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먹는 것

최주호/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9/08/27 [14:50]

요즘처럼 먹방이 대세인 시대를 사는 것도 복인 것 같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좋고 또한 그런 음식을 만들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요리 실력이 조금 부족해도 인터넷을 열고 B 선생의 레시피를 찾아 따라 하면 자기 능력 밖의 음식도 쉽게 만들 수 있는 시대다.
 
게다가 온갖 종류의 맛집 정보가 인터넷에 흘러 넘치니 만약 먹는 것으로만 행복지수를 측정한다면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를 살고 있다.
 
나도 이제 50여 년의 세월을 살다 보니 고급 음식부터 길거리 음식까지, 그리고 동양에서 중국을 거쳐 서양까지 다양한 음식을 먹어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먹어 본 음식 중에서 유독 추억에 남는 음식이 있는데 “밀라네사 꼼쁠레따” (Milanesa Completa)라는 아르헨티나의 신학교 시절에 먹은 음식이다.
 
소고기를 넓게 썰어 튀김옷을 입혀 기름에 튀긴 다음 그 위에 계란 두 개를 반숙해서 올린 후 옆에 같이 나온 바게트와 함께 먹는 음식인데 아마도 이태리 이민자들이 고향에서 먹던 음식 같았다. 우리식으로 하면 비후가스라고나 할까? 
 
좀 색다른 것이 있다면 계란 두 개를 반숙해서 고기 위에 올려 놓는 것이다. 갓 튀겨낸 고기 위의 얹은 계란 노른자에 바삭한 바케트를 찍어 한 입 베어 물고 고기를 잘라 먹으면 뭔지 모를 행복감이 밀려오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비었던 위장은 음식으로 충만해졌고 얼굴은 미소로 채워졌다. 물론 다이어트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칼로리 만땅의 비추 음식이지만 내 머릿속의 그 음식은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생생하게 추억으로 남는다. 왜 그토록 진한 추억으로 남을까를 생각하다 보니 당시 내가 처했던 상황이 한몫했다.
 
내가 다니던 현지인 신학교는 기숙사가 딸린 학교였다. 월요일 오전에 들어가 금요일 오후까지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수업을 받고 주말에는 집으로 돌아와 각자의 교회를 섬겼다. 문제는 당시 신학교의 급식 상황이 많이 열악해서 배가 고팠던 적이 많았는데 거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미국의 한 재단으로부터 받던 정기적인 후원금이 어느 날 재단의 문제로 중단되면서부터 신학교는 재정의 암흑기를 지나야 했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내가 신학교에 입학했던 때였는데 당시 3-4백 명의 신학생들이 부실한 음식으로 인해 많이 힘들어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힘든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금요일 오후가 되면 나는 후배 신학생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는 간이 식당에 들러 그 ‘밀라네사 꼼쁠레따’를 먹었다.
 
고기를 한 입 베어 입에 넣으면 신학교에서 받은 굶주림의 기억은 한방에 사라지고 온 몸은 환희로 채워졌다. 내게는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의 한 페이지인데 누군가가 “아니! 무슨 먹는 것 하나로 온 몸에 환희를 느끼는가?”라는 질문한다면 나는 우리에게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꼭 말해 주고 싶다.
 
실은 우리라는 존재는 먹는 음식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문화 대명령을 주시는데 바로 그 다음 절의 이야기가 먹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창 1:29)
 
실은 사람뿐만 아니라 이 땅에 창조된 다른 짐승들에게도 하나님은 먹을 것을 주셔서 살게 하신다(창 1:30). 그러므로 사람을 포함한 이 땅의 모든 피조물은 먹거리를 제공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의 수혜자들이고 우리는 당연히 그 먹거리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유지할 수가 있다.         
 

