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으로 누리는 행복

정기옥/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8/10/29 [17:38]
자주 보지는 않지만 나는 영화를 좋아한다. 특별히 서부활극을 좋아한다. 그리고 일부 중국영화를 좋아한다. 서부활극은 말타기과 야영생활을 좋아하는 내 취미에 맞아서 좋아하고 중국영화는 허술하고 황당한 측면이 오히려 흥미를 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생각없이 볼 수 있는 영화들이라서 좋아한다.
 
영화를 선택할 때 감독이나 출연하는 배우를 믿고 작품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서부영화는 Clint Eastwood나 Val Kilmer같은 배우가 출연하면 무조건 본다. 중국영화감독은 <와호장룡>을 만든 이안 감독과 <영웅>을 감독한 장예모를 좋아한다. 중국영화 중 출연진을 믿고 영화를 선택하는 경우 인상 좋은 주윤발과 풋풋한 소녀 같은 장쯔이가 나오면 그 영화가 보고 싶어 진다. 게다가 이들을 더 좋아하게 하는 매력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들의 사생활이 아름답게 드러날 때이다.  
 
며칠 전 홍콩배우 주윤발이 자기의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밝혀 화제의 중심에 섰다. 그의 재산은 거의 8천200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 나는 그만큼의 재산이 얼마인지 실감조차 하지 못하는 물정 모르는 목사이다. 하지만 굉장한 돈인 것은 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돈은 내 것이 아니다. 잠시 보관하고 있을 뿐이다. 돈은 행복의 원천이 아니다. 내 꿈은 행복하고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내면의 평화와 단순하고 걱정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
 
게다가 그는 일상생활이 매우 검소하다고 한다. 평소에는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매달 용돈이 겨우 11만 원 정도이고 휴대폰도 17년이나 된 것을 쓰다가 고장이 나 2년 전에야 스마트폰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옷도 주로 할인매장에서 구입하며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옷을 입는 게 아니다. 내가 편하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뿐 아니라 동물보호를 위해 자원봉사를 하면서 유기견 보호활동을 한다고 한다. 물질에 대한 주관이 뚜렷하고 나눔으로 행복을 누리는 그의 모습이 보기 좋고 신선하다. 그의 영화가 더욱 보고 싶어 진다.
 
1974년 영국에서 설립되어 전 세계적으로 자선과 기부를 독려하고 섬기는 자선기금재단(Charities Aid Foundation)은 매년 갤럽조사 연구소에 의탁해서 국가별로 세계 자선 지수(World Charities Index)를 조사해 그 순서를 발표한다. 흥미를 끄는 것은 결코 아닐 것 같은 나라들이 매년 상위 1,2 위에 오른다는 점이다. 미얀마와 인도네시아, 또는 케냐 같은 국가들이다.
 
물론 미국과 호주, 뉴질랜드 같은 나라들도 거의 10위권 안에 든다. 반면 대한민국은 잘해야 60위권, 못하면 70위 후반에 머무는 게 고작이다. 남미의 니카라구아나 콜럼비아과 비슷한 순위이다. 종교적 배경으로 보거나 경제적 수준을 지표로 볼 때 목사로서, 그리고 한국인으로서 생각에 잠기게 한다.
 
우리가 이래도 되는가? 호주에서는 성직자들도 사례비를 받으면 세금을 내고 회계년도가 되면 반드시 세무신고를 한다. 나도 그때마다 영수증을 비롯한 서류들을 정리해서 회계사에게 가지고 간다. 그 시간은 나의 물질관과 나눔과 자선에 대한 실천을 뒤돌아보는 시간이다.
 
대부분의 경우 서류를 정리하며 아차! 싶어 낯뜨거움을 느낄 때가 많다. 회계사에게 자신있게 내보일 수 있는 자선이나 베품이 없는 부끄러운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래도 되는가?        
 
나눔과 기부를 실천하는 데는 비단 물질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하지만 크게 세 가지가 있다. 물질과 재능과 육신이다. 첫째는 물질을 기부하고 베풂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다. 물질은 많다고 나누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넉넉해서 나누는 것이다. 없고 부족한 사람들의 안타까움과 서글픈 마음을 알기 때문에 나누는 것이다. 물질을 내게 맡기신 분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이 나눔을 실천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많이 가진 사람이 많이 나누고 기부하는 것을 보면 찬사를 보내게 된다.
 
