전혀 다른 사자성어로 살아야 합니다. 그 사자성어가 ‘유종지미’(有終之美)입니다. ‘유종의 미’라고도 하는 유종지미의 뜻은 ‘끝이 아름답다, 마지막이 아름답다’는 의미입니다.
 
처음에는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도 않고 장점도 없는 것 같은데 사귀면 사귈수록 믿음이 가고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있습니다. 유종지미의 사람입니다.
 
신앙도 유종지미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새롭게 예수님을 영접해서 걸음마 수준의 신앙 생활을 했는데,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신앙의 연륜이 쌓여갈수록 더욱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은혜를 갈망합니다. 교회를 위한 헌신과 성도들에 대한 사랑의 열정도 점점 더 커 갑니다. 5년 후, 10년 후가 더 기대되는 사람, 더욱더 신뢰가 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마지막이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경우입니다. 이 사람이 유종지미의 신앙을 지닌 사람입니다.
 
우리는 삶에서도, 신앙에서도 용두사미가 아닌 유종지미를 거두어야 합니다. 유종지미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갈수록 믿음을 주고, 시간이 흐를수록 사랑과 영성이 충만해지고, 인생의 마지막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다음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 섰을 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세례 요한이 “달려갈 길을 마칠 때”가 되었습니다(행 13:25). 그때에 세례 요한을 그리스도로 오해한 사람들에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당시에 주인이 신발을 신고 벗을 때면 언제나 그 집의 종이나 노예가 신발끈을 풀어주고 매주었습니다. 즉, 그 집에서 가장 낮고 미천한 종이 주인의 신발끈을 풀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신발끈을 푸는 일도 자신은 감당치 못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그리스도는 높고 존귀하고 영화로우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자신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세례 요한은 사람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 그리고 잘못된 생각들을 바로 잡아주며, 여전히 주의 길을 예비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은 철저히 가리고 오직 예수님만 드러냅니다. 달려갈 길을 마치는 그 순간까지도 요한은 겸손히 주님의 오실 길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정녕 유종지미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7:28). 그리고 예수님은 그 세례 요한으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신발끈을 푸는 것도 감당할 수가 없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그 세례 요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세례 요한이 정녕 큰 자임을 증명해 주셨던 것입니다.
 
가득 채우는 삶
 
유종지미의 삶은 마지막만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처음도 중간도 그리고 마지막까지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KJV은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And as John fulfilled his course,”
 
즉, 세례 요한은 자신의 인생 여정의 마지막까지 가득 채운 것이 있는데, 바로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한 순간만 그리스도를 높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온 삶을 그리스도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의 처음도, 중간도,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예수님로 충만했습니다.
 
빈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비어 있으면 요란한 소리를 냅니다. 불평하는 소리, 분노하는 소리, 시기하고 질투하는 소리, 유치하고 천박한 욕심의 소리를 냅니다.
 
그래서 우리의 내면을 채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때도 잘 채워야 합니다. 좋은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무엇을 채우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본질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즉 내면에 무엇을 채우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삶의 태도와 인격의 수준과 인생의 질을 결정합니다.
 
예를 들면 알콜과 술로 채우는 사람은 말을 할 때에도 술 냄새를 풍기고, 행동도 술기운을 빌려서 폭력적이거나 과도한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술에 취해서 혀가 꼬여 말도 제대로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입만 열면 남을 비방하거나 욕을 해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내면이 온갖 비방과 욕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입을 열면 상냥한 말을 하고 고상한 언어가 나오고, 행동도 젠틀하고 부드럽습니다.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고 화를 내지 않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자주합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내면에 상냥함과 고상함 그리고 감사함이 가득 차 있는 사람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내면에 무엇을 채우고 있느냐가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삶

그러면 무엇을 담아야 우리의 삶의 본질이 가장 가치 있고 아름다운 삶이 될 수 있을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말을 해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말을 합니다. 입을 열면 예수님을 찬양하고,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행동하고 예수님의 향기가 납니다. 그 사람의 속사람이 예수님으로 가득 채웠기 때문입니다.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도 평소에 가득 채웠던 것이 나오는 법입니다. 후회할 일을 많이 채우고 살았다면 마지막 때에 후회와 회한이 나올 것이고, 기쁨과 감사로 채웠다면 마지막도 기쁘고 감사할 것입니다.
 
우리도 달려갈 길을 마칠 때가 옵니다. 그때 그 마지막이 참으로 아름다운 유종지미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인생의 처음도, 중간도 그리고 마지막까지 오직 예수님만을 높이고, 예수님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

정지홍|좋은씨앗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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