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역에서 예수의 대사로

극단 미리암 초대 단장 최선자 권사

글/송기태,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0/12/03 [15:49]
국화꽃 인생

 
최선자 권사, 그는 '왕년의 스타'가 아니었다. 아니 ‘영원한 현역’이었다. 단지 때와 장소에 따라 배역이 달라지긴 하지만, 그가 있는 곳엔 여전히 드라마틱한 드라마가 실시간으로 전개된다. MBC 라디오 성우 공채 1기 생답게 그동안의 삶을 녹여내는 그의 음성은 맑고 잔잔하듯 하다가 어느새 유쾌한 재담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그와 마주 앉으니 문득 '국화 옆에서'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 한국-북한-일본 간 화해를 호소한 PPP십자가 대행진에서 간증하는 최선자 권사(2007년 8월 14일 수원 제암리교회)     ©크리스찬리뷰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이 시를 지은 미당 서정주의 주례로 결혼식을 한 이후, '국화꽃같은 인생'을 살아온 그가 시드니의 여름 명물 자카란타 꽃을 이야기했다.

"보라색 꽃이 너무너무 아름답네요. 마치 온 거리에 보라색 잉크를 부어놓은 것 같구요."

처음으로 찾은 시드니에는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리지만 알았다가 '보라색 꽃'을 하나 더 알았다고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뿐만 아니었다. 성도들이 있는 곳은 여전히 아름다운 삶의 현장이었다.

“친절한 사람들과 가족같은 분위기가 시드니를 유쾌하게 합니다. 이렇게 멋들어진 세상, 아름다운 환경 속에서 사는 분들은 다 아름다운가 봐요."

'가족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니 미운 사람, 싫은 사람이 없는 마음 표현이었다. 그의 '가족 마음'은 가장 가까운 '한 가족'을 잃으면서 '소쩍새가 그렇게 울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우는' 여정을 거쳐 숙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한 가족의 잃음'은 바로 그의 반쪽이었던 남편, 만능 문학인이었던 구석봉 씨의 처절한 투병과 소천이란 천하에 두 번 다시 체험하기 어려운 여정이었다. 남편은 1957년 자유문학에 ‘제목 붙이기 싫은 시’로 등단하여, 역사소설 ‘미리랑’을 비롯하여, 63년 동아방송 개국기념 당선작 ‘차령산맥’으로 방송계에 발을 내디뎠다. 

특히 순수문학을 방송과 연계시키는 일에 애썼고,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를 처음으로 MBC 연속방송극으로 성사시켜 2년여 간 집필하다고 했다. MBC의 ‘전설따라 삼천리’라는 프로그램을 명콤비였던 당시 고무송 PD와 함께 만들어내기도 했다.'큰 바위 얼굴'처럼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감기몸살에 맥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남편은 시, 소설, TV 드라마 등 다방면에 두각을 나타내며 하루 소주 12병, 담배 3갑을 피워도 하룻밤 자고나면 훌훌 털고 일어서던 황소처럼 타고난 건강체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소하고 조그만' 감기가 떨어지지 않는 거예요."

이들 부부는 한국 최고의 병원, 최고 명의를 찾았다. 처음엔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는 말이었다.

"일을 너무 열심히 했네요,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검사 한 번 차곡차곡 받아보세요."

좀 쉬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래서 제일 좋은 특실 독방에 입원하여 검사를 했다. 처음 입원할 때만 해도 길어야 20일 정도라고 했지만, 한달, 두달, 석달을 입원해도 좋아지기는커녕 열은 떨어지지 않고 폐기능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서울대 병원에서는 X레이에 찍힌 남편의 가슴부위 사진이 너무 이상하다며 미국의 특별연구학회에까지 필름을 보내기도 했지만 병의 원인을 찾지 못했다.

그때가 81년 동숭동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크리스티나 여왕’을 공연할 때였다. 525개나 되는 많은 대사들, 카리스마가 넘치는 스웨덴의 여왕 ‘크리스티나’의 생명을 건 갈망은 그에게 큰 도전을 줬다. 병원에서 남편을 돌보며 공연할 때가 되면 병원 뒷문으로 걸어나와 큰길 하나를 건너 바로 문예회관 대극장으로 향했다. 하루 2회의 공연을 끝내고 가끔 축하 꽃다발을 한아름 안고 다시 왔던 그 길을 되돌아 남편에게 갔다.

