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산한 부자의 진짜 보물
 
엄상익/크리스찬리뷰
팔십이 가까운 고교선배를 만나 동네 기원으로 갔다. 선배는 여러 가지 복을 받았다. 좋은 부모를 둔 부잣집에 태어났다. 재능도 뛰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기자로 출발해 편집국장과 신문사 사장까지 지냈다. 부유한 집안의 딸과 결혼했다.
 
사업가인 부인은 전국에 호텔과 리조트 사업을 벌이고 가구사업까지 한 준 재벌이었다. 상류층의 사교계에서 그들 부부는 항상 중심에 있었다. 순항하던 그들 부부가 갑자기 암초를 만나 파선을 했다. 하루 아침에 모든 게 허물어진 것이다. 주변에서는 그들 부부가 자살하지 않고 버티는 게 기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폐허 위에서 꿋꿋하게 서 있는 그 선배는 성경 속의 ‘욥’같은 삶의 알맹이를 가지고 있었다. 고난의 체를 통해 남은 진리 말이다. 기원 구석에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한 분은 전직 법무장관이고 다른 한 분은 전직 노동부장관이다. 텔레비전 뉴스 화면에서 비치던 환한 기운이 사라지고 초라한 보통 노인들의 모습이다.
 
동네 기원은 세상 일을 끝낸 노인들이 모여드는 인간 저수지 같은 느낌이다. 내가 석 점을 깔고 바둑을 시작했다. 선배가 화점 밑으로 바짝 파고 들어온다. 나는 점잖게 바둑을 두면서 대화를 나누는 그런 분위기를 더 즐기는 편이다.
 
“저쪽의 장관 두 분도 한때는 화려하던 분인데요”
 
내가 말했다.
 
“장관도 부자도 다 부질 없어요. 다 그렇고 그런 거요. 인생무상이지. 장관을 했던 저 분들도 틀림없이 그렇게 느낄 거야. 나도 그렇고 말이지.”
 
선배가 탄식 비슷하게 내뱉었다. 부자였고 언론사 사장으로 힘을 가졌던 그가 한 말은 체험에서 나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저는 부자가 되어보지 못했어요. 또 장관같은 높은 지위에 가보지도 못했어요. 다 무상하다는 건 가져봤던 분들이나 할 수 있는 말 같아요. 무상하다는 실감까지는 안 나거든요.”
 
내가 말했다. 가져본 사람들은 그게 별게 아닌 걸 안다. 그러나 못 가져 본 사람들은 끝까지 그것들은 실루엣에 가려진 미지의 것이다. 선배가 바둑판의 넓은 하변 쪽 중심에 돌 한 점을 과감히 놓더니 입을 열었다.
 
“내 얘기를 하지. 내가 태어난 집은 다동의 큰 기와집이었어. 지금 대형호텔이 있는 자리에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지. 난 공부도 잘했어. 서울대를 졸업하고 큰 신문사 경제부 기자까지 궤도 위에서 달렸어. 여류 사업가인 집사람도 실패가 없었어. 우리 부부는 제주도에 별장을 가지고 요트도 있었지. 말도 네 필이나 있었어. 선택된 신분이 되어 젊은 날 누릴 만큼 누려봤지.
 
그러다가 어느 날 날개가 떨어지면서 깊은 절벽 아래로 허망하게 추락한 거야. 우리 부부와 아들은 지금 변두리에서 한 달 한 달의 생활을 걱정하는 삶이야. 입에 풀칠을 하기 힘든 상황이지. 나나 아들이 일어설 수도 없어. 아내가 사업을 크게 벌일 때 나와 아들을 주주로 집어넣은 거야. 그러다 파산을 하니까 식구들 모두가 신용불량자가 된 거야. 어떤 일도 할 수 없지. 집사람이 남편과 아들이 주주로 지분을 가지고 있으면 상속할 때 도움이 된다고 해서 그렇게 했던 거야.”
 
선배는 자기의 불행을 담담하게 얘기했다. 담담할 수 있다는 건 체념 속에 강인한 저항력이 생겼다는 것이 아닐까.
 
