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골목을 흐르는 온기

엄상익/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9/01/29 [17:53]


거리의 변호사로 나가는 날이다.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있다. 벼룩시장에서 산 싸구려 바지에 색이 바랜 낡은 파커를 꺼내 입었다. 노숙자들과 비슷한 복장을 해야 그들의 마음이 흘러들어올 것 같았다. 
 

지하철을 타고 종로 3가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올 때였다. 탑골공원을 배회하던 노인들이 지하철 역사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노인들 사이에서 자선냄비를 앞에 놓고 종을 울리는 구세군이 있었다. 다리를 절며 그 앞을 지나가던 영감이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어 냄비 속에 집어넣는다. 순간 가슴에 잔잔한 물결이 인다.
 
그 영감한테는 점심 한끼 값일지도 모른다. 그걸 이웃과 나누는 것이다. 바람부는 거리에는 갈 길을 잃은 듯한 노인들이 숲속의 나무들 같이 서 있었다. 좁은 골목 어귀에서 머리가 덥수룩한 노숙자가 바닥에 앉아 손에 든 막걸리가 든 술잔을 쳐다보고 있었다.
 
탑골공원 파출소에서 옆으로 꺾인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이천 원짜리 바지를 몇 개 바닥에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영감들이 보였다. 골목 저쪽 무료급식소 옆에 젊은 김 변호사와 내가 자리를 맡은 터가 있었다. 김 변호사에게 다가가 그 옆에 있는 접이식 의자에 앉으려고 할 때다. 우락부락한 인상의 한 영감이 나를 보면서 말했다.
 
“여기 앉으면 안 돼, 저리 가”
 
나를 그 골목에서 방황하는 노인으로 본 것 같았다. 오늘 옷을 그렇게 입고 나온 탓인 것 같았다.
 
“여기가 내 자리야, 그 의자 줘요”
 
내가 말했다.
 
“안 돼, 이 의자 여기 거야.”
 
그는 내가 앉지 못하게 의자를 접어서 무료급식소 안으로 가져다 벽에 걸쳐 놓았다. 거리의 변호사인 젊은 김변호사를 보호해 주려는 마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거기서 조금 떨어진 무료급식소 앞에 앉아 상담을 하고 있는 김 변호사를 보고 있었다.
 
김 변호사 옆에서 오십 대쯤의 한 남자가 서서 비실비실 웃고 있었다. 그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옆에 있는 작은 칠판에 써 있는 글씨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소리쳤다.
 
“무료 법률 상담, 무료 법률 상담”
 
정상적인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가 내게 다가오더니 히쭉 웃으며 말했다.
 
“쟤가 변호사래, 내가 보니까 말이 너무 많아. 그런데 똑똑한 것 같아. 그런데 말이야 나 담배 한 대만 줘.”
 
“없어 나 안 피워”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그에게 주었다. 그 돈을 보는 순간 그의 눈빛이 번쩍였다.
 
“아니, 누가 누구를 돈 주는 거야? 같은 주제에? 이래 뵈도 나 돈 많아”
 
순간 아차했다. 그의 눈에는 나도 같은 노숙자였다. 그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부시럭거리더니 가지고 있는 돈을 꺼냈다. 천 원짜리 세 장이 보였다.
 
“봐, 나 이렇게 돈 있잖아? 우리 같이 저기 술 마시러 가자”
 
그는 나와 친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때 무료급식소에서 몇 명이 나와 나를 둘러쌌다. 나이 먹은 여자도 한 명 끼어 있었다. 여자가 나를 찬찬히 보더니 “여기서 못 보던 얼굴인데 처음 나왔나봐.”라고 했다. 호기심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우리 저기 가서 같이 술 먹자”
 
다시 다른 남자가 권했다. 여자가 나를 보며 말했다.
 
“나하고 사귈래? 인생이 한 번 흘러가면 다시는 오지 않아”
 
절망의 골짜기에 떨어진 그들의 내면은 외로움인 것 같았다.
 
“나 술 안 먹을래.”
 
내가 그들의 언어를 흉내내 짧게 대답했다.
 
“그럼 같이 놀아”
 
그중 한 명이 다시 나를 보면서 말했다.
 
“안 놀아”
 
그들의 얼굴에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처음 보는 신참한테 호의를 베풀었는데도 통하지 않는 것이다. 그중 한 명이 나를 관찰하듯 보면서 옆의 동료에게 말한다.
 
“보니까 좀 모자라는 것 같지 않아?”
 
그들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가 나를 보면서 다시 말한다.
 
“바보 맞지? 바보지?”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들이 한참 나를 보더니 재미없다는 듯 자기네들끼리 가버렸다. 나는 다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 영감이 소리 없이 다가오더니 뭔가 손에 쥐어 주면서 말했다.
 
“이거 손에 쥐고 있으면 뜨뜻해져.”
 
나는 그가 손에 쥐어준 걸 봤다. ‘핫팩’이라는 주머니난로였다. 손에 쥐고 있으면 열이 나는 도구였다. 순간 가슴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없어도 이웃이 추운 걸 보고 나눌 줄 아는 것이다.
 
조금 내려가니까 더 많은 게 보였다. 늙고 병들고 외로워도 그들 사이에는 흐르는 온기가 있었다. 그래서 추운날씨에도 노인들은 탑골공원 뒤로 몰려드나 보다.〠


엄상익|변호사, 크리스찬리뷰 한국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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