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회>여성안수 어떻게 봐야 하나?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09/04/30 [14:46]
▲ 케빈 자일스 목사     ©크리스찬리뷰
하나님이 주신 여성의 지도력 - 결론

 
그렇다면 창조 때부터 주어진 근본적인 성적 평등을 신약성경은 이상으로 설명하고 있는가? 이 문제도 우리가 어디에서 보는가가 중요하다. 이 질문의 답은 (바울의 서신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가부장제도가 널리 퍼진 당시 사회분위기와는 달리, 예수님은 여성의 예속을 지지하지 않으셨고 여성의 예속에 대해 도리어 의문을 제기하는 행동을 취하셨다.
 
예수님은 남성의 '머리됨', 여성의 예속 혹은 남녀의 다른 '역할'에 대해 단 한 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다. 예수님께서 현대적 의미의 여성해방운동가는 아니셨지만 남녀가 나란히 서서 동등한 위엄을 가지고 예수님과 서로를 섬길 동등한 자유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셨음이 틀림없다. 지금부터는 예수님의 여성에 대한 관점을 나타내는 주요내용들에 주목해 볼 차례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마19:3)라고 물었다. 율법에 나오는 이혼법은 남성의 권익을 중심으로 나와있었지만, 예수님은 이보다는 오히려 창조질서(창1:28)에 주목하시며 결혼을 남녀 모두에게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강조하셨다.
 
남성에게 (당시 당연히 여겨지던) 특권을 허용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물론 그 반대 모습도 나타난다. 예수님이 마리아의 집에 들어가셨을때 마리아는 남자의 '역할'을 하며 예수님 발 옆에 앉아 가르침을 들었고 그동안 마르다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이었던 부엌일을 하고 있었다(눅10:38-42).
 
마르다는 곧 화를 내며 마리아가 자신을 도와 부엌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부엌일에 정신이 팔려있는 마르다를 꾸중하시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려는 선택을 한 마리아를 칭찬하신 것이다.
 
한 번은 예수님은 연못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깊은 신학이야기를 하기도 하셨다. 그녀가 자기 동네로 돌아가 남자들을 가르쳐 신앙의 길로 이끈 것에 대해, 복음서는 단 한 마디의 비판도 보이고 있지 않다. 반대로 많은 인파 가운데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하니,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눅11:27-28)라고 답하신다. 어머니가 되는 것은 숭고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가장 고귀한 부르심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 후 여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셨?겁내고 믿지않는 사도들에게 이 여자들(그리스어 apostello)을 보내셨다. (마 28:1-10, 막 16:1-8, 눅24:1-12, 요 20:1-18).
 
이러한 이야기에 반론으로 종속론자들은 예수님께서는 12명의 '남자' 사도들을 택하셨음으로 남성의 '머리됨'을 찬성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설득력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문화적 행동양식을 따르셨을 뿐이다. 예수님께서도 다른 유대인들과 같이 샌달을 신으셨고 중매결혼을 인정하셨으나 이러한 것을 우리에게 반드시 따르라고 하지 않으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택하신 12명의 사도들이 모두 남성이었다는 것은 남녀순위 문제와는 별 관련이 없는 역사적 사실에 불구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장 혁명적인 가르침 중 하나는 리더쉽인 것 같다. 너무도 혁명적이기에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제자들, 특히 우리 남성들은 그 의미를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이 세우신 공동체는 교회라는 형태로 발전하는 동안, 이런 리더쉽과 관련된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시해왔다.
 
예수님은 7번에 걸쳐 다른 단어들을 사용하셔서 제자들에게 불신자같은 논쟁 즉, 누가 우위이고 누가 권세를 부리며 누가 가장 존경받아야 하는가에 개의치 말라고 하시며, 오히려 믿는자들은 겸손히 다른이들을 섬기며(마20:26-28, 23:11, 막9:35, 10:43-45, 눅9:48, 22:7) 행동으로 선례를 보이라고(요13:4-20) 말씀하셨다. 그러나 여러 복음주의 지도자들과 목회자들이 자신의 권위를 주장할 때를 보면,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전혀 존중되고 있지 못하다.
 
