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둥병자들은...

정기옥/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8/05/28 [15:48]
“아주 무더운 날이었다. 후덥지근하고 붐비는 작은 성당 안에 예배를 위해 모여 있는 문둥병자들은 복음 낭독 뒤에 생기는 잠시의 여유를 반가워했으리라. 아마 그들 중 일부는 제대 앞에 선 신부가 강론을 하기 위해 제의(祭衣)를 벗는 동안 더위로 인한 나른함을 견디지 못해 졸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으리라. 하지만 신부가 말문을 연 순간, 실내의 나른하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너무도 갑작스런 충격에 술렁거림까지 일어났다.
 
‘나의 형제들이여 …’ 하고 으레 말을 열던 그가 오늘은 느릿느릿,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우리 문둥병자들은…’하고 첫마디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존 패로우가 쓴 <문둥이 성자 다미안: 희망의 사도 다미안 신부의 생애>라는 전기에 나오는 대목이다.
 
“우리 문둥병자들은 …”이라는 서두는 하와이의 몰로카이에서 문둥병자들을 섬기던 벨기에 출신의 다미안 신부가 1885년 6월의 첫 주일 아침 자신도 그들과 같은 병에 걸렸음을 알리는 나름대로의 방법이었다. 그가 몰로카이에 첫발을 디딘지 12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나병으로 불리기도 하는 문둥병은 요즈음은 노르웨이의 의사인 한센 (G. H. Hansen)의 이름을 따라 한센병으로 바뀌어 부른다. 당시만 해도 암에 버금가는 불치병으로 취급받고 감염에 대한 두려움과 병에 대한 혐오로 환자에 대한 기피와 격리를 요구했던 천형과도 같은 공포의 질병이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한센병 환자는 부정하게 취급되었기에 공동체와 격리시켰으며 사람을 마주칠 때마다 “나는 부정한 자입니다!”라고 외침으로 상대방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알려주어야 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한센병을 ‘죽음 전에 찾아오는 죽음’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질병 중 가장 고치기 힘들고 무서운 병으로 알려져 왔다. 한센병에 걸린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육체의 아픔을 넘어 삶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사회적으로 격리되어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었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부정하게 취급받아 영혼의 아픔도 처절했다.
 
한국의 근대사에서도 한센병으로 인해 소록도를 비롯한 한센병 요양소가 생기게 되었다. 사랑의 원자탄으로 유명한 손양원 목사가 섬기던 여수의 애양원도 매우 잘 알려진 한센 치료 시설 중 하나이다. 손 목사는 여수 애양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전남지역의 한센인들을 돌보는 일을 주로 하였다.
 
현재 애양원에는 손양원 목사가 한센인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 치료하는 유명한 일화가 그림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손 목사는 1939년 7월 애양원에 처음 부임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일반인들과 환자들 사이에 쳐 있던 담을 허문 것이라고 한다. 그뿐 아니라 한국 성도들에게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좌익학생 중 한 사람을 양자로 삼은 일화와 1950년 9월 28일 자기를 총살하던 공산주의자들에게 “예수 믿고 천국 가야 한다”라고 전도하다 순교한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다미안 신부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고 손양원 목사의 일화를 되집어 보는 이유는 오늘날 우리가 이런 참된 목자들이 너무도 그리운 시대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목회자로서의 삶에 많은 부족함을 느끼고 있기에 그 부끄러운 마음을 넘어 목회자의 정체성과 위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이라도 해보고 싶어서이다.
 
호주뿐 아니라 전 세계를 흔들고 있는 최악의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 호주 천주교의 어린이 성폭행과 은폐는 교회나 성직자의 명예를 실추시킬 뿐 아니라 복음의 본질 자체와 예수님의 사랑까지도 의심하게 만드는 심각한 문제이다.
 
한국의 개신교도 예외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세습논쟁과 물질주의에 압도당해 맥을 못추는 교회의 타락한 모습은 복음 전파의 장애 정도가 아니라 교회의 존재 이유와 본질 자체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 게다가 당사자들과 주변 사람들의 아전인수식 변명과 강변은 점입가경이다. 바로 나와 같은 사람들이 깊이 마음에 담고 스스로를 살펴야 하는 반면교사이다.    
 