‘오늘은 좀 나아졌겠지. 나아졌을 거야. 남편에게 이 꽃을 선물해야지’라며 두려움 반 기대 반의 마음을 가지고 병실로 향했다. 가끔 분장도 지우지 못한 채 남편에게 달려가기도 했다.신문에선 연일 극평이 실리고 화려하게 화보가 실리는 등, 무대 위와 아래는 극대극의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어두워진 다음에 퇴원하지...

남편에게 갑자기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호흡장애가 찾아왔다. 참으로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었다. 그럴 때마다 바로 응급실로 실려가 산소호흡기를 걸어야 했다. 그런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되던 어느 날, 병원에서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를 했다.


 

▲ 가장 인자한 표정을 지어달라는 취재기자의 요청에 바로 표정 연기에 들어간 최선자 권사는 영원한 우리들의 현역 스타였다.     ©크리스찬리뷰


“숨 쉬는 모든 기관이 망가졌습니다. 이제 산소호흡기를 코에서 1분만 떼면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영원토록 이렇게 누워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살아야 할 지 모릅니다”

도무지 인정하지 못할 현실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어찌 이런 일이 나에게 있을 수 있을까?' 수없이 묻고 물은 질문이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답이 나온다 해도 남편의 병이 차도를 보일 희망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산소호흡기를 끼고 퇴원해야 한다는 병원 측의 말을 듣고 남편이 한 말이 뼈에 사무쳤다.

"여보, 어두워진 다음에 퇴원하지.."

당시의 상황을 처절하게 들려주는 그의 말을 들어보자.

"제 남편은 세상이 좁다고 활동하던 사람이었어요. 그런 사람이 아무데도 가지 못하고 링거줄에 매달려 집에서 갇혀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을 수용하려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 모습을 이웃 사람들이 볼까봐 두려웠던 같았습니다."

현실은 더 참혹했다. 천근 만근.... 모든 무거운 짐이 그녀의 어깨 위로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저는 매일의 삶이 절규였습니다. 남에게 손 한번 벌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는데, 그 좋아하던 담배와 술도 끊으며 정말 건강하게 살았는데… 그 많던 주위의 남편 친구들은 발걸음을 뚝 끊더군요. 저는 병원비 마련을 위해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습니다. ‘나를 불러주는 곳이 없을까’ 생각하며 사람들을 만나 일자리를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연기는 병원비와 생활비 마련을 위한 도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돈과 명예, 박수갈채를 받던 그 시절은 먼 옛날 얘기였습니다.의료보험도 없던 그 시절 그렇게 5년이란 시간을 누워 보내는 사이, 집, 땅, 통장 모두 바닥나고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가꾸고 일궈오며, 누리고 소유했던 모든 것들은 다 물거품이 됐습니다. 몇 년 지나니 이젠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 없고, 가진 것이 없으니 친형제도 다 모른 체 해요."

남편을 회복시키기 위한 그의 지극한 정성은 그칠 줄 몰랐다. 양약, 한약은 물론, 좋다는 각종 민간요법도 총동원했다. 사슴피, 노루피, 계란 기름 짠 것부터 염소, 개, 뱀 등 남편을 살릴 수만 있다면 뭉치돈도 아깝지 않았고, 그 어떤 혐오동물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누군가 애기 낳은 산모의 태가 좋다는 말을 듣고 그걸 구하러 산부인과 의사에게 의뢰하기도 했다.

"그게 불법인 줄 몰랐습니다. 어느 날 숨어서 기다렸다가 깡통에 받아오기도 했습니다."

결과는 백약이 무효였다. 모든 것이 끝장나는 것 같았다. 누워 있는 남편과 함께 점점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어가던 그에게 갑자기 머리가 쑤시기 시작했다. 사면팔방이 막힌 어둠 속에서 질주하는 것 같은 인생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한 사람 한 사람 새롭게 찾아와 위로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옛날에 그렇게 예수 믿으라고 권유하던 사람들, 그의 가정을 두고 중보기도한 사람들이었다.

"예수만 전할 줄 아는 사람만 우리를 찾아와 진심으로 위로했어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교회라도 가볼까'하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산소호흡기 끼고 있는 남편을 두고 갈 수는 없었지요. 그렇게 떵떵거리던 시절, 공주마마처럼 모셔가도 안나가던 저에게 그런 마음이 일어났지요."

 

자네만이라도 가보게

그러던 어느 날 남편에게서 뜻밖의 소리를 들었다.