같은 맥락에서 여성이 남성같이 권위를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목사도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말 이해가 안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교회 안의 리더쉽은 희생적이고 겸손히 섬기는, 남들 위에 서는 권위가 아닌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인가?

 
사도바울
 
중요한 이슈들에 관한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신학적 주장을 먼저 살펴보고, 그의 실제 행동,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회 안에 어려움이 있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 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이런 방법을 통해 지금부터 바울의 교회내 여성의 리더쉽에 대한 가르침 내용을 알아보자.

 
바울의 목회에 관한 신학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은 각각 구성원들이 공동체 전체의 신앙심 함양을 위해 쓰여지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사역은 남자든 여자든 할수 있는 것이며 회중 안에서 쓰여져야 하는 것이다(고전 12-14, 롬 12:3-8, 엡 4:11-12). 바울의 목회신학은 누가(사 2:17-18)와 베드로(벧전 4:10-11)의 목회신학과 상통한다.
 
여기서 말하는 바는 분명하다. 사도들은 성령이 남녀 모든 신자에게 내렸다고 가르친다. 신약성경의 목회론을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3명의 지도자가 모두 한 목소리로 성령이 성별의 차별없이 은사를 통해 일하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질문은 이중 가장 다작의 성경저자이자, 심오한 신약신학자로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신학을 어떻게 행동에 옮기고 있는 가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바울이 성령이 주신 리더쉽이 남녀 모두에게 주어졌다고 정말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바울의 목회신학
 
바울의 행동은 그의 신학을 반영한다. 그는 여성이 예언하는 것(고전 11:5, c.f. 사 2:17, 21:9), 여성전도자와 사역자(롬 16:6, 빌 4:3), 여성집사(롬 16:1, 딤전 2:9), 가정교회의 여성 '대표'(골 4:15, 고전 1:11, c.f. 행 12:12, 16:14-15, 40 등), 부부사역자(행 18:24-28, 롬 16:7)에 대해 긍정적으로 논한다. 그리고 마지막 용례를 통해 여성사도인 유니아(롬 16:7)를 칭찬한다.
 
그녀는 12사도 중 한 명은 아니었지만 '교회 중에 첫째로'(고전12:28, c.f. 엡4:11-12) 성령님이 세우신 다수의 선교 사도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지배적인 가부장문화에 비추어 볼 때, 여성의 리더쉽에 관한 이러한 용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바울은 가능한대로 비차별적인 사역을 행동에 옮겼던 것이다.

 
예외적인 상황에 대한 바울의 반응
 
그러나 바울은 3가지의 특별한 상황을 통해, 여성에 관련한 문제를 처리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녀들의 행위가 교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무례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처음 2가지는 이해하기 쉽다.
 
1. 고린도전서 11:3에서 첫 번째 예가 등장한다. 바울은 남녀 모두 기도와 예언으로 집회를 이끌수 있음을 전제한다. 바울의 전반적인 주장을 보면 성령이 성별에 상관없이 말씀 안에서 교회에 필요한 리더쉽과 기도를 주신다고 말한다. 바울은 예언을 매우 중요하게 취급한다. 그는 직분을 따져서 사도 뒤에, 그리고 교사 이전에 오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두 번째로 중요한 사역(고전 12:28)으로 예언을 취급한다. 이것까지도 여성이 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과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이 문제를 삼았던 것은, 집회에서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는 모습, 남자가 머리를 가리는 모습이었다. 이것이 당시 문화적 규범에 비추어 어떤 문제가 되는 것인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바울이 문제로 제기하는 것은 여성이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어떤 역할에 관한 것이 아니라 머리를 가리지 않은 문화적 무례함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다.
 
왜 여자가 머리를 가려야 하고 남자는 머리를 가리면 안되는지에 관한 바울의 논리는 복잡하며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핵심은 모임에서도 여자는 여자로 보여야 하며 남자는 남자로 보여야 한다는 것인 것 같다. 그의 논리는 성의 차이점을 강조하는 것이지, 여성의 종속성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이 단락에서 그리스어 kephale (3절)을 '다스림'으로 번역하는 것은 문맥상 맞지 않는다. 남자가 여자보다 우위에 세워졌다고 정말 의도했다면, 어떻게 곧 이어 남녀가 교회를 이끌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 말이다.
 
