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원짜리 에세이집

엄상익/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0/03/31 [12:04]

 

▲ 1960년대의 종로2가 거리의 모습.    

 

▲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 중인 당시 종로 거리를 운행하던 ‘전차 381호’    



이따금씩 따뜻한 햇볕이 내려쬐는 종로거리를 걷는다. 거리 곳곳에서 예전의 내 모습이 보인다. 중학생 교복을 입은 내가 종로2가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인사동 골목 저쪽에 있는 학교로 가고 있다.
 
동대문을 지날 때면 그 옆의 하얀 레일 위를 누비듯 스르르 미끄러지던 파란 몸체에 노란 전차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홀로, 천천히, 자유롭게 걷고 있다.
 
세월에 쫓기다가 육십대 중반 넘은 나이를 먹은 이제야 세상이 조금 보이는 것 같다. 도심의 하늘 위에 유유히 떠있는 구름도 보이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걱정을 가득 담은 채 초조한 표정으로 길을 재촉하는 젊은 사람들의 가고 있다.
 
나도 그랬다. 그렇게 바삐바삐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 관운장을 모신 동묘 옆 벼룩시장 근처까지 왔다. 서민들의 동네다.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거리 귀퉁이의 낡은 단층 벽돌건물 모퉁이의 한적한 찐빵집이 보인다. 한 평 정도의 박스 같은 공간 귀퉁이에 놓인 의자에 칠십 대쯤의 남자가 항상 정물같이 앉아 선반위에 놓인 낡은 텔레비전 화면에 무심히 시선을 향하고 있다.
 
오전에 하루에 팔 만큼의 반죽을 만들어 찐빵을 빚고 나머지는 적막한 그 공간 안에서 지내는 것 같다. 진빵 장사가 아니라 방에 갇혀 무문관 수행을 하는 승려 같은 느낌이 든다.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는 해탈한 듯한 얼굴이다.
 
어린 시절 단오날이면 동묘 안에서 그네뛰기 시합이 벌어지곤 했다. 그네를 타고 하늘 높이 오르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섬찟했다.

▲ 동춘서커스 홍보물    


그 길 건너편의 넓은 터에는 동춘 서커스단이 천막을 치고 공연을 하곤 했다. 울긋불긋한 천막이 쳐진 입구에서 불어 제끼는 섹소폰과 트럼펫 소리에 홀려 구경을 하던 꼬마인 내가 거기 서 있는 것 같다. 나는 벼룩시장 안으로 들어간다. 가난하지만 활기찬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지하철 입구 근처에서 한 남자가 발을 구르고 소리를 치며 이천 원짜리 여성용 꽃팬티를 팔고 있다. 벼룩시장 입구 쪽의 중고서점 앞 좌판과 옆의 흙바닥 위에는 낡은 책들이 쓰레기 더미처럼 수북이 쌓여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노랗게 찌들고 삭아 바스러지는 책들이 죽지 않고 그곳에서 자기 임자를 기다리고 있다가 인연을 따라가는 것 같다.
 
그 좌판에서 김홍섭 법관의 수상집도 만났고 소년시절의 이광수도 봤다. 오늘은 33년 전에 나온 미우라 아야코의 에세이집이 자기를 사달라고 눈에 들어왔다.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헌책방 주인에게 건네고 그 책을 배낭에 집어넣었다.
 
며칠이 흐른 후 구석에 팽개쳐 두었던 그 책을 한 밤중에 펼쳤다. 납 활자로 찍은 글씨들이 작은 개미같이 책장 위로 기어가고 있었다. 오래 전에 죽은 미우라 아야코 씨는 아직도 책 안에서 시골 마을에서 작은 잡화점 구석에 앉아 틈틈이 원고지의 칸들을 메꾸고 있었다.
 
논 가운데 홀로 있던 잡화점 주변이 개발되면서 미장원, 이발소, 공중목욕탕이 들어서는 중이었다. 입지조건이 좋은 버스정류장 앞에 새 잡화점이 들어섰다. 퇴근을 한 남편이 가게를 보는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앞으로는 물건을 조금씩만 들여놔요”
 
“왜요? 물건을 다양하게 더 들여놓지 않으면 손님들이 새로 생긴 가게로 갈 텐데”
 
그녀는 새로 생긴 잡화점이 마음에 걸렸다.
 
“저쪽은 키우는 아이가 있으니까 가게가 잘 되야 해, 우리는 부부만 단촐하게 살고 내가 월급을 받으니까 먹고 살 수 있단 말이야. 그렇게 하는 게 좋아요. 되도록 저쪽 가게에 물건이 다양하니까 그곳으로 가보세요 하는 거야”
 
그녀는 남편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원래 그런 남편이었다. 오랫동안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는 그녀와 결혼한 천사였다.
 
‘그렇게 했다가는 우리는 문을 닫게 될 텐데’
 
납득이 되지 않는 그녀에게 결혼식장에서 주례가 하던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는 성경을 인용한 말이 떠올랐다. 성경은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호숫가에서 예수가 밤새 허탕을 친 베드로에게 다른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했다. 어부인 베드로는 물때와 고기가 많은 곳을 아는 전문가였다. 당연히 거절할 텐데도 목수인 예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그녀는 납득이 되든 말든 남편의 말을 따라 보기로 했다. 손님들의 불평을 들으면서도 물건을 들여놓는 일을 줄였다. 점점 가게를 찾는 손님의 발길이 줄어들었다. 가게 문을 닫아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 무렵 그녀가 쓴 소설 ‘빙점’이 입선됐다. 그는 대작가로서의 길이 열린 것이다. 작가는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가게 문을 닫을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이 책임지고 나아갈 더 좋은 길을 마련해 주셨다고 말하고 있다. 믿음이란 이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리란 논리에 맞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그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작가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천 원짜리 낡은 에세이집의 작은 글에서 나는 보석같이 소중한 것을 얻는다.〠


엄상익|변호사, 본지 한국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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