 
▲ 예능교회 성가대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최선자 권사는 찬양 부르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다고 말한다. 사진은 시드니순복음교회 간증집회에서 찬송하는 최 권사     ©크리스찬리뷰


"나는 산소호흡기를 끼고 기침도 심하게 하니 교회 예배에 방해가 돼 가지 못하니 자네만이라도 가보게."

꺼져가는 등불처럼 힘겹게 하는 남편의 말에 용기를 얻어, 오랜 세월을 둘러서 힘겹게 교회 문턱을 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문득 교회가 그리워졌다.

“그래. 나도 한때는 교회를 다녔었지”

그는 선교사들이 세운 전주 기전여고를 다니면서도, 매일 아침 수업 전에 예배를 드리면서도, 가끔 학생들을 대표해 특송을 부르면서도 하나님이 누구신지 전혀 몰랐다고 고백했다. 그저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성경책을 들고 왔다갔다하며 예배당 자리만 지켰을 뿐이었다고 했다.

비로소 주님께 '부끄러운 두손'을 내밀었다. 방송국 동료들이 소개한 연예인교회를 낯선 손님처럼 찾아 들어갔다. 그를 본 많은 동료와 선후배들이 두손 들고 환영해 주었다. 그들을 보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렇게 포근하고 따뜻한 것을… 그동안 나는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낸 것일까. 예수님, 왜 이제야 저를 찾아주셨나요'하는 고백이 저절로 나왔다. 원망과 아쉬움, 안타까움, 설움, 그리고 절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렇게 교회에 첫 발을 내디딘 그날부터 목사님과 많은 믿음의 친구들에게 심방을 부탁했습니다. 친구들은 조를 짜가며 릴레이 금식기도를 해줬고 가끔씩 병원을 찾아와 우리 가족을 힘껏 격려했습니다.하나님 안에서 만난 친구들이 있었기에 그 고통스런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만난 예수, 교회와 교역자들은 그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어느 날 남편 방에 가보니 웬일인지 아침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울고 있었어요, 눈물 고인 눈으로 절 보더니 볼펜을 갖다 달라고 해요, 펜을 손에 쥐어주고 메모지를 제 손바닥에 올려놓았습니다. 남편은 가는 신음소리를 내며 사력을 다해 몇 자 적었어요. 종이 위에는 뚝뚝 끊어지듯 알아보기 힘들게 글씨가 쓰여 있었는데, 바로 '목사님과 전도사님이 날 위해 금식하신다고 해. 너무너무 고맙다고 전해줘'라고 쓰는 거예요. 

생각해 보니, 교회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고, 기도 한번 해본 적도 없는 남편, 전혀 돈도 벌지 않고, 살아나서 교회를 위해 무슨 좋은 일을 하거나 다시 글을 쓸 수 없는 남편, 인간으로서 존재가치가 거의 사라져가던 사람을 위해, 주의 종들이 생명을 다해 곡기를 끊고 제 남편이 예수님을 영접할 때까지 금식기도하신다는 거예요. 의식만 겨우 살아있던 남편은 그 음성을 듣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받아보지 못했던 무조건적인 그 사랑 앞에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그렇게 잘난 척하며 웃기게 굴었던 제 남편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사실에 말할 수 없는 감동이 일었습니다. 그 주님을 마음의 중심이 모신지 꼭 일주일 만에 다시 입원했습니다."

중환자실로 실려가 이제는 아예 산소호흡기로도 부족해 입을 통해 굵은 호스가 폐로 연결되어 겨우 숨쉬는 것을 도왔다. 또 코에도 2개의 호스를 집어넣어 물과 죽을 주입해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었다.언제 숨이 끊어질지 모르는 급박한 상태였다.중환자실에서 1주일 만에 기적같이 회복돼 산소호흡기만 꼽고 다시 입원실로 옮겨졌다. 남편은 그날부터 상상할 수도 없는 고백들을 매일 토해내기 시작했다.