잘 알려진 대로 버크셔 해스웨이의 회장인 워렛 버핏 같은 사람은 개인적으로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도 세상 모든 사람이 깜짝 놀라고 기죽을 만큼 엄청난 돈을 매년 기부하고 나눈다. 2006년 한 해에만 빌 게이츠 재단에 24.5억 불을 비롯해 30억 불을 기증한 후 그 아름다움의 행적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상속세나 증여세를 비롯해 마땅히 내야하는 세금마저 안내려고 편법을 쓰고 속이는 일부 한국의 철학없는 졸부들을 생각하면 비교한다는 자체가 그런 선한 기부자들에게 모욕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워렌 버핏은 기부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생에서 원하는 걸 다 가졌어요. 제가 현재 자는 잠보다 더 좋은 잠을 잘 수 없어요. 더 잘 먹을 수도 없고요. 사람들은 내가 자신들보다 더 좋은 것을 먹는다고 생각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나누고 기부한다고 아무것도 포기하거나 손해본 게 없어요. 그게 진리예요.”
 
그렇다면 이런 부자들만 기부하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고단하게 살았지만 생의 끝자락이 나눔과 기부로 더욱 아름다워진 삶은 수없이 많다. 힘들고 험난한 삶을 살아온 평범한 사람들의 아름다운 기부소식이 곳곳에서 들려오고 그곳에는 조그만 촛불들이 어두움을 몰아낸다.
 
암 투병 중에 있는 70세의 한 할머니가 한밭대에 현재 살고 있는 임대 아파트의 보증금 260만 원을 기증하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이 할머니는 나중에 알고보니 8년 전에 이름이 알려지기를 거부하며 1억 원을 기증하신 분이었다. 그 돈은 그 분이 한푼 두푼 아끼고 아껴 평생을 모은 전 재산이었다.
 
그 할머니가 2013년 암진단을 받고 5년째 힘겹게 투병생활을 하며 “유능한 지역 인재를 양성해 달라”고 기부의사를 밝혀 온 것이다. 지난 4월에는 일산의 한 요양병원에서 암 치료를 받던 고 강천일씨가 자기의 전 재산 3천600만원을 용산구청에 기부한 후 5일 만에 눈을 감았다. 그 돈은 그가 빌딩의 환경미화원과 가락시장 짐꾼으로 일하며 평생 억척같이 모은 것이었다. 그는 기부 당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기초생활수급자로 그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다. 평생 힘들게 산 만큼 어려운 사람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면 좋겠다.”
 
이런 분들은 나눔으로 행복을 누리며 마지막을 맞이한 아름답고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둘째 나눔은 재능기부이다. 나는 매해 자기들의 재능을 사용해 나누고 섬기는 많은 선교팀과 자원봉사자들을 본다. 개인의 휴가와 물질을 희생하고 자비를 들여 혜택이 없는 곳을 찾아가 자기들의 재능을 기부하는 것이다. 이런 기능재부에는 거의 제한이 없다. 교육, 음악, 미술, 의료, 첨단 정보사업, 언어, 각종 기술과 경험 … 헬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이런 것들을 개인수익을 목표로 하지 않고 조건없이 나누고 주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 중 하나가 세계은행총재인 김용 같은 사람이다. 의사인 그는 중남미의 빈민지역 결핵퇴치를 위한 의료구호 재능기부를 하면서 주목을 받고 다트머스 대학 총장이 되고 마침내 세계은행 총재가 되었다. 나눔으로 행복의 수혜자가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장기를 기증하고 나누는 것이다.
 
물론 이 분야는 조금 더 사려깊은 문화, 종교적 이해가 필요하다. 가톨릭에서는 장기기증을 사랑과 자선의 한 실천으로 여기고 적극 권장한다. 개신교는 개인의 선택에 맡기는 편이고 많은 사람이 참여한다. 불교에서는 정신과 육체의 죽음을 동일시하지 않고 다양한 의견이 대립되어 보편적이지 않은 개념이다.
 
유대교에서는 죽음의 순간이 언제 임했느냐를 비롯해서 복잡한 정의적 문제가 있어 장기기증 전에 랍비와 상의하는 경우가 많다. 이슬람에서는 장기기증 자체를 하나의 경건한 행위로 보지만 여전히 신학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문화적으로도 서양사람들보다 아시아계 사람들이 장기기증에 보수적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장기기증을 꺼리는 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나눔으로 행복을 누리는 길은 매우 많고 언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가능하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신념이나 가치관의 차이에 상관없이 인류를 하나로 묶어주고 서로를 친구가 되게 하는 방법은 상대의 필요와 아픔을 향해 다가가서 내 것을 내어주고 나누는 것이다.
 
누군가의 고통과 아픔을 어루만질 수 있고 필요를 채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절대자가 당신에게 의미있고 목적 있는 삶의 기쁨을 허락하는 은혜의 순간인 것이다. 인간은 버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채워가지만 나누고 베푸는 것으로 삶을 형성할 때 진정한 누림의 행복을 맛볼 수 있다. 〠   

정기옥/안디옥장로교회 담임목사, 시드니신학대학 교수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