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의 전술-편리주의

홍관표/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9/08/27 [14:51]

세상은 점점 편리해지는 것을 발전이라고 말한다. 예전에 우리 시대에는 지도 공부를 하고 찾아가야 목적지인 교인의 집을 심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바일 폰에 주소를 입력해 놓으면 정확하게 그 목적지에 찾아간다.
 
뿐만 아니라 교회 출석할 때 구태여 무거운 성경, 찬송책을 갖고 갈 필요가 없다. 모바일 폰 하나만 포켓에 넣고 가면 된다. 이런 편리함이 우리의 삶을 편하게 해 주는 것이 사실이다. 세상은 이런 것을 발전이라고 한다.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것을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에 필자는 신앙의 편리주의가 엄청난 사탄의 공격 루트가 될 수 있음을 언급하고 싶다. 어쩌면 신앙의 편리주의는 가장 드러나지 않게, 마치 조지 바나 (J. Barna)가 말하는 "주전자 속의 개구리" (The Frog in a Kettle)처럼, 아무런 영적 감각과 의식 없이 살아가는 삶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속화에 잘 반죽된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인간으로서 삶의 편리함을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것이 영적인 부분까지 침투해서 신앙의 본질을 흐리게 만든다면 결코 용납될 수 없음을 우리 성도는 의식해야 할 것이다.
 
편리주의에 침식된 입장에서,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인 예배를 꼭 교회 가서 드려야 하느냐?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는데 그냥 집에서 편하게 인터넷으로 말씀을 듣고, 헌금은 체크로 보내면 되지 않느냐? 할 것이다.
 
나중에는 봉사의 일도 로봇이나 돈으로 고용된 사람에 의해서 감당케 할지도 모른다. 아마 조금 더 나아가면 내가 예배하는 예배당이 필요 없다고 하는 예배당 무용론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극단의 예일지 모르지만 너무나 사람이 모이지 않으니 예배당에서 유행가 가수의 쇼가 펼쳐지던지, 술과 재털이를 두고 예배하는 교회도 생기지 않을까? 정말 그렇게 되기 전에 주님이 오셔야 할 것 같은데, 들려지는 말로는 한국의 어느 대형교회는 이미 초신자를 편하게 해주기 위하여 교회당 한쪽에 재털이를 두었다고 하니 구별됨의 장소로서의 교회는 이미 무너져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 가지 마라!"
"예배 드리러 가지 마라!"
"편리하게 신앙생활 하라!"
 
이것은 결코 성령님의 음성이 아니다. 이것은 마귀의 전술임을 그 옛날 출애굽 사건에서 확연히 나타났다. 모세와 바로의 협상에서, 바로 왕의 첫 답이 무엇이었는가?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출 8:28)이다.
 
바로 왕의 대답은 마귀의 전술이다. "광야에 가지 말고 여기서 예배를 드리라"고 말한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 가지 말고 그냥 집에서 밍기적거리면서 침대 위에서 속옷차림으로 은혜 되는 목사님을 선택해서 아주 편한 자세로 설교를 듣고, 예배 드리라는 것이다. 꼭 네가 섬기는 교회 갈 필요가 있나? 사탄의 소리이다.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교회 존재 목적의 첫 번째가 예배이다. 신앙의 선배들은 예배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고 했다. 예배가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예배를 잘 못 드리는 교회는 좋은 교회가 아니다. 좋은 교회는 예배를 잘 드리는 교회이고, 좋은 그리스도인은 예배를 잘 드리는 성도이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

 
홍관표|크리스찬리뷰 편집고문, 시드니중앙장로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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