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장교로 전방 사단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육군본부 검찰부에서 출두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육군본부로 갔다. 평소에 업무로 드나들던 곳이었다.
그런데 나는 갑자기 조사실로 끌려가 피의자가 되었다. 앞에는 대위 계급장을 단 검찰관이 앉아 있고 그 옆에는 안면이 있는 검찰관 신 중령이 싸늘한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 중령이 나를 보고 입을 열었다.
“엄 대위. 보안사령부에서 정식으로 자네에 대한 비리 통보를 해왔어. 보안사령부의 통보면 우리는 수사를 해서 그 정보대로 따라야 하는 입장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지?”
순간 나는 거미줄에 걸린 무기력한 한 마리의 벌레 같은 운명이 된 걸 깨달았다. 팔십 년대 초인 그 당시 보안사령부는 절대적인 권력기관이었다. 거기서 내가 비리가 있다고 찍었으면 나는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장교로서의 나의 운명은 끝난 것 같았다. 경력에 얼룩이 져 진급을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육군교도소에 갈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내가 어떤 비리를 저질렀다는 겁니까?”
내가 조사하는 그들에게 물었다.
“직접 돈을 받고 사건을 무마시켜줬다는 보안사령부의 정보야.”
그 말을 들으니까 한 사건이 기억에 떠올랐다. 육군본부에 있는 한 법무장교가 내가 맡고있는 폭행 사건의 피의자를 봐달라고 청탁을 했다.
별 내용이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온 사병 한 명이 다른 병사와 싸움을 하고 약간 다치게 한 것이다. 합의만 되면 관대한 처분을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소개를 받고 나를 찾아온 가해자인 사병의 아버지는 군대라 그런지 도무지 피해자측을 만날 수 없다고 호소했다. 거기서 나의 실수가 있었다. 가해자의 아버지를 딱하게 생각하고 내가 직접 돈을 받아 피해자의 가족을 불러 전달했다.
나는 합의서까지 대신 만들어 주고 사건을 종료했다. 내가 뇌물범으로 오해를 받을 만했다. 앞뒤 사정을 다 빼고 올라간 첩보 같았다. 나는 일단 사실대로 정직하게 말했다.
“그런 유치한 변명을 하지 말고 그냥 인정하고 끝을 내지 그래 엄 대위. 같은 선수끼리 왜 그래?”
장교 선배인 신 중령은 이미 내가 뇌물범인 것을 확신하는 눈치였다. 자기가 그랬던 것 같았다. 돈을 준 사람을 불러 그 진상을 알고 싶지도 않은 것 같았다. 보안사령부가 이첩한 정보 내용대로 빨리 수사를 종결짓고 싶어했다.
나는 내게 사건을 청탁한 육군본부의 장교가 말해주면 진실이 드러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내가 조사를 받다가 잠시 쉴 때였다. 내게 처음에 사건을 청탁한 장교가 조용히 내게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였다.
“나를 이 사건 수사에 관여시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청탁했다는 사실을 절대로 말하지 말아줘요. 보안사령부에서 이첩된 정보라 내 신상에 지장이 생길 수 있어요.”
그는 출세길이 넓게 틔여 있는 유망주였다. 일찍 고시에 붙은 그는 부유한 고관집 아들이었다. 나같이 하는 수 없이 들어온 장기 직업장교와는 신분이 다른 귀족으로 대우받고 있었다. 나와는 다만 군사훈련을 같이 받았을 뿐이다.
깊은 우물 속에 빠진 것같이 참 막연했다. 파멸이 눈 앞에 다가와 있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조사담당인 검찰관이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내게 이렇게 속삭였다.
“나는 네가 뇌물을 받지 않았다는 걸 알아. 지금 너 대신 네 진술서를 직접 타이핑하고 있어. 내가 장군들이나 보안사령부를 설득해서 너를 살려낼게 걱정마.”
암흑 속에 있는 내게 그가 밧줄을 내려주었다. 장인이 법무장관이었던 그는 역시 일찍 고시에 붙고 곧 제대해서 검사로 승승장구할 유망주였다. 같은 내무반에서 네 달을 같이 훈련받으면서 생활했던 그는 나를 믿어주었다.
나는 가슴 벅찬 고마움을 느꼈다. 이런 사람이 참된 친구라고 생각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이런 친구를 주셨음을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 덕분에 나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나를 구해줬던 그가 오십 대의 나이로 비교적 일찍 죽었을 때였다.
나는 화장장에 따라가 그가 불타는 소각로 앞에 혼자 서 있었다. 하늘나라로 가는 그의 마지막 유일한 친구가 되고 싶고 그렇게 떠나는 그를 전송하고 싶었다. 그는 지금 묘지에서 영원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
엄상익|변호사, 본지 한국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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