“X레이로 내 가슴을 찍을 때면 병 상태를 찍는 것 같지가 않아. 마치 내 가슴속에 숨어있는 죄덩어리가 얼마나 새카만지 매일 그것을 찍어내고 있는 것 같아”

“오늘 몸무게를 쟀는데, 평생 지어온 죄의 중량만을 달아보는 것 같았어. 정말 죄송하더라”

“동맥검사를 위해 피를 뽑았는데 너무 고통스러워 참기가 힘들었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얼마나 아프셨을까. 나는 이제 피 뽑는 고통도 잘 참아낼거야”

남편은 이처럼 흠도 티도 없는 영혼으로 매일 거듭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병원에서는 이제 그만 준비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소식을 듣고 목사님과 전도사님이 달려오셨습니다. 두 분이 남편의 양손을 꼭 잡고 마음껏 기도해 주셨습니다. 남편은 마치 목사님의 기도소리를 자장가인양 들으며 그 심하던 기침마저 잠재우고 평강이 깃든 얼굴로 새근새근 영원한 잠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남편은 하늘의 소망을 우리 가족에게 유산으로 안겨주고는 눈물도 미움도 고통도 없는 곳으로 혼자 떠나버렸습니다. 

찬송 한 번 못부른 사람, 그렇게 작품을 많이 썼어도 감사기도문 한 장 못쓰고 천국으로 간 게 너무너무 아쉽습니다. 울음도 메말라버린 그때가 바로 1988년 1월 4일, 그의 나이 52세, 제 나이 47세였습니다."

그렇게 남편은 지옥을 맛보게 했고, 또한 천국을 소유하도록 인도해 주었다. 최 권사는 소위 식물인간이 된 남편이 중환자실에 입원해있는 동안 당대의 권세가들과 재산가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며 죽음이 머나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에서 경험하게 되었다.

 

 첫걸음, 첫관문

 
그렇게 남편이 떠나고 나자 정신이 번쩍 났다. 인기 드라마가 끝났을 때 주인공이 느끼는 배신당한 것 같은 마음도 들었다. 영원토록 아름다운 센터에서 보낼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 “불치병 남편을 보내고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간증하는 최선자 권사     ©크리스찬리뷰


 "실명으로 말씀드려 죄송하지만, 대통령도 자살하고, 정주영 씨 아들도 이건희 딸도 자살했잖아요? 최진실도... 모든 것 마음대로 주무르던 사람들, 권력도 돈도 인기도 모래처럼 빠져나가는데요..."

정상에 서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극단의 허무감이 몰려왔다. 여기서 우리는 인기 절정의 스타로서 부각되기까지 '인간 최선자'의 삶의 궤적을 추적할 필요를 느낀다.

그는 아직 TV가 나오기 전 MBC가 개국을 준비하며 공채로 뽑은 성우 1기생이었다. 5·16 당시 그는 부푼 꿈을 안고 성우모집 전단을 손에 움켜쥔 채, 단지 배우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어린 시절 추억의 추억이 소롯이 담긴 전주를 떠나 서울로 달렸다.

"그때 보았던 시험문제를 아직까지도 외우고 있습니다. 서울 아가씨들은 대부분 글자 그대로 시험 문제를 읽어내려갔어요. '어머니가 설탕 봉지를 어디다 두셨을까? 아∼여기 있구나(찬장 문여는 소리). 냠냠(먹어보는 소리). 앗 짜! 소금이잖아' 저도 서울 아가씨들 틈에서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순서를 기다리며 연습하고 있는데 드디어 ‘최선자’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조그마한 스튜디어 방송 녹음실이 시험장소였다. 커다란 유리 너머로 남자 10명이 앉아있었다.

수험번호와 이름을 또박또박 댄 뒤 대사를 읽어내려가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심사위원 10명이 얼굴을 한꺼번에 번쩍 들더니 모두 뚫어지게 그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두세 번의 실기시험을 더 치른 뒤 드디어 MBC 문화방송 1기 성우로 당당히 합격했다. 이후 동기생 60여 명은 매일 방송국에서 짜놓은 시간표대로 연기실습에 들어갔다. 

한여름에 선풍기도 없는 찜통 스튜디오에서 강훈련이 계속됐다. 한두 달이 지나자 탈락자들이 늘어갔다. 남자들 가운데는 아예 군대로 도피하는 경우도 있었다.그러나 그에게는 물만난 고기였다. 언제나 구름처럼 두둥실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제가 제일 소망했던 일, 그리고 서울에서 유명한 선생님들에게 연기수업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지요.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모릅니다. 모이라는 시간보다 1시간 더 일찍 나갔습니다. 사투리 때문에 어딜 가나 놀림감이 되었기 때문에 대문만 나서면 의식적으로 말조심을 했습니다. 무엇을 받아들일 때는 온갖 정성을 다해 차츰 제 것으로 만들어갔습니다. 이제 저의 목표는 오직 배우로 성공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정상을 향한 첫걸음을 뗐다. 창대한 정상이 열리는 첫 관문은 참으로 미약한 출발에서 시작되었다.

