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사택 주방에서 다시 예배 드립시다
 
최주호/크리스찬리뷰

“당신이 이 집회를 해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나서서 집회를 해산하겠다고 말하게 하진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제 양심에 거리끼기 때문입니다.
 
대신 당신과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고 끔찍한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에 선을 행할 기회를 간과하였기 때문에 내려지게 될 죄와 벌이 나에게서 면제되었다는 확신과 분명한 말로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웨슬레의 전기를 읽다 보니 요한 웨슬레와 찰스 웨슬레의 어머니였던 ‘수산나’가 가졌던 신앙의 새로운 면을 보게 되었다. 가끔 목회자들의 설교에 등장하는 수산나는 믿음으로 10명의 자녀들(본래는 19명을 낳았는데 9명은 일찍 죽었다고 함)을 잘 양육한 영국판 신사임당 같은 느낌의 인물이었는데, 글을 읽고 나니 수산나는 신사임당보다는 바울과 같은 훌륭한 설교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1712년 남편인 사무엘 목사가 회의차 교회를 비우면서 교회의 보좌 신부였던 인맨에게 설교를 맡겼다. 하지만 인맨의 설교는 영적인 은혜가 없었다. 심지어 본문이 로마서 1장 19절인지 마태복음 5장 19절인지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횡설수설했다. 그런 와중에 성도들은 수산나에게 저녁 예배를 드리기를 요청했고 이를 받아들인 수산나가 교회 사택 부엌에서 저녁 집회를 시작한다.
 
‘교회 사택 부엌’이란 말이 참 살갑게 다가왔다. 말씀에 갈급한 성도들이 사택 부엌에 모이기 시작했는데 어떤 때는 통로와 마당에 모인 성도들의 숫자를 모두 합쳐보니 족히 2백명이 넘는 성도들로 채워졌다. 인맨은 자신의 집회보다 더 많은 수의 성도들이 모이는 수산나의 집회를 시기하여 사무엘 목사에게 연락을 취했고, 성도들의 영적 상태보다는 전통과 질서 유지에 더 관심을 있던 사무엘은 아내에게 연락해서 그 저녁 집회의 중단을 요구했다.
 
바로 그때 수산나가 사무엘에게 편지했던 것이 처음에 읽었던 글인데 나는 이글이야말로 목회자들에게 설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목사에게 설교는 다른 어떤 사역보다 중요하다. 어쩌면 설교라는 최고의 사역을 위해 착한(?) 성도들은 존경을 표하고 사례를 하는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목회 사역에서 설교만이 전부는 아니지 않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목회에서 설교를 대신할 어떤 것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설교가 빠진 개신교의 목회는 그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을 중요시 여겼던 카톨릭교회의 성찬상 대신 설교자의 강대상을 예배당 중심으로 오게 만든 개신교도들에게, 설교는 예배의 중심이요 아니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사람이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듯이 성도는 영적인 꼴을 먹어야 사는데 설교는 영적인 꼴을 먹는 것이고 그 영적인 꼴은 바로 설교라는 예배 안의 행위를 통해서 성도들에게 주어진다. 다들 아는 이야기겠지만 개신교에서의 설교는 다른 어느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대체불가의 사역이다   
 
설교는 ‘설득한다’라는 의미를 갖는데 이는 설교자가 청중을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자신이 갖고 있는 노하우를 사용하여 성도들에게 말씀을 이해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아마도 그분이 잘 몰라서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지각이 있고 상식을 가진 보통 목사라면 성도들을 잘 설득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아니 설교 잘하기 싫어하는 목사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설교자도 사람이기에 자기의 개성에 따라서 설교를 준비하고 계발해야 한다. 
 
구약 성경에는 가끔 선지자들이 이성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방법을 동원해 말씀을 전달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실은 선지자 스스로 그런 방식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명령한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당시의 청중들을 향한 하나님의 고육지책이었다.
 
