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선교 사역을 하다가 한국을 방문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일산에서 택시를 탄 적이 있었다. 앞자리에 앉아서 전면 유리에 붙은 교회 스티커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기사님께 어느 교회를 다니시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뜻밖에도 요즘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조심스레 그 이유를 묻자 자신이 지금 ‘시험에 들었다’며 그 사연을 담담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자신이 출석하던 교회에 유명한 연예인이 간증하러 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연예인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 서는 대신 일반 행사에 갔다면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었을 텐데 그것을 포기하고 이 자리에 왔다."
아마도 그 연예인은 하나님을 만난 기쁨이 세상의 어떤 경제적 이득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나름의 재치로 표현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연예인의 재치있는 입담이 택시 기사의 마음에 깊은 시험의 가시가 되어 박힌 것이다.
그분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참 별것 아닌 것 같은 말 한마디에도 마음은 쉽게 허물어지고 시험에 든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실제로 목회를 하면서 내가 만난 그 많은 성도들은 대단한 진리 문제로 인해 시험에 들기보다는 이처럼 정말 별 것 아닌 사소한 말과 거슬리는 태도 때문에 예배로 가는 걸음을 멈추고 교회를 방학했다.
나는 그 택시 기사님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축복의 자리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 사단의 집요한 목적입니다. 그런데 지금 기사님의 삶에서 사단의 그 목적이 아주 정확하게 달성되고 말았네요.”
요한복음 10장 10절은 내가 평소 요한복음의 ‘쌍십절’이라 부르며 아끼는 구절인데 바로 그 순간 떠올랐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사단은 이미 기사님의 마음속에서 평안과 축복을 교묘히 도둑질해 간 상태였다. 나는 신앙의 고백을 담아 복음을 전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기사님은 내 직업을 물었다. 당시 선교사였던 나는 선교사라고 대답했더니 택시 기사는 나에게 택시 요금을 한사코 받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하지만 택시 기사에게 억지로 요금을 쥐여주고 내렸는데택시 기사는 갑자기 차를 세워놓은 채로 운전석에서 나와 길까지 나를 따라왔다. 나는 잠시 멈춰서 나를 따라온 택시 기사에게 물었다.
“제가 혹시 형제님을 위해 잠시 기도해 드려도 될까요?”
그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탁 트인 대로변에서 기사님을 위해 간절히 손을 모았다. 기도가 끝나자 그는 힘찬 “아멘”과 함께 그는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멀어지는 택시의 뒷모습을 보면서 내 마음에도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벅찬 감사가 차 올랐다.
목회자로서 사역하며 가장 마음이 무거운 일은 시험에 든 성도를 찾아가는 일이다. 나는 평소 신학교의 실천신학 과정에 ‘시험 든 성도를 찾아가 회복시키는 실제적 과정’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곤 한다. 사단이 개발한 기상천외한 유혹 앞에 얼마나 많은 성도가 쓰러지고 있는지, 그로 인해 교회가 입는 영적 손실이 얼마나 막대한지를 예비 목회자들이 뼈아프게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은 뱀을 일컬어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 가장 간교하더라”고 묘사한다. 이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다. 간교한 사단은 성도를 흔들 수만 가지 전략을 품고 있다. 그 유혹은 문화와 언어, 인종적 배경을 가리지 않고 치밀하게 파고든다.
특히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호주 대륙의 다문화적 환경은 사단이 맞춤형 덫을 놓기에 좋은 토양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현대 기술의 속도만큼이나 사단의 기술도 진화했다. SNS를 통한 비교 의식이나 미디어의 왜곡된 가치관은 우리 영혼을 소리 없이 갉아먹는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시험 때문에 교회와 거리를 둔 이들을 수없이 만난다. 신기한 점은 그들의 사연을 듣다 보면 “아, 그래서 멈추셨군요”라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듯, 이유 없는 시험도 없다.
그들의 아픔과 상처에는 저마다의 정당한 맥락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적인 공감에만 머물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결국 시험이란 사단이 쳐놓은 올무에 걸려 하나님을 멀리한 것이고, 그에 따르는 영적인 손해는 고스란히 자신의 몫이 되기 때문이다.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상대가 백 번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시험에 들어 은혜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순간 내 영혼은 꺾어진 꽃처럼 메말라지고 만다. 누가 뭐래도 가장 큰 손해는 내가 보는 셈인데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 “악에서 구원하옵소서”라는 간절한 호소가 포함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들은 교회를 떠나는 것과 신앙을 버리는 것이 별개라고 말한다. 이른바 ‘가나안 성도’의 논리이고 요즘으로 말하면 “온라인 성도”의 논리다. 하지만 단언컨대, 교회라는 공동체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건강한 신앙 생활을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알려주고 싶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는 주님의 약속은, 구원받은 한 영혼이 공동체 안에서 비로소 온전해진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하신 말씀이다. 인간은 섬에 고립된 채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며 살아가는 존재다.
그래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이름도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의 임마누엘이지 않은가? 예수님이 승천하시며 약속하신 ‘함께’의 신비는 하나님과 나 사이뿐만 아니라, 믿음의 형제자매 사이에도 흐른다. 우리는 서로 손에 손을 잡고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공동체적 순례자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이 땅에 시험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사단의 시험은 더 정교해지고 날카로워지고 강력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는 주님의 권고는 오늘날 우리가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생존 전략을 위한 말씀이 된다. 부디 우리가 넘어진 그 자리가 사단의 승리의 자리가 되지 않도록, 다시금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기도한다. 샬롬~〠
최주호|멜번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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