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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묵던 바닷가 실버타운에는 미국 이민생활에서 다시 돌아온 노인 부부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이민 생활의 수기를 써서 내게 봐달라고 하는 분도 있었다.
삶의 흔적을 수필이나 단편소설로 남겨보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런 글을 하나 보고 잔잔한 감동을 받았던 적이 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1976년 미국으로 이민을 간 한 여성은 몇십년 동안 코리아타운에서 싸구려 국밥을 팔며 살았다. 칠 십을 넘기자 어느 날 그녀에게 암이라는 죽음의 초대장이 날아왔다.
그녀는 갑자기 허무해졌다. 국을 끓이는 솥이 있는 작은 주방과 그 옆에 있는 쪽잠을 자는 골방을 평생 벗어나 보지 못한 삶이었다. 그녀는 남은 시간을 하고 싶은걸 해보기로 했다.
국밥을 팔아 사 둔 집이 있었다. 그 집에서 살아 보고 싶었다. 리모델링을 하고 그 집에 들어갔다. 생전 처음 넓직하고 깨끗한 방에서 자보았다. 좋은 옷을 입어보고 싶었다. 몇십 년 동안을 한국에서 수입한 싸구려 옷만을 입고 살았다.
그녀는 화려한 미국백화점에 가서 마음먹고 옷을 샀다. 다음에는 뭘하지? 그녀는 미국 사람들이 생일에 케이크를 놓고 촛불을 켜고 축하하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생일을 축하해 줄 사람이 없었다.
미국에 와서 도중에 만난 남편은 항상 술에 취해 있었다. 그와의 사이에 아이도 없었다. 남편은 일찍 죽었다. 그녀는 평생 누구의 정도 받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항상 주변을 경계하며 살았다.
넉넉하게 국밥은 줘도 절대 돈은 꿔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얼음같이 차다고 뒤에서 수근거렸다. 그녀는 교회 사람들에게 부탁해 처음으로 생일 케이크를 잘라 보았다. 눈물이 났다.
사실 쑥스러워서 말을 못하지만 그녀가 마지막으로 해보고 싶은 건 사랑이었다. 돌이켜 보니 평생 누구를 사랑해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 순간 안개처럼 그녀의 앞에 피어오르는 남자가 있었다. 국밥을 먹으러 오던 몇 살 아래의 영감이었다. 그 영감 은 말없이 더러 꽃이나 캔디를 카운터에 놓고 가곤 했다.
손님이 많이 와 일손이 딸릴 때는 대신 주문도 받아주고 설거지도 해주었다. 상처가 많았던 그녀는 경계하면서 마음 문을 열지 않았다. 그 영감이 뜬금없이 생각이 나는 것이다.
그녀는 단골 손님 중 그와 같이 오던 사람에게 소식을 물어보았다. 그가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서 지낸다는 대답이었다. 그녀는 그 영감이 있다는 요양원으로 찾아갔다. 치매라고 하는데도 그는 단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감사해요”라고 했다. 그 다음부터 그녀는 매주 음식을 푸짐하게 만들어 요양원에 있는 그에게 찾아갔다. 칠십 대의 그 나이에도 피가 뜨거워지고 삶에 활기가 도는 것 같았다. 그동안은 황량한 들판에 혼자 서 있는 물기 없는 바짝 마른 나무 같은 느낌이었다.
더 이상 그렇지 않았다. 갑자기 살고 싶어졌다. 항암치료도 수술도 받고 싶었다. 그러나 죽음의 천사가 한 발짝 더 다가와 ‘이제 갈 시간이 됐어’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죽음은 연기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집과 가게를 팔았다. 단골손님의 권유로 들었던 보험금도 받았다. 그녀는 그 돈을 그 영감이 있는 요양원에 기부하고 그 요양원의 호스피스 병동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주변의 혼자 앓으며 죽어 가는 노인들에게 가지고 있던 남은 돈을 조금씩 나누어 주 었다.
마음이 후련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의 어느 날이었다. 그녀는 평생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던 금반지를 꺼내 보았다. 친정 어머니가 가난 속에서도 팔지 않고 간직했다가 딸인 그녀에게 준 반지였다.
그녀에게 평생 용기와 희망을 주던 반지였다. 그녀는 그 반지마저 자기를 돌보아 주던 사람에게 주었다. 글은 거기서 끝나고 있었다. 인생은 그런 것 같았다. 일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다가 어느 날 힘이 빠져 죽는 것이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수십 년 살다가 돌아온 노부부들 의 삶이 비슷했다.
실버타운에서 만났던 미국의 이민 경험을 글로 쓰던 할머니가 바닷가 마을로 이사 온 나의 집을 찾아왔다.
그 할머니는 멀리 이사를 간다고 하면서 이생에서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아 인사를 하 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평생 쓰지 않고 아껴 두었던 은수저 셋트를 내게 선물로 주었다.
은수저를 주는 마음과 미국의 호스피스 병동에서 금반지를 주는 할머니의 마음이 같은 것 이 아닐까.〠
엄상익 변호사, 본지 한국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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