이런 설교 형태를 영어로는 “symbolic actions as prophecy” 즉, 말이 아닌 자신의 몸과 행동을 통해 전달하는 행위 예언이라고 부른다. 선지자들이 시청각 교재나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서 청중을 설득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토판을 가져다가 예루살렘을 그리고 그 위에 성을 에워싸는 사다리를 세우고 흙으로 언덕을 쌓고 진을 치고 공성퇴를 세우며 철판을 가져다 세워서 이제 곧 멸망할 예루살렘에 대한 징조가 된다고 말씀하신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왼쪽으로 390일 누워서 이스라엘의 죄를 담당하고 오른쪽으로 40일을 누워 유다의 죄를 담당하라고 한다.
 
심지어는 자기 아내가 죽었음에도 애곡하거나 슬퍼하지 못하게 하여서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만드신다. 아니 더 심한 경우는 이사야 선지자인데 그는 3년 동안 벌거벗은 몸과 발로 다니라는 명령도 받는다. 난 하나님이 나에게 이사야처럼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다시 수산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았다. “왜 성도들은 수산나의 설교를 들으려고 저녁에 사택 주방에 모였을까?” 그건 단순히 수산나의 설교가 인맨의 설교보다 나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분명히 수산나의 설교에는 성도들을 모이게 했던 그 한 방(?)이 있었을 텐데…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들이 아니었을까?  
 

첫째는 수산나의 설교는 성도들이 알아 듣기 쉬운 언어의 설교였을 것이고, 둘째는 성도들의 삶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을 것이고, 셋째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케 했을 것이다.     
 
수산나는 성도들이 겪고 있는 일상의 문제와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복잡하고 어려운 말이 아닌 성육화(?)된 말씀을 갖고 성도들의 구체적인 필요를 채워주었을 것이다. 나는 수산나가 했을 법한 그런 설교를 ‘들리는 설교’라고 부르고 싶은데 가끔 부교역자들과 설교에 대해서 논할 때면 강조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성도들은 수산나의 ‘들리는 설교’와 보좌 신부였던 인맨의 ‘들리지 않는 설교’를 비교했을 것이다. 실은 이런 비교는 설교를 듣는 청중의 마음에서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데 인맨은 그러한 청중의 마음을 몰랐다는 것이 문제다. 그는 청중이 왜 자신의 설교를 떠나 수산나에게로 가는지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내리기보다는 그저 많은 사람들이 수산나에게로 모인다는 사실에 화가 났을 것이다.
 
만약 인맨이 먼저 자신의 들리지 않는 설교를 점검하고 고쳤다면 이 문제는 더 쉽게 해결되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들리지 않는 설교”는 어떤 면에서 설교자가 범할 수 있는 최고의 악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토록 신선하고 심오하고 은혜로운 성경 말씀을 그토록 지루하고 따분하고 들리지 않게 설교하는 것도 참 대단한데 실은 나 자신에게 언제나 먼저 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신선한 말씀을 갈망했던 성도들은 들리지 않는 인맨의 설교에 실망하고 발걸음을 옮겼을 뿐이다. 그리고 들리는 설교가 있던 수산나의 부엌에서 수산나의 설교를 들으면서 말씀에 대한 감격으로 마음이 뜨거워졌을 것이다.
 
누가복음에는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의 마음에 예수님이 말씀으로 불을 지폈던 이야기가 나오는데 수산나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의 마음에도 그런 말씀의 불이 붙었을 것이고 또한 그 능력으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한 주를 살아갈 힘을 얻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들리는 설교가 주는 능력인데 우리의 영혼에 들려지는 그 설교는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그렇게 뜨겁게 달구어진 마음에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원동력이고 그래서 죄인으로 의인되게 하는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이 바로 이러한 들리는 설교의 장점이다. 마치 낙심하고 절망하며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를 부활의 증인으로 만든 것처럼 수산나가 사택 부엌에서 드렸던 그 설교는 성도들을 예수의 진짜 증인들로 만들었을 것 같다는 상상도 해본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왠지 내 마음에 이런 걱정이 슬슬 들기 시작했다. “이번 주일 저녁에 성도들이 사택 주방에서 사모와 예배를 드리자고 하지는 않을까?” 그저 쓸데 없는 걱정이기를 바란다.〠   


최주호|멜번순복음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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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5/27 [16:20]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