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자년(庚子年) 아침에 부르는 희망의 노래
 
양병구/크리스찬리뷰

1970년 초 양희은이라는 가수가 불렀던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는 한 편의 동요와 같으면서도 구슬픈 멜로디 전환이 일품이었다. 양희은 씨가 통기타 연주에 맞춰서 청아한 목소리로 이 노래를 부를 때 수많은 청년들이 환호했다.

 

그런데 이 노래가 인기를 끌었던 진정한 이유는 연못 속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던 붕어들이 서로 싸우다가 공멸한다는 내용의 가사가 중간 부분에서 어두운 멜로디와 어우러져 듣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의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 위에 떠오르고
  그 놈 살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연못 속에선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죠.


그런데 이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는 발표된 지 얼마되지 않아 방송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1절의 가사 내용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사람들은 작은 연못을 한민족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리고 붕어 두 마리를 남한과 북한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두 마리의 붕어가 서로 싸워서 한 마리의 붕어가 죽어서 한반도를 상징하는 작은 연못에 더 이상 물고기가 살 수 없게 된다고 이해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노래는 금지곡이 된 뒤에 오히려 그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더 많이 불려졌다. 이 노래가 나온 지 37년이 지난 2020년 새해에도 이 노래의 가사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많은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매년 올해의 사자성어를 발표하는 교수신문이 작년 2019년 한 해를 표현하는 사자성어로 몸은 하나, 머리가 두 개인 새를 가리키는 공명지조(共命之鳥)를 선정했다.  이 새의 한 머리는 낮에 일어나고 다른 머리는 밤에 일어난다고 한다. 한 머리가 항상 자신의 몸에 좋은 열매를 챙겨 먹는데 질투심을 느낀 다른 머리가 화가 난 나머지 어느 날 독이 든 열매를 몰래 먹어버렸다고 한다. 운명공동체인 두 머리는 결국 모두 죽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1천46명의 대한민국 교수들 중에서 347명(33%)의 교수들이 ‘공명지조’(共命之鳥)를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하게 된 배경에는 한국 정치인들이 서로 나뉘어 싸우는 것을 넘어 국민들까지 두 편으로 분열된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공명지조를 추천한 최재목 영남대 교수(철학과)는 “서로를 이기려고 하고 자기만 살려고 하지만 어느 한쪽이 사라지면 자기도 죽게 되는 것을 모르는 현재 한국 사회에 대한 안타까움이 들어 (이 사자성어를) 선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대한민국은 2018년 기준으로 GDP(국내 총생산) 순위에서 약 1조 6556억 달러로 세계 11위를 달성했다. 그리고 2018년 기준 1인당 GDP순위는 3만 1430만 달러로 세계 28위 수준이며 선진국을 의미하는 OECD 회원국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들의 눈에 비친 2019년 한 해 동안 대한민국의 사회는 소득 수준에 비해서 그렇게 성숙한 사회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 조국 대한민국 국민들을 살리셨다. 그때에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하나님을 알지도, 믿지도 못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 세상의 풍조와 가치관을 따라서 온갖 우상을 섬기고 우상의 종 노릇하는 비참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에 선교사들을 보내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셨다. 그리고 우리 조국이 절체절명의 어려운 상황에 처했던 일제 강점기에 아직은 소수였지만 어두운 하늘에 영롱하게 빛나는 샛별과 같은 기독교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셨다.

 

비록 적은 인원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기독교인들이 그 사회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기독교인들을 그렇게 인정해 주었다. 비록 소수의 기독교인들이었지만 그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사회에 복음의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 당시 적은 수의 기독교인들이 사회를 걱정했다. 지금에 비해서 초라해 보였지만, 당시의 교회는 힘들고 어두운 사회에 복음을 밝히는 등불이었다. 그래서 예수 믿지 않은 사람들도 기독교인들을 존경했다.

 

하나님을 모르고 교회에 가지 않았던 그들도 최소한 교회는 좋은 단체라는 생각을 하고 교회에 대해서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비해서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아지고, 당시 기독교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화려한 모습으로 단장된 교회당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졌는데도, 오늘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은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보다는 비웃음을 받고 사회가 기독교인들과 교회를 걱정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처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기독교인들이 복음의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까?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사회에 복음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 것과 그 덕목들을 이야기한다. 그 덕목들 중에서 첫 번째가 겸손이다.

 

이 겸손(타페이노프로쉬네)은 자신을 낮추고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 자세를 가리키는 말이다. 원래 겸손(타페이노프로쉬네)이라는 단어는 ‘굽신거리며 복종하는 노예의 모습’을 나타낼 때 사용하던 말이다. 그러므로 헬라인들은 겸손을 덕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어 종의 형태로 성육신하시고 죄로 더러워진 인간을 섬기는 모범을 보여주심으로(빌 2:3-8), 겸손은 기독교의 중요한 미덕이 되었다. 두 번째 덕목은 온유(프라위테스)이다. 이 온유(프라위테스)는 친절한, 너그러운(프라위스)에서 유래된 말로 온화하고 정중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온유는 결코 연약함이 아니라, 강한 사람이 자신을 억제하고 조절함으로써 남을 부드럽게 대하고 섬기는 자세이다. 즉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성품을 뜻한다.

 

결국 겸손과 온유는 다같이 자신을 부정하는 마음이다. 세 번째 덕목은 오래 참음(마크로뛰미아)이다. 이 오래 참음(마크로뛰미아)은 긴, 먼 거리라는 뜻을 가진 마크로스와 분노를 의미하는 뛰모스의 합성어 마크로뛰모스에서 유래된 단어로, 상대의 나쁜 감정이나 노여움 혹은 잘못에 대해 응징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참는 것을 의미한다.

 

2020년 경자년(庚子年)을 맞이한 호주 한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어 종의 모습으로 죄인들인 우리들을 섬기셨던 것처럼 겸손하게 살 수 있다면, 호주 한인 그리스도인들이 주위에 있는 이웃을 그가 가진 학력, 돈, 지위, 옷차림과 상관없이 나보다 나은 사람으로 대할 수 있다면, 호주 한인 그리스도인들이 내가 갑의 위치에 있지만 내 권리를 주장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억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드럽게 대할 수 있다면,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게 대하셨던 것처럼 오래 참을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호주 한인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고, 기독교인들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신뢰가 회복되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소망을 발견하며, 궁극적인 소망되신 주님을 만나게 되는 희망의 노래를 불러본다.〠   


양병구|골드코스트온누리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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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2/23 [11:20]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