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가 울어 줄 수 있는 직분자라면...
 
최주호/크리스찬리뷰
어느 날 임직식에 초대되어 권면 순서를 맡은 적이 있다.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기도하다가 문득 한 집사가 떠올랐다. 그 축사를 하기 바로 얼마 전에 소천한 A집사인데 그 집사의 장례식을 인도하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던 것을 기억하면서 이렇게 권면을 시작했다.  
 
“목회자가 당신의 장례식에서 진짜(?) 눈물을 흘린다면 당신은 성공한 직분자입니다”
 
오래 전에 고 옥한흠 목사가 강의 중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일 주일에 작게는 수 건에서, 많게는 수십 건까지 생기는 경조사들을 인도하다 보면 장례식에 슬퍼하는 것이나 결혼식에 기뻐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경조사를 치르는 당사자들이야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생 일대의 사건이지만 그런 일을 사역으로 감당하는 목사에게는 일상 업무의 하나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아마도 수만 명의 성도를 거느린 대형 교회의 목사였기에 그런 말씀을 하는 것이 당연했는지 모른다.(혹, 이런 솔직한 말을 들으면서 목사님이 감정이 메마른 직업 종교인이 되었다는 오해는 마시기 바란다.)
 
목사가 경조사에 크게 눈물을 흘리거나 기뻐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감정이란 것이 강요하거나 쥐어짠다고(?) 나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모름지기 감정이란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내 안에 들어와 내 마음을 움직이는 자연적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옥 목사의 많은 경조사를 통해 어느 사이엔가 감정이 메말라가는 자신의 모습에 안타까워하셨던 것 같다.
 
나는 옥 목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왜냐하면 나 같은 중형교회를 시무하던 목사도 몇 주 연속 장례식이 있거나 결혼식을 집례하면 어느 사이엔가 사무적으로 움직이는 내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아니 조금 변명을 더 한다면 목회가 태어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일상적인 일들에 대한 전도서적인 관조의 관점을 갖게 만들어 주기 때문일 수도 있다.    
 
청교도의 거장으로 불리는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는 ‘신앙과 정서’(Religious Affections)라는 책에서 영적 부흥이 일어날 때에 동반되는 우리의 정서(감정)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는 말한다.
 
“성도들은 종교에 대한 여러 가지 교육을 이미 받아서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설교라는 매개체를 통해 말씀이 가진 그 위대함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북돋아 주어 그들 안에 있는 정서(기쁨/슬픔/의로운 분노 등)를 깨우쳐 주어야 한다.” 쉽게 말하면 한 사람의 삶에 진짜 영적 부흥이 일어날 때에는 그의 마음이 냉랭한 이성의 상태로 머물러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는 감격에 취해 손을 들고 찬양을 드리든지… 아니면 복받치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든지… 그것을 거룩하고 참된 감정이라고 부르는데 영적 부흥에 동반되는 중요한 영적 부흥의 표지가 된다. 실은 그런 의미에서 목사의 눈물은 설교나 가르침으로나 권면으로 다 할 수 없는 목사의 내면에 숨겨진 영혼의 탄식이다. 
  
목회자가 진짜 눈물을 흘려줄 수 있는 사람…
 
아무튼 권면의 말로써 그 말이 합당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날 권면이 끝나고 난 후에 여러 교우들로부터 은혜받았다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그 눈물(?)에 공감했던 모양이다.     
 
실은 A집사의 장례식장에서 내가 크게 울었던 이유는 특별한 추억 때문이었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A집사가 처음 이민지에 도착했을 때였다. 나는 그 집을 심방했고, 난생 처음 그토록 파란만장했던 한 사람의 인생 스토리를 몇 시간에 걸쳐서 통째로 들었다.
 
특전단 상사로 시작해서 대통령을 경호했던 이야기, 어떻게 예편을 했는지 또 어떤 사업을 했는데 그리고 또 어떻게 망하고 깨지고 힘들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도 목회를 하면서 참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단언컨데 그 집사의 이야기는 특별한 이야기들 중에서도 특별했다. 그 후로 A집사는 직업 군인으로 오래 복무한 경험 때문인지는 몰라도 몸에 밴 군인 정신으로 무장해서 하나님과 교회를 향해 충성을 다해 섬겼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던 중 그분의 삶에 큰 사건이 터졌다. 간에 이상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렸는데, 의사는 생명에 지장이 있는 심각한 상태라고 말했다. 그때에 교회가 A집사를 위한 기도를 시작했고,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집사의 건강을 회복해 주셨다.   
 
그렇게 치유를 받고 난 후에 A집사는 나에게 근교에 수영장과 인공 온천이 딸린 집을 세 얻어 주말농장(가든)같은 사업장을 하겠다고 말했다. 아마도 본인 생각에는 가족이나 친구 단위로 주말을 보내고 또 음식도 사먹을 수 있는 그런 사업 아이템이었던 같았는데 내 마음에는 별로 내키지 않았다.
 
이유는 주말 가든의 위치가 주중에는 퇴폐적인 손님들(?)이 단체로 흥청망청 술 파티를 벌이기에 적합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실은 주변 사람들이 그 집사에게 그런 류의 장사 방식을 권유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모름지기 이 장소는 술 장사가 제격이야~”
 
나는 혹시나 그 집사가 이 사업으로 인해 신앙을 잃지는 않을까라는 노파심이 들었다. 드디어 개업 예배를 드리는 날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개업 예배 때에 사용하지 않던 파워풀한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시작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 (중략)…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 4:13-17)
 
개업 예배를 통해서 사업의 번영을 바랐던 사람이라면 이 말씀은 정말 초(?)치는 말씀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강권적으로 내게 이 말씀을 전하게 했다.
 
“우리는 많은 것을 계획하지만 내일을 자랑할 수 없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라는 단서를 붙이면서 우리의 욕심대로 일을 계획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가르쳐 준 선을 행함이 중요한데 그런 일에는 핑계를 대면서 멀리하고 결국 자기 방식대로 어리석은 삶을 선택합니다”
 
그렇게 설교를 마치자 A집사는 시험에 들지 않고 특전단 상사 출신답게 우렁차게 대답했다. ‘아멘!’ 나는 그렇게 대답하는 A집사를 믿었고 그 대답대로 A집사는 주말가든을 운영했다. A집사는 선을 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가을이 되면 교회 어르신들을 주말가든으로 초청해 극진하게 대접했고, 교회가 필요하다면 언제나 제2수양관으로 사용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주말가든의 수영장은 교회의 세례식장이 되었고, 주말가든은 성도들의 휴식과 교제 장소로 자기 사명을 100% 감당했다. 집사님은 주말가든으로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성경에 기록한 대로 선을 행함에 있어서는 실패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A집사가 갑작스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아니 아직 50대 초반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직 할 일이 남은 것 같은데….” 
 
그분의 장례식장에서 나는 개업 예배 때에 설교했던 구절을 떠올렸다. 만약 내가 그때에 다른 본문을 잡았다면 지금 어떤 기분일까? 그랬다면 아마도 A집사의 죽음 앞에서 더 안타까워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하나님이 오늘을 위해서 그날을 준비시킨 것 같았다. 그날 나는 장례식장에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 아직 떠나 보내기에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인간적인 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은 A집사를 당당하게 하나님 보좌 앞에 서게 해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A집사! A집사는 목사를 진짜 눈물(?)을 흘리게 만든 진짜 성공(?)한 성도입니다.”〠   

최주호|멜번순복음교회 담임목사


copyright ⓒ 크리스찬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입력: 2018/12/26 [17:29]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