 

해결되지 않는 욕구

 
새로 개국된 MBC 방송은 과히 폭발적이었다. 처음 시작하는 상업방송이었기 때문에 CM송조차도 인기가 있었다. 그는 이창환, 남성우, 정은숙, 고은정 등 당대 유명 성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드라마에 출연하기에 바빴다. 어느새 그들처럼 인기 대열에 서게 됐다. 연극도 열심히 한 결과 신인 유망주로 신문이나 잡지에 그의 이름과 얼굴이 오르내렸다.

▲ 시드니올림픽공원에서 산책을 즐기는 최선자 권사     ©크리스찬리뷰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일일연속극의 해설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지금은 없어진 동아방송 개국기념 당선작가의 작품이었다. 작가 이름은 구석봉. 언제나처럼 작가와 배우의 만남으로 인사했다. 그러나 그와의 만남은 예사롭지 않았고, 결국 백년가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결혼 후 그의 생활은 후회가 없을 만큼 열정적이었다.김민자, 박근형씨 등과 함께 TV 연속극 ‘이별 그리고 사랑’을 연기할 때 베스트 드레서로 선정돼 각종 언론사는 그를 두고 화려한 수식어를 쏟아냈다. 한 스포츠지는 “미와 추·노와 희·양공주에서 여왕에 이르기까지 연기하는 배우”라고 썼다.1분 1초를 아까워하며, 가장 좋은 작품으로 배우들과 만나 연기하는 일에 아까울 것 없이 온몸을 던졌다.

 MBC에서만 활동하고 있던 그에게 어느 날 KBS에서 함께 일해보자는 연락이 왔다.

“최선자 씨, 이번에 우리 방송국에서 반공 드라마 ‘밀림지대’를 새롭게 시작하고 ‘전설의 고향’이라는 프로그램을 신설했는데 선자 씨가 꼭 맡아줬으면 합니다”

당시 국가적으로 반공 드라마를 적극 후원했고 시청자들로부터도 상당히 인기를 끌고 있어 사양할 이유가 있으면 오히려 이상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KBS로 자리를 옮겨 새 둥지를 틀었다. 그렇게 시작된 반공 드라마는 처음부터 화젯거리였다. 대공 드라마의 대부로 알려진 김동현의 작품 ‘밀림지대’에서 동남아를 주름잡는 여간첩 ‘람뿌땅’ 역을 맡았다. ‘람뿌땅’은 화려하며 요염하고 칼처럼 날카로운 여왕벌 같은 여인이었다.

이 드라마와 병행해 납량특집으로 더 유명한 주간극 ‘전설의 고향’이었다. 최상식 PD는 MBC에서 KBS로 자리를 옮긴 그에게 매주 드라마 출연 제의를 했다. 명콤비로 ‘전설의 고향’으로 작품의 맥을 함께 일구어 나갔다.‘전설의 고향’은 출연하는 여배우마다 대스타 반열에 올려놓았다. 억울하게 죽은 원혼, 여우가 사람으로 변하기 위해 온갖 공을 들이다가 인간으로부터 배신당해 영원히 여우로 살아야 하는 애틋함 등. 악하고 더러운 인간들이 의인화된 미물들의 눈물로 그 잘못을 깨닫고 후회한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첫 전도, 곳곳에 포진된 전도자들

 
'전설의 고향' 연출가 최상식 PD는 소문난 잉꼬부부였다. 그의 부인 송도영 씨는 MBC 직계 후배로 당시 가장 인기있는 성우였다. 평소 이들 부부는 틈만 나면 그에게  “교회에 같이 가자”고 권했다. 심지어 최 PD는 촬영 때마다 전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연예인교회 집사였던 최 PD는 말씀을 달고 살았다.송도영 씨를 비롯해 MBC 성우 후배 중에는 ‘걸쭉한’ 인물들이 많았다. 이수나, 코미디 프로에도 출연했던 김희숙, 김유선, 유명옥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화통하고 술도 잘마셨다.서로 언니·동생하는 사이로 인간적인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힘든 부분을 격려하며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들이 약속이나 한듯 독실한 신앙인으로 살기 시작했다. 이들은 만날 때마다 “언니, 우리 함께 교회가요”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 본지 송기태 편집국장(왼쪽)과 인터뷰하는 최선자 권사     ©크리스찬리뷰


"TV·연극에서 종횡무진 미친 듯이 활동하던 저에게 교회는 시간낭비였습니다. 일을 하며 친하게 지낸 PD와 후배들이었지만 그들의 신앙에 대한 열정은 제 마음을 흔들지 못했습니다.돈·명예·인기를 한몸에 거머쥘 수 있는 제의가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죠. 