토저 목사님이 쓰신 “세상과 충돌하라”라는 책에는 그 “먹는 행위”와 관련된 이야기가 하나 등장한다. 목사님은 여러 해 동안 성찬식에서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성찬의 의미를 설명하는 화체설(로마 카톨릭의 견해)이나 공재설(루터의 견해), 기념설(일반적인 개신교의 견해)같은 신학적인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성찬의 의미를 어느 한 가지로 결론짓고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여 먹고 마시는 성찬이 목사님에게는 전혀 영혼이 양식이 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이 성찬에 대해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에 듣게 된다
 
“아들아! 신앙은 먹는 것이다. 네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너는 그리스도를 먹는 것이다”
 
그 후부터 성찬은 토저 목사님에게 기쁨과 감사의 잔치가 되었다. 왜냐하면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이 생명의 떡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입으로 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형의상학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논리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그리스도를 먹는 것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한 만찬에 초대받아 그리스도를 먹는(?) 행위로 감격을 누리는 것이다. 실은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말이 그 책을 읽는 순간 내게 많이 살갑게 들렸다. 
 
한 번은 어느 집에 심방을 가서 전도서 3장의 말씀을 나누다가 토저 목사님의 ‘그리스도를 먹는 것’이라는 말씀과 신학교 때 기쁨으로 먹던 ‘그 음식’을 생각나게 하는 구절을 전했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전 3:13-14).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무엇으로 행복해지는 지를 알려준다. 행복이란 먹고 마시고 일하는 일상적인 것들에 그 뿌리를 둔다. 특별히 잠언이 말하는 행복 요건인 먹고 마시는 행위가 궁극적으로는 생명의 떡 되신 예수를 먹고 생명의 물 되신 예수의 피를 마시는 성찬은 아닐까?
 
실제로 성찬에 쓰였던 포도주와 빵은 당시 사람들의 일상 음식이었기에, 성도들은 매일 떡과 포도주를 대하면서 자연스럽게 예수를 먹고 마시는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한 것이다.               
 
카톨릭 교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에 하나는 성찬이다. 그들은 미사를 드릴 때마다 성찬을 미사의 중심에 둔다. 아니 미사의 순서로써 뿐만 아니라 아예 예배당 중앙에 성찬상을 둠으로써 장소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개신교는 성찬을 매번하지 않는다(교단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내가 속한 교회는 매달 첫 주를 성찬 주일로 택해 성찬을 뗀다. 실은 대부분의 개신교가 매주마다 성찬을 하지 않는 이유에는 그것보다 우선적으로 먹어야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먹으라고 했던 그 두루마리처럼 우리에게도 먹어야 할 말씀이 있다. 마치 우리 육체가 음식을 먹음으로 생명을 유지하듯이 우리의 영혼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음으로 영적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실은 말씀을 대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눈으로 보기도 하고, 귀로 듣기도 하고, 입으로 소리 내어 읽기도 하고 때로는 손으로 만지기도 한다(맹인의 경우). 그러나 역시 말씀을 대하는 최고의 방법은 먹는 방법이다. 입으로 들어간 말씀이 내 안에서 소화되어 영적 에너지로 바뀌어져 세상을 이길 힘을 제공하는 것은 먹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좋아하던 추억의 음식을 말하다가 여기까지 왔지만 예수를 먹는 것은 말씀을 먹는 것이다. 단언컨데 신앙인에게 있어서 생명의 말씀을 먹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
 
시편 기자가 언급했듯이 송이꿀보다 더 단 말씀을 먹는 것 아닌가? 하지만 한 가지만 부탁하고 싶은데 만약 당신이 말씀을 먹는 감격을 더 찐하게 느끼고 싶다면 영혼의 배가 주린 채로 말씀의 자리에 나아가라!
 
마치 신학교 때의 그 음식이 내 인생 최고의 음식으로 기억되는 이유가 배고팠기 때문이듯이, 말씀이 최고로 기억되려면 내 영혼은 말씀을 갈망하는 배고픈 상태가 되어야 한다. 말씀에 주린 배를 움켜쥐고 말씀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주일 예배로 나아가라!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예비하신 말씀의 잔치에서 당신은 배부를 것이고 당신은 완벽한 행복을 경험할 것이다. 신앙은 말씀인 그리스도를 먹는 것이다. 단순하지만 너무나도 중요한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최주호|멜번순복음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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