“이제 연세가 그 정도 노인이면 다 뒤로 물러 앉아 자식한테 부양을 받을 때가 아닌가요? 아들이 부모를 보살필 겁니다.”
 
“내가 바깥일을 하느라고 자식을 잘못 키운 것 같아. 미국유학을 시켰는데 공부하기 싫다며 돌아와서 돈 많은 엄마를 졸라서 영화 사업을 했지. 그때야 남보기 화려했지. 아버지는 신문사 사장이고 엄마는 부자인 여류사업가였으니까. 영화배우와 모델들이 아들한테 결혼하자고 덤벼든 거야. 나는 얼굴에 분 바르는 직업을 탐탁찮게 여겼어. 신문사 사장을 할 때 여러 사람을 만났는데 제대로 된 사람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었어.
 
그래서 반대를 했는데도 이 녀석이 우겨서 결혼을 했지. 모델 출신 며느리가 집안이 망하니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더라구.”
 
주고받는 바둑이 백수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내가 놓은 돌들을 봉쇄한 채 중앙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화려한 부자들의 드라마를 보면서 선배님 같은 사람들을 동경해요. 화려하게 살 때 어땠어요? 어떤 게 화려함이었던 겁니까?”
 
“신문사 사장이고 게다가 부자니까 모두 머리를 굽혔지. 룸싸롱을 가서 권력자하고 술을 마시면 일류 여배우들이 달려와서 비위를 맞추곤 했지. 술 먹고 골프치고 여자한테 돈을 그냥 뿌렸어. 그게 한없이 계속되는 세상인 줄 알았어.”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하게 사는 거라고 생각해요? 다시 시계바늘을 돌려도 그렇게 살 건가요?”
 
“아니야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그때 내가 막 살아서 그 죄 값으로 이렇게 말년이 힘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야.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까 인생이란 자기가 보람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게 행복인 것 같아. 내가 했던 기자를 기준으로 말한다면 열심히 취재해서 특종기사를 쓰면서 보람을 느끼는 생활을 말하는 거지. 편집국장도 해보고 사장도 해 봤는데 그게 기자의 목적은 아닌 것 같더라구.”
 
있을 때를 기준으로 한다면 그는 모든 게 없어진 셈이다. 그러나 그를 보는 내 생각은 조금은 달랐다. 거꾸로 뒤집어 보면 그는 이미 많은 걸 확보한 사람이었다. 부귀영화를 누려봤다. 그리고 삶도 팔십 년 이상을 확보한 사람이었다. ‘거꾸로’라는 시각에서 총량을 따지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남은 시간도 행복의 광맥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라즈니쉬의 책에서 읽은 내용이 떠올랐다. 가난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부자가 되고 싶어 복권을 산다. 그러나 가져봤던 부자는 그런 욕망이 없다. 달이 차면 기울 듯 시계추도 한쪽 끝으로 가면 반대방향을 향하듯 망한 부자는 오히려 성자의 길로 갈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내가 선배에게 이렇게 나의 의견을 제시했다.
 
“이제 진짜 부자가 되어 보지 않을래요?”
 
“어떻게?”
 
 “이제부터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거예요. 내면의 창고에 저 세상으로 가지고 갈 수 있는 진짜 보물을 차곡차곡 쌓는 겁니다. 맥주를 만들던 두산그룹의 회장도 저승으로 병뚜껑 하나 가지고 가지 못했대요. 삼성의 이병철 회장도 저승에서 나중에 온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에게 만 원짜리 한 장만 꿔달라고 하니까 현대의 정 회장이 자기도 가지고 오지 못했다고 대답을 했답니다.
 
가지고 가지 못할 세상의 재물과 인연이 끝나셨잖아요? 남은 시간 진짜 보물을 한번 구해 보세요. 그 보물은 파산해서 날아갈 우려도 없고 녹이 슬 우려도 없는 곳에 보관할 수 있죠.”
 
“그래 그렇게 할 께. 도와줘.”
 
선배가 간절한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잠시 후 둘이서 기원을 나와 옆에 있는 국밥집으로 들어갔다.〠

엄상익|변호사, 크리스찬리뷰 한국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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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4/23 [17:16]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