2. 많은 학자들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명하는(고전 14:34-35) 내용이 바울이 쓴 것이 아니며 차후에 덧붙여진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이부분이 바울이 쓴 것이라고 인정해도, 이 본문이 의도하는 바는 부인들이 교회에서 질문하는 것을 삼가하라는 점이다.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찌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임이라'(고전 14:35).
 
3.여자가 교회에서 권위를 갖거나 가르치는 것을 금하는 디모데전서 2:11-12도 특정한 상황에 주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 본 기사는 에베소서에서 발생한 거짓가르침 (1:3-7,4:1-5, 6:3)을 배경으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이러한 거짓 가르침은 남녀 모두를 실족시켰다(4:9, 딤후 3:6).
 
바울이 여기서 이제 여자가 가르치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고 명령한 것은 새로운 명령이다(딤전 2:12).
 
만약 여성이 이사건 이전에 가르치고 있지 않았다면 왜 이러한 명령을 내리겠는가? 여자들도 가르치고 있었고 이 명령 전까지 여자들도 사역에서 전혀 배제된 적이 없었다. 비차별적인 성령의 사역을 가르치고 있는 바울이 여성을 사역에서 제외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여기에 등장하는 금지사항은 예외적 상황에만 적용되는 예외적인 기준이다. 사도서신에서 나타나는 거짓가르침에 대한 많은 비판과 바울이 디모데전서 2:11-14에서 명확히 말하는 것은 바울이 왜 이러한 명령을 내렸었는지를 알려 준다. 여자들이 거짓을 가르쳤고 많은 이들이 속았다. 이 기사에서 이러한 금지사항이 왜 예외적인 것인지는 3가지로 설명된다.
 
먼저 바울은 이례적인 동사 'authentien'를 사용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단순히 권위로 번역하지만 성경에는 여기서 단 한 번 밖에 등장하지 않는 특별한 단어다. 이렇게 이례적인 단어의 사용은 바울이 말하는 상황이 이례적인 상황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약성경 시대에 이 단어는 매우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했다. 파괴적인 권위를 암시하는 단어였던 것이다.
 
두 번째로 바울이 여자들이 이렇게 파괴적인 것을 가르치면 안되는 이유로 여자들에게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먼저 기억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왜 바울이 여기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창세기2장에서 여자가 두 번째로 만들어 졌다는 기사가 여성의 예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음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도리어 바울은 당시 사람들이 가장 빨리 떠오르는 예화를 들어, 가장 설득력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을 뿐이다. 이점에서 바울은 아주 예외적인 상황에서 예외적인 금지 명령을 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보통 상황에서는 그의 전반적인 신학은 이 이런 금지 명령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도리어 바울은 자신들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가르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는 여성들에게 바울은 '상식적인' 답변으로 아담이 먼저 지어진 것을 기억하라고 도전한다. 그리고 그녀들의 현혹스러운 가르침에 대해 먼저 꼬임을 당한 사람이 하와였던 것을 기억하라고 덧붙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성이 가르치면 안되는 이유를 이 두 가지에 근거해서 말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설득력이 없다. 바울은 이 구절을 통해 타락 이전의 창조질서부터 여성이 종속되었음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창조기사에서 말하고 있지 않은 종속을 바울도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에게도 큰 다행이다.(문제가 더 복잡해지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바울의 신학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에 기초한다. 도리어 바울은 죄의 책임을 하와에게 전가하기보다는 창조기사를 통해 신학적 논쟁을 펼침으로써 바울은 아담에게 죄의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다(롬5:12).

 
머리됨
 
또 하나 다뤄져야할 문제는 여성의 영구적 예속을 믿는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머리의 역할'을 남성에게만 주셨다고 믿는 것이다. 남자가 가정과 교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우리는 배워왔다. 남성의 '머리됨'에 대해 너무나도 많이 들었기에 이 교리가 성경 매 장마다 나올 것 같이 생각 될 것이나 그렇치 않다.
 
