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에는 다른 교회로 가 주세요
 
최주호/크리스찬리뷰

예전에 남미에서 시무하던 교회의 건축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어느 날, 시청에서 교회 건축 허가를 위한 소음 측정을 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 말의 의미는 교회에 사람을 보내 예배 시간의 소음이 얼마나 되는지를 측정하겠다는 말이었다.
 
실은 교회가 주택들 사이에 끼어 있기에 시청의 허가를 받아야만 교회로써 운영이 가능한 나름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방송부에 연락해서 그 주일 만큼은 모든 음의 데시벨을 확(?) 낮추라고 요청했다.
 
당연히 찬양팀에게는 박수를 치지 않는 찬양을 선곡할 것을 주문했고, 설교도 감정이 격앙되어 데시벨이 올라가지 않는 조용한 설교로 준비했다. (우리끼리는 이것을 정통 장로교식 예배라고 부르는데… 요즘 장로교는 그렇지 않음을 알고 있으니 오해없으시길 바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께는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참 힘든 예배였다. 박수를 치지 않는 찬양만으로 예배를 드리자니 흥이 나지 않았고, 또한 평소 내 설교의 습관과는 반대로 소리를 낮추어 조용히 설교하다 보니 설교는 분명 내가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마치 다른 사람의 설교를 듣는 것 같았다.
 
게다가 성전 뒤편에서 소리 측정기를 들고 불꽃 같은 눈동자로 보고 있는 시청 사람도 예배를 방해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암튼 정신없이 예배를 드렸는데, 그나마 딱 한 주만 견디면 된다는 생각으로 참았다. 예배가 끝나고 성도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그 시청 사람이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목사님! 오늘 예배는 정말 은혜스러웠습니다! 혹시 제가 다음 주에 이 교회에 나와도 될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내심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다음 주에도 시청 사람이 나온다는 말은 오늘 같은 예배를 또 드려야 한다는 말인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먼저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그래도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면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했다. 기도의 응답이었는지는 몰라도 곧 이런 마음이 들었고 시청 사람에게 말했다.
  "
우리 교회도 스페인어 통역 시설이 있어서 현지인들이 와서 예배를 드릴 수는 있지만, 아무래도 우리 교회는 한국 이민자들이 전부인 교회이니 당신은 다른 현지인 교회로 나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혹시 제가 다른 좋은 현지인 교회를 소개해 드릴까요?"
 
쉽게 말하면 다른 교회로 나가 달라는 말이다. 도저히 시청 사람을 감당할 만한 믿음(?)이 내게는 없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고 불편한 예배를 더는 드리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그렇게 말한 후에 시청 사람을 돌려 보냈는데, 하나님이 내 마음을 알았는지 다음 주 예배에 시청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우리는 우리 모습 그대로 데시벨을 높이고 박수를 치면서 행복한 주일 예배를 드렸다. 아~~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나니 그제서야 예배를 드린 것 같았다. .  
 
단 한 주의 경험이었지만 그때 나는 나라는 사람과 내가 시무하는 교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박수치고 소리 높여 말씀을 선포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통성으로 기도하는 식의 예배에 최적화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주 안에서 살아 있음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혹시 누군가가 꼭 그런 식으로 찬양을 드리고 기도를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일단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람을 신묘막측하게 만드신 하나님은 다양한 성품을 그들 속에 숨겨 놓으셨다고…”
 
하나님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독특함으로 아름다운 모자이크 작품을 만드는 분이다. 이것을 누군가는 하나님의 심미안적인 특성이라고 부르는데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보시기에 좋은 걸작품들이다. 
  
개신교가 가진 강점 중 하나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장로교가 있는가 하면 감리교도 있고 침례교나 성결교나 성공회 그리고 오순절 교회와 그리스도 교회도 있다. 물론 다양한 선교 단체도 빼놓을 순 없다.
 
주님은 각 사람의 다양함을 인정하여 다양한 교회를 준비시키시고 성도들로 자신들에게 맞는 곳으로 찾아가도록 한 것 같다. 이 말은 성도들이 교단이나 목회자의 독특성을 따른 각각의 교회들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말이다. 내 생각에는 그래야만 개성이 다양한 우리 모두가 각각 자신에게 맞는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복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일전에 부흥회에 오셨던 분당의 한 대형교회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다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소위 말하는 분당에 잘나가는 교회 3인방이 있다고 한다. 만나교회, 선한목자교회, 분당우리교회… 실은 그런 잘나가는 교회들 외에도 분당에는 각 교단의 내노라 하는 교회들이 포진하고 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분당 지역의 목회자들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유는 그쪽 동네 사람들은 교회에서 문제가 생기면 교회를 향해 싫다는 말을 하지 않고 그냥 조용히 다른 교회로 간다는 것이다. 하기야 좋은 교회가 많으니까~~ 경상도 사투리로 “천지빼까리 맹키로 많으니까” 말 없이 싫은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에 출석하면 그만이다.
 
이 말은 교회를 쉽게 바꾸라는 말이 아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무턱대고 교회를 바꾸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영적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의 무식한 선택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와 맞지 않는 교회에 계속 남아 비판 모드로 충만해 아까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는 말라는 말이다.
 
싫은 교회에 앉아서 찬송가 337장에 나오는 “무거운 짐을 나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라는 찬송으로 눈물 흘리지는 말라! 그렇게 고통을 견디는 것보다는 잠시 그 자리를 떠나 나에게 맞는 교회에 가서 주님의 은혜로 회복되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닌 것 같다.      
 
이렇게 정황하게 말은 했지만, 그래도 교회를 바꾸라는 말이 쉽게 입에서 떨어지는 않는 이유는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실은 교회는 예수를 만나서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곳이기도 하지만,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웬수(?)들과 함께 지지고 볶으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훈련소이기도 하다. 가족도 살다 보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싸울 때가 있는데 생면부지의 남남이 모인 교회는 오죽 하랴! 그저 좀 참고 시간을 보내면 또 다시 좋아지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다.
 
수년 전에 존 스토트 목사의 설교를 듣다가 두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많이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어느 날 존 스토트 목사가 설교를 마치고 문에 서서 인사를 하고 있는데 두 할머니가 존 스토트 목사의 손을 꼭 붙잡으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목사님! 우리는 오늘 같은 복음을 전하는 설교를 듣기 위해 20년을 기다렸습니다”
 
이 말은 내 마음에 맞지 않고, 남아 있기 힘들었던 그 자리에서 20년을 기도하면서 버텼다는 말인데 드디어 그 버팀의 열매로 오늘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 예화를 들으면서 난 그 할머니들 같은 위대한 평신도들이 세상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교회는 그런 평신도들에 의해서 지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는 것 같다. 소천하신 옥한흠 목사님의 말을 빌린다면 “목사 기죽이는 평신도들”이다. 주의 일을 업으로 감당하는 목회자를 작아 보이게 만드는 그런 평신도들의 존재가 개신교의 힘이라는 말이다. 
 
“다음 주에는 다른 교회로 가주세요!”
 
이 말은 내가 시청 사람에게 쓴 말인데 실은 지금까지는 딱 한 번 쓴 말이다. 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매일의 시간을 기쁨과 감사로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기쁨과 감사가 현재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 공동체를 통한 것이라면 이보다 더한 복이 어디 있겠는가?
 
샬롬!!!〠   


최주호|멜번순복음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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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2/26 [11:36]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