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6월과 성령강림

양병구/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0/05/27 [14:52]

 

이태원 클럽 방문자들의 불통

 

성공적인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에 대한 방역으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완화했던 한국에서 2차 확산사태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지난 4월 24일부터 5월 6일까지 이태원 클럽을 방문한 사람들 중에서 확진자가 100명에 이르자, 중대본은 여러 가지 조치를 발표하면서 적극적으로 검사에 임해주기를 촉구했다. 이제까지의 임상경험에 따르면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초기 대응이 중요하다.

 

하지만 서울시는 지난 4월 24일부터 5월 6일까지 5개 클럽을 방문했던 사람들의 명단에 있는 5천517명 중에 2천45명과는 통화가 되었지만, 3천112명과는 연락 불통 상태라고 밝혔다. 이들 3천112명은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거나, 전화번호를 허위로 기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서울시의 설명이다.

 

우리 모두의 불통

 

이런 불통의 현상은 단지 이태원 클럽을 방문했던 사람들만의 일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도처에 가득하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애써 그런 사실이 없는 것처럼 위장하거나 무시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특히 우리 조국 대한민국의 6월은 불통의 진수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면서 살아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예컨대 5.18을 광주 민주화운동이라고도 부르는 사람들과 5.18 광주 사태라고 부르는 사람들 사이의 첨예한 의견대립이 그 좋은 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멀리 가지 않아도 조국 대한민국을 떠나 호주에서 이민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디아스포라 한인들과 유학생 비자나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호주에 와서 일하면서 공부하고 있는 청년들은 일상에서 그 불통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호주에서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는 교민들 간에도 불통인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더 나아가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부모와 자녀, 어른들과 젊은이들, 성도들과 성도들, 그리고 심지어는 목회자와 성도들 간에도 많은 불통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바벨탑 사건, 불통의 전형적인 예

 

우리는 이러한 불통의 전형적인 예를 바벨탑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창 11:1-9). 인간은 하늘에까지 닿을 정도로 높은 탑을 쌓아 인간의 이름을 내려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벨탑을 쌓는 것을 인간의 교만으로 여기고 교만을 심판하기 위해 바벨탑 쌓는 것을 막으셨다. 도대체 바벨탑이 무엇이기에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는 일이 인간의 이름을 내는 것이 되고, 바벨탑을 높이 쌓아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려고 생각했을까?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은 창세기 6장에 기록된 노아 홍수 심판 이후의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모님이나 믿음의 선배들로부터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죄를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다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다시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실 것을 대비해서, 어떤 홍수에도 잠기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대피할 수 있는 높은 장소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했던 장소가 바로 바벨탑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하늘까지 닿는 높은 바벨탑을 쌓았다. 하나님께서는 높은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만드셨다. 그 결과 사람들은 하나님과 불통하고 성도들과 불통하며 이웃들과도 불통하게 되었다.

 

바벨탑을 쌓은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잘못이었을까?

 

그런데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은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잘못이었을까? 또 다시 홍수 심판이 반복될 때 흩어짐을 면할 수 있도록 하늘에까지 닿는 높은 탑을 쌓겠다는 사람들의 생각에 문제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후에 세상이 죄로 가득해지고 인간의 생각이 악하다 할지라도 그 죄 때문에 다시는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언약의 증표로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셨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은 것은 바로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않은 불신의 죄였다.

 

사람들은 탑만 쌓은 것이 아니라 성과 탑을 건설했다(창 11:4) 그런 관점에서 보면 바벨의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세운 것을 지키고 빼앗기지 않기 위해 살아가는 이 세상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세상은 끊임없이 바벨탑을 쌓음으로 하나님과의 불통, 성도들과의 불통, 이웃들과의 불통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불통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소통의 은혜를 주셨다. 그것은 다음 아닌 오순절에 임하셨던 성령강림 사건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진정한 소통의 시작

 

오순절과 관련한 유대 관습 중에 흥미로운 것은 신명기 31장 9-13절에 근거해서 이스라엘백성들은 토라, 즉 모세오경을 3년에 한 번 읽을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첫해 오순절에 유대인이 낭독한 창세기 11장의 내용은 바벨탑 사건이었다.

 

유대인들은 첫해 오순절에 바벨탑의 죄로 인해서 민족 간의 분단과 분열이 발생한 사건을 되뇌었다. 언어가 나눠지는 것은 사람들 간의 소통이 어려워지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절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사람들이 서로 공감하기가 어려워져서 서로 간의 관계에서 적대의식이 발생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바벨탑의 본문 창세기 11장 1-9절이 담고 있는 신학적 함의는 ‘죄로 인한 분열과 분단, 그리고 단절’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해서 마가의 다락방으로 알려진 장소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오순절이 이르자 하늘로부터 홀연히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그들이 앉은 온 집안에 가득했다. 동시에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이고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했다.

 

이와 같이 그들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천하 각국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신들의 방언으로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성령이 임하자 서로 다른 언어가 통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핵심은 성령께서 오셔서 바벨탑에서 시작된 불통의 저주를 끊어버리셨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사람은 언어가 통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글을 마치면서

 

성령이 임하시면 필연적으로 성령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성령의 사람들은 분단의 극복, 불통과 분쟁의 종식, 보다 높은 기준의 윤리 공동체가 오는 꿈을 꾸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은 그 꿈을 위해 몸부림친다. 그런 점에서 통일과 인권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자 목표이고 꿈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실 때 일어나는 가장 큰 변화는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주민들의 갑질에 자살로 내몰린 경비원, 가난한 이웃, 의지할 데 없는 노인, 여성과 어린이들, 북한과 난민을 비롯해서 이 땅에 기반이 없어서 가난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모든 사회적 약자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들로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성령충만 받았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6월에는 우리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갈망하자.

 

양병구|골드코스트온누리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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