타락 이전에 성별의 차이는 분명하지만, 본질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성경이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여성의 예속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불순종한 결과로 나타난 사건이었다. 이것은 타락된 질서를 반영한다.
 
예수님이 남성의 '머리됨'에 대해 단 한 번도 말씀하지 않으신 점도 남성우월론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바울과 (사도행전을 쓴) 누가도 교회에서 여성이 지도자가 되는 것을 원칙적으로 막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리스어 kephale은 보통 '머리'로 번역되나 남녀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단어로 쓰인 것은 성경에서 오직 두 번 뿐이다.
 
고린도 전서 11장 3절에 처음 쓰였고 전체 내용으로 보아 '다스린다'의 뜻은 배제된다. 왜 남자가 여자를 다스려야 한다고 한 뒤 회중에서 여자와 남자가 기도와 예언으로 이끄는 것을 찬성하겠는가? 전체 문맥을 보면 이 단어는 우리가 강(물줄기)의 근원을 말할 때 쓰는 'head'의 뜻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 하나님으로부터 아들이 만들어지고 아담으로 여자가 만들었다는 뜻이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칭하는 것으로 'kephale'이란 단어가 한 번 더 사용된 것은 에베소서의 5장 23절이다. 이 특정 문맥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분석의 원칙과 역사적 그리고 문학적 배경이 고려되어야 한다. 이 구절을 남성우월론에 동원하는 것은 남성의 자존심을 띄워줄 지는 몰라도, 성경을 존중하는 태도는 아니다.
 
여기서 바울의 의도는 당시의 가부장적 문화를 변혁하는 것이지, 긍정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남편들이여, 너희들이 너의 아내의 리더(머리)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리더쉽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죽음으로 자신을 희생하셨다.
 
너는 섬김의 리더여야 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아내를 사랑(아가페)하여야 하느니라'. 누가 결정권을 갖느냐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이 단락에서 결혼의 본보기는 아담과 하와가 아닌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인 것이다. 에베소서 5장 31절에서 창조기사에 호소하는 것은 타락 이전의 남편의 '머리됨'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결혼을 통해 남자와 여자가 하나됨을 가르치고 있다.
 
바울이 여기서 중요 결정은 남편이 내려야 한다 혹은 현대사회에 맞는 좀더 부드러운 표현으로 '남자가 마지막 결정표를 갖는다'고 말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 단락에서 바울은 의사 결정 과정에 관해 논하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교회를 위해 죽음으로까지 희생하신 하신 것처럼 남편들도 섬김의 리더쉽을 보여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는 것이다.
 
또 다른 이슈는 여성이 예속되어야만 남녀의 성적 차이가 지켜진다는 주장인데 이것은 상식적인 수준에서 일단 부정할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남녀의 권위와 종속문제는 전혀 다른 문제다.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바울이 노예들에게 주인에게 복종하도록 요구한 내용을 남편과 아내 관계와 같은 성질의 관계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결론
 
5회에 걸친 기고를 통해 나는 성경이 하나님께서 창조를 통해 여성과 남성에게 동일한 위엄, 리더쉽 그리고 가정에 대한 책임을 주셨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하였다. 여성의 예속은 타락된 사회의 한 부분에 불과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주장을 펼치면서 나는 성경을 창세기 1장부터, 신약은 예수님의 가르침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의 사역에 관한 가르침을 통해 전체적으로 고려하였다. 이런 방법을 사용한다면 성경의 결론은 분명하다.
 
그러나 먼저 남녀차별론을 전제한 뒤, 즉 남자가 다스리고 여자가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증빙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텍스트가 인용된다면 다른 결론이 나올 것이다. 바라기는 보다 철저한 성경적 사고를 통해 교회와 우리의 삶의 기준을 찾아가는 신앙인들이 되길 원한다.
 
 
글/케빈 자일스 (교회론 조직신학자)
번역/이승은 (크리스찬리뷰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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