하지만 다미안 신부나 손양원 목사는 우리가 따라야 할 아름다운 모범적인 분들이다. 그들이 예수님의 생애를 따르는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두 분은 나약한 인간이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가 얼마나 위대할 수 있으며 강건할 수 있는 지를 입증한 분들이다. 그들이 떠난 지는 이미 오래 되었지만 우리는 믿음의 역사 현장에서 그분들을 만날 수 있으며 그분들이 전해오는 고결한 숨결과 감동의 여울을 느낄 수 있다.
 
이 시대의 한 특징은 물질만능주의가 격랑을 이루고 자기중심적 개인주의가 타인의 접근을 불허하는 첨예의 봉우리를 이루는 영혼 상실의 시대이다. 많은 사람들이 따뜻한 마음으로 따사로운 삶을 사는 것도 사실이지만 또 다른 많은 경우는 다른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고 이기적인 행복과 향락만을 추구하는 냉정과 무관심의 세대이다. 이제 우리의 가슴에 높히 쌓아 올린 단절과 외면의 벽들을 허물고 세속적 탐욕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미안은 1840년 벨기에서 태어나 형 팡필을 따라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와이의 교구로 선교 파송을 받게 되어 있던 형이 전염병에 걸려 갈 수 없게 되자 아직 서품도 받지 않은 다미안은 자청해서 하와이를 향해 믿음과 사랑을 믿음의 파고에 싣고 소명을 따라 사명의 자리를 향해 떠나게 된다.
 
하와이 군도의 푸노섬에서 손수 교회당을 짓고 위험한 바위산을 넘고 밀림을 헤치며 선교에 매진하던 다미안은 1873년 죽음의 유배지와 같던 한센인 격리 수용지인 몰로카이 섬에 들어갈 것을 다시 한 번 자청한다. 백인들에 의해 자행된 탐욕적 약탈과 야만적 부도덕의 결과 중 하나인 한센병에 의해 시달리는 원주민들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자기의 삶을 섞는다.
 
1788년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이 처음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에 40만 명에 달하던 원주민의 숫자는 90년도 안되는 사이에 5만 명 이하로 줄어 있었다. 그의 선의에 찬 헌신과 참을성있는 성실함의 조화는 오래지 않아 많은 원주민들이 개종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환자라는 배려가 담긴 격리가 아니라 개척 이주자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더 이상 정부나 사회가 부담지고 싶어하지 않는 은근한 버림과 폐기의 자리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이 불운한 희생자들은 이 세상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는 운명적 자포자기 상태에 내팽개쳐진 것이다.
 
이들의 구원을 위해 다미안이 지원한 것이다. 그의 오두막은 공동묘지 옆에 지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직접 만든 관이 무려 2천 개에 달했다는 기록을 보면 왜 그가 위생적으로 가장 열악한 그곳에서 살아야 했는지가 설명된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장례식을 주관해야 했고 무덤을 파고 관도 짜야 했던 것이다.
 
그의 섬김과 근면으로 인해 불결한 환경 속에 죽음을 기다리던 그들은 생에 대한 애착을 되찾고 섬 가운데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복음과 복음을 삶으로 번역한 다미안의 섬김과 헌신이 몰로카이의 주민들의 마음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씻어낸 것이다.
 
이제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순간이다. 중세 암흑기 성직자들의  타락과 부도덕한 삶에 관한 고발은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다. 부를 축적한 수도원과 성적으로 타락해서 첩을 둔 성직자가 대다수였던 중세 교회 속에 개혁의 깃발은 높이 계양되었다.
 
많은 면에서 오늘의 교회는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 않나 해서 섬뜩 두려운 마음이 든다. 서로 더 갖기 위해 애를 쓰다 못해 상대를 죽이기까지 하면서 생존의 정글을 헤매는 세상의 북소리에 함께 발을 맞추어 행진하는 어리석은 교회의 그림자가 환상이나 기우이길 기도하게 된다.
 
“우리 문둥병자들은…” 이라고 말을 하며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 시대의 영적 한센병자들을 향한 다미안과 손양원이 목마른 세대이다.〠     

정기옥|안디옥장로교회 담임목사, 시드니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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