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가의 특징

엄상익/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0/12/29 [14:46]

▲ 경주 최부잣집 종택 전경    ©경주 최부잣집     


경주의 최 부잣집과 함께 조선말 쌍벽을 이루던 명문가인 고창의 김 씨가의 예전 땅들을 그 후손인 낫소 그룹의 김병진 회장과 함께 돌면서 그 집안의 역사를 살필 기회가 있었다.

 

명문가의 명당을 살펴 본 후 다음은 그 집안 조상들삶의 흔적을 알아보았었다. 그게 이천팔 년 오월 말경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 무렵이니까 벌써 십이 년 전이었다. 고창 부자 김 씨가의 땅은 전라도 오십삼 개 군에 걸친 방대한 지역에 걸쳐 있었다.

 

명분가의 부는 아직도 삼양사 그룹과 경성방직 그리고 동아일보와 고려대학으로 계속되고 있었다. 토지개혁으로 몰수된 땅을 제외하고도 염전이나 임야가 엄청나게 보존되고 있는 것 같았다.

 

김 회장과 나는 그 집안의 지역 관리인이 운전하는 짚차를 타고 그 집안 소유였던 땅을 돌고 있었다.

 

“조선 최고의 부자이고 명문가 자손으로 살아온 감상이 어때?”

 

내가 친구 김 회장에게 물었다.

 

“나뿐만 아니고 우리 집안의 남자들은 남들이 그래서 그런가 보다 하지 개인적으로는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어. 고조부나 증조부 조부 모두 무서울 정도로 검약하시던 분이야.

 

고조모인 정 씨 할머니는 장작 한 개피를 아끼느라고 얼음이 얼어붙는 방에서 베를 짜서 논을 한 마지기씩 사 모았던 분이지. 아들인 증조부는 그때 조선 최고 부자소리를 들으면서 어린 손자들이 보는 앞에서 수채구녁에 떨어진 밥알을 주워서 물에 씻어 직접 드신 분이야.

 

본을 보이신 거지. 한국인 최초로 재벌 회장이 되신 조부는 식사 때 세 가지 반찬만 하라고 지시하고 절대 반찬이 남으면 안 된다고 했어. 그 명령에 따르느라 우리 집사람부터 며느리들이 고생했지.”

 

그 집안을 연구한 논문들이 여럿 있었다. 한국의 농학자들이나 미국의 학자들은 그들을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시조라고 평가했다.

 

“명문가를 상징할 수 있는 또 다른 집안의 특징이 있다면 말해봐.”

 

내가 물었다.

 

“우리 집안에서 어떤 아들도 병역 면제를 받은 남자는 없어. 6.25 전쟁 때 할아버지는 아들들이 빨치산이나 공산당과 싸우게 했어. 부자집 아들이라고 뒤로 빼돌리지 않았지.

 

숙부 중에는 군대에 졸병으로 가서 몽둥이로 얻어맞는 기합을 받다가 머리를 다쳐 불구가 되신 분도 있어. 네가 알다시피 나도 대학 일 학년을 마치고 졸병으로 군대를 갔잖아? 그때만 해도 저녁이면 구타가 없는 날이 없을 정도였어. 몇 대 맞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았지.

 

학력이 없고 가난하게 살다가 온 고참 사병이 하나 있었는데 환경 때문인지 못된 성격탓인지 그 친구한테 엄청 맞았지. 그렇게 군대생활을 꼬박 삼 년 했어. 사실 그 무렵 밥술이나 조금 먹거나 행세하는 집안은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았어. 엄 변호사 자네도 같은 세대니까 잘 알잖아?”

 

“맞아. 나는 가난하고 힘없는 집안이니까 병으로 아팠어도 그 사정을 인정받지 못한 채 그냥 군에 끌려갔지. 조선시대부터 아들 귀하기는 양반이나 상놈이나 마찬가진데 군에는 상놈집 자식만 간다는 소리가 있었지.”

 

나의 씁쓸한 추억이었다. 그 당시 그 재벌가에서 자식들을 군대에 졸병으로 보낸다는 것은 논리상으로는 당연하지만 실제로는 대단한 일이었다. 부자가 그렇게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차창 밖으로 녹색의 물이 찰랑찰랑 기슭을 핥고 있는 호수가 보였다.

 

“차를 세우고 잠깐 여기를 보고 가자.”

 

김 회장이 그렇게 말하고 호숫가에 차를 세웠다. 우리는 차에서 내렸다. 김 회장이 호수의 수면을 보면서 말했다.

 

“이건 호수가 아니라 우리 고조할머니가 온 부락 사람을 합치게 해서 만든 저수지야. 고조할머니가 이 저수지를 만드는 바람에 이 일대에 넓은 평야가 조성이 되고 다 논으로 만든 거지. 이 끝없는 들판이랑 산이랑 다 우리 집안의 전답이었지.”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마치 신화 속에라도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자료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 명문가의 특징은 권력을 이용한 수탈이 아니라는 데 장점이 있었다.

 

물론 당시의 일반적 기준보다 저렴하게 지대를 받았지만 현대의 시각에서는 그게 높을 수도 있다. 그 집안을 연구한 미국의 학자 에거트는 상대평가를 하지 않고 지대를 받은 점을 논문 속에서 꼬집기도 했다. 친구 김 회장이 이런 말을 했다.

 

“자네는 모르겠지만 세상에서 부자고 명문가라는 집안의 자손이 사람들을 대하면서 느끼는 독특한 감정이 있어 그걸 한번 들어볼래?”

 

그의 얘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엄상익|변호사, 본지 한국지사장

▲ 엄상익     © 크리스찬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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