1976년 차범석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3년 동안 여배우를 찾지 못해 작품을 올리지 못하고 있는데 선자 씨가 맡아줬으면 좋겠어'해요. 선생님의 조건은 까다로웠습니다. 춤을 잘 춰야 하고 요염해야 하며 대사를 완벽하게 구사해야 한다는 겁니다. 저는 ‘무슨 작품이길래 이렇게 거창해’하며 기대했습니다.작품 제목은 ‘살로메’였어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토대로 그린 이 작품에서 7개의 베일을 쓰고 한 개씩 벗어가다 마지막엔 거의 알몸으로 춤을 추며 헤롯왕의 마음을 사로잡아 세례 요한의 목을 쳐서 쟁반에 담아 가슴에 안는 살로메 역을 맡게 된 것입니다."

시청 앞 ‘쎄실’ 극장의 무대에 오른 연극 ‘살로메’는 장안의 화제였다. 7개의 베일을 하나씩 벗어내며 마지막엔 반나체로 춤을 추는 관능적인 모습의 ‘살로메’역이 사람들에겐 최대 관심사였다. 헤롯왕은 전운 씨가,세례 요한은 외화 ‘형사 콜롬보’의 목소리 주인공 최응찬 씨가 맡아 열연했다.그때 38세의 나이로 그는 춤 추는 요염한 여인의 역을 감당하기 위해 무려 6개월 동안 무용학원 등을 오가며 몸을 단련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이후 연극 무대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살로메’ 공연이 끝난 뒤 바로 극단 ‘산울림’의 대표 임영웅 씨가 연출을 맡은 모노 드라마 ‘목소리’에서 또 한번의 변신을 시도, 성공했다. 그 결과 78년 MBC에서 최고 연기상을, 2번의 동아연극상 연기상, 한국연극영화상을 휩쓸었다.

"이 같은 드라마 등을 통해 제가 한창 KBS에 정을 붙이고 있을 때쯤, KBS에서 ‘속 썩이는 작가’로 이름나 있던 나연숙 권사를 만났습니다. 인기있는 작가인 그는 꼭 드라마 속에 ‘예수쟁이’를 강하게 표현해 방송사 관계자들의 애를 태웠어요.나 권사는 연속극 제목까지도 성경적으로 ‘약속의 땅’이라 정하기도 했지요. 드라마 속 연기자가 새벽 종소리를 들으며 교회 가서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담는 등 나 권사는 어떤 식으로든 예수를 표현했습니다.

저는 이 ‘약속의 땅’에서 향순이라는 광부의 아내 역을 맡았습니다. 강부자, 서승현씨 등 서로 호흡이 유난히 잘 맞았던 ‘약속의 땅’ 팀들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와 식사하며 정을 나눴습니다."

나연숙 권사와 이후로 몇 편의 드라마를 함께 했다. 그 때마다 그는 나 권사의 신앙을 바라보며 많은 충격을 받았다. 작품을 연출한 곽영범 씨 역시 장로 아들이었다. 그는 방송가 이곳저곳에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만 해도 저는 믿음·교회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저 ‘내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고 있구나’는 생각만 했습니다."

어쨌거나 그가 인기를 상종가를 구가할 때 쯤 방송계에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가장 인기가 높았던 ‘후라이보이’ 곽규석, 구봉서 씨가 예수를 믿고 전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들은 방송국에서 연예인은 물론 만나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예수 믿어!”, “예수님 믿으세요”라고 전도했다. 특히 여자 코미디언 김희자 씨는 방송보다 예수가 더 좋다며 활동을 그만둘 정도였다. 영화배우 겸 탤런트인 고은아 씨는 방송에서도 틈틈이 자신의 신앙생활을 털어놨다. 그러다가 아예 CBS의 '새롭게 하소서'만 맡을 정도였다. 강효실 씨(배우 최민수의 모친)는 영화배우 최무룡씨와 가슴 아픈 이별을 한 뒤 그 슬픔을 술로 달래며 살았는데, 어느 날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특히 연예인 중에는 신앙이 특심하여 신학교로 진학하여 목회자의 길로 들어선 사람도 여럿 있다. 곽규석, 임동진 목사가 대표적이고, 김석, 정영숙 권사도 지각 한번 하지 않고 신학교를 열심히 다녔다고 한다. 이들의 신앙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이들과 만나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기에 휘말리려드는 게 아닐까’라는 불안감(?)이 밀려왔다고 최 권사는 밝혔다..

