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 안의 악취를 견딜 수 있겠니?
 
최주호/크리스찬리뷰

기독교 윤리학자인 라인홀트 니버는 노아의 방주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당신은 방주 밖의 홍수가 아니라면 절대로 방주 안의 악취를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할 때에 방주 밖은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그렇기에 방주 안으로 들어가야만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방주 안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 순간부터 그곳에서 풍겨나는 동물의 악취를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노아의 식구들이 방주 안에 있었던 것은 방주가 쾌적한 곳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살기 위해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고 그렇기에 생명 보존을 위한 최소한의 대가로 악취 정도는 참아야 했다.     
 
어느 날 교회를 등록한 성도와의 대화 중에 본인이 교회 사람들과 목회자 때문에 교회를 떠났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더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 성도는 할아버지가 목사님였음에도 불구하고 시험이 들어 청년기 이후 오랫동안 교회를 떠나 방황하다가 교회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목사님 지금은 그렇게 교회를 떠난 일이 가장 후회스럽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 성도는 교회의 악취를 견디지 못하고 뛰쳐 나간 사람들 중에 하나인데 의외로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많다는 것이다. 나는 악취나는 교회로 다시 돌아온 그분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교회는 사람보다, 제도보다,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여튼 목사는 말은 잘한다 ^^)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어느 누구도 교회 생활(악취)을 견뎌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예전에 ‘진짜 사나이’라는 TV 예능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역시 신병 훈련소의 백미는 눈물 콧물 짜내는 화생방 훈련인데 그곳에서 훈련병들은 지옥의 맛을 맛보게 된다. 화생방 훈련을 하는 동안 조교는 이렇게 말한다  
 
“방독면 벗어!!”
 
훈련병들은 그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쓰고 있던 방독면을 벗고 하나같이 고통의 매운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라. 화생방 훈련의 가스가 아무리 독해도 방독면만 잘 쓰고 있으면 괜찮은데 문제는 방독면을 벗었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다. 독한 가스도 방독면만 잘 쓰면 문제가 아니듯이 교회에서도 방독면(?)만 잘 착용하고 있으면 어지간한 문제쯤은 잘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교회 안에서 써야 할 방독면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인데 성경은 그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믿음을 가지면 어떤 풍랑에서 좌초되지 않고 소망의 항구로 무사히 입항할 수 있다.   
 
중년 남성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던 ‘하프 타임’의 저자인 밥 버포드 목사는 경영 컨설팅의 태두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를 자신의 멘토로 삼고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인생 경영의 수업을 받다’라는 책에서 교회에 대한 드러커 박사의 개인적 소견을 이렇게 적고 있다.
 
“교회는 반드시 공동체를 이뤄야 해! 사회적으로 뭉친 공동체가 아니라 영적으로 뭉친 공동체 말일세. 구심점은 명령이지 선의가 아니야 교회와 테니스 동호회는 달라! 그 차이는 교회만이 줄 수 있는 영적인 헌신이 있어. 교회는 서비스 조직이 아니란 말이야 ~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고 자네는 노조가 아니야~”
 
단언컨데 영적 공동체인 좋은 교회를 만나는 것이야말로 인생 최고의 축복이 아닐까? 실은 우리 중에 누군가가 자신이 속한 가정, 일터, 사회가 행복을 준다고 말해도 영적 공동체인 교회가 주는 그것과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성경 식으로 말한다면 금생과 내세를 어우르는 복은 오직 신앙 공동체인 교회에서만 얻을 수 있는 선물이다.
 
예전에 사역하던 남미의 한 지방도시에는 한인 몇 가정이 소매 의류업을 하면서 사는 곳이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 의류 소매업을 하시는 한인 분들은 크리스찬임에도 불구하고 주일에 함께 예배를 드리지 못했다. 이유는 소매업이라는 동종 업계에서 경쟁하는 관계에 있었기에 주일에 서로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주중에는 손님을 놓고 경쟁하다가 주일에 모여서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그 곳에 믿음 좋은 한 어른 장로님이 오게 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장로라는 직분을 가진 어른(?)이 오자, 그 어른의 말 한마디로 경쟁 관계라는 숙제는 풀려지고, 주일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비록 목회자를 모실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집에 모여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고 헌금을 하고 비디오나 테잎으로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지만 그들은 수년 동안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행복한 교제를 나누었고 또한 선한 사업을 감당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서 그 모임을 이끌던 장로님이 그곳을 떠나 타국으로 이주하시자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 장로님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져 버린 공동체는 다시 표류하기 시작했고 내가 알기로는 지금까지 더 이상 예배는 드리지 못한 것 같다. 그 일을 보면서 나는 교회에는 꼭 어른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진짜 어른 말이다.
 
난 교회마다 이런 진짜 어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 어른은 아마도 이런 사람이면 될 것 같은데… 

 

  ① 교회가 어떤 곳인지를 아는 영적인 사람
  ② 교회가 무슨 일을 하는 지를 아는 거룩한 사람
  ③ 교회 안의 깨어진 관계를 중재할 수 있는 책임감 있는 사람
  ④ 무엇보다 교회를 위해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예수님을 닮은 사람
 
교회는 세상에서 흔히 보는 그런 사회 단체가 아니다. 지금도 죽이고 도적질하고 멸망시키려고 노리는 사단과의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곳이기에 교회는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그렇기에 끊임없는 영적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영적 리더십과 지혜를 갖춘 어른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에 교회는 흔들림없이 천성을 향해 전진하는 생명 공동체로 서게 된다. 나는 사사 시대에 일어났던 비극을 어른 부재의 비극(?)이라고 부르고 싶다. 가나안 정복을 감당했던 여호수아와 그 일들을 경험했던 장로들이 죽자 이스라엘 자손은 더 이상 그 공동체를 이끌 진짜 어른이 사라진 것이다. 어른이 사라진 공동체의 운명은 결국 비참했다는 것을 성경이 알려준다.
 
다시 처음 시작했던 노아의 방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그토록 심한 동물의 악취가 풍겨나는 곳에서 어떻게 방주의 탑승자들은 오랜 시간을 견딜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방주에 타고 있던 그 어른 노아 때문이었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5)
 
하나님과 동행했던 노아가 방주에 함께 있었기에 동승자들은 악취를 이길 수 있었다. 어쩌면 그들이 악취에 대해 불평이라도 할라치면 노아는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방주 안에 있는 것에 감사하자. 비록 악취가 나서 힘들 수 있지만 이곳만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곳이야? 너희들 방주 밖에서 죽을래? 아니면 방주 안에서 참고 걍 살래?”
 
노아의 성숙하고 지혜로운 어른 리더십이 악취를 불평하는 가족들의 입술을 찬양으로 바꾸었을 것이라는 행복한 상상도 해 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아픔은 어른(?)이 없다는 것이다. 문제가 있는 그곳에 서서 싸우는 둘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어른의 부재야말로 교회의 슬픈 현실이다.
 

하나님 나라라는 영적 가치관으로 무장하고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지혜로 헌신하며 섬길 수 있는 진짜 어른만 있었다면 교회의 악취를 참지 못하고 떠난 사람들의 숫자는 지금보다는 훨씬 덜했을 것이라는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언제나처럼 다시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너는 방주 안의 악취를 견딜 수 있겠니?”〠   

 

최주호|멜번순복음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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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4/29 [12:17]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