"왜냐하면 그들을 만나면 항상 웃으면서 저를 반겨줬고 더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 그들에게 휩싸여 그 속으로 점점 빠져드는 것 같은 이상한 힘을 느꼈습니다."

 

 무당역의 강렬한 인상

방송의 꽃인 드라마는 갈수록 대형화되었다. KBS에서 100분이 넘는 ‘TV문학관’을 신설했다. 그는 첫회 방송을 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을화’라는 작품인데, 어린 딸에게 신을 내리게 해 입신토록 하는 큰무당역이 저에게 주어졌습니다. 딸 을화역은 장미희였어요. 우리 '모녀'는 색동옷, 활옷을 입고 산야를 누비며 촬영했습니다. 저는 실감나는 무당 연기를 위해 유명 무속인을 청빙했습니다.


 
▲ 최선자 권사    ©크리스찬리뷰


그 무속인은 저에게 '선자 씨와 저는 닮은 구석이 참 많은 것 같아요'하며 은근히 친근감을 보였습니다. 저는 보다 사실적인 연기를 위해 그의 도움을 청했기 때문에 이같은 친근감에 거부감을 보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연기만 잘하면 됐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제 생각과 달리 ‘을화’는 큰 파장을 몰고 왔습니다. 이 작품 이후 많은 사람들 머릿속에는 ‘최선자=무속인’이라는 이미지를 굳히게 됐습니다. 저는 ‘을화’ 방송이 나간 뒤 ‘전설의 고향’에서도 다양한 무속인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이후 선생님, 바보, 수다쟁이, 패션디자이너 등 많은 연기를 하면서 이미지 변신을 위해 노력했다. 할머니로, 또 머리를 묶은 18세 소녀로, 사극에서 대비마마, 춤추는 기생역도 해봤지만, 사람들은 '연기인 최선자'를 생각할 때 영혼을 부르기도 하고 풀어내기도 하는 무속인의 영상들만 기억하고 있었다.그는 언어의 장벽을 넘어 어떻게든 세계 연극무대에 서서 감동적인 연기를 하고 싶었다. 그 도구로 무속, 한국의 샤머니즘 등 그 어떤 것이든 다양하게 해보고 싶었다.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굿판을 벌리며 한국의 이미지도 심어주고 싶었다. 춤, 창, 눈빛으로 그의 연기를 표현하고 싶었다. 이같은 연기에 대한 열정은 무속인으로 굳어진 그의 강렬한 이미지로 더 이상 화려한 날갯짓을 할 수 없었다. 방송의 위력이 이렇게 클 줄 정말 생각지 못했다.그만큼 무당역을 잘 하는 배우가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는 게 중론이다.

"요즘도 간증 집회를 다녀보면, 그때 제 무당 역을 하던 것을 보던 신실한 성도들이 TV를 끄고, TV에 손을 얹고 저 사람 회개하게 해달라고 중보기도했다는 분들을 만나요. 중보기도의 위력은 더 크지요."

이후 KBS 주말연속극 ‘순심이’ 출연에 이어 바로 수목드라마 ‘왕룽일가’를 시작했다. 어느날 CBS ‘새롭게 하소서’팀에서 연락이 왔다. 20일 동안 미국 동부 뉴욕에서 서부 LA까지 주요 도시를 순방하며 녹음할 예정인데 함께 동행하면서 간증자로 서달라는 것이었다. ‘새롭게 하소서’는 고은아, 민창기씨가 진행하며 신앙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프로였다.

"제 가슴이 뛰었어요. 저의 무거운 짐을 다 지고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싶었어요. 제 마음은 미국이 아니라 땅끝 어디에라도 달려가 주의 말씀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오 주님, 저를 보내주세요. 하실 수만 있다면 꼭 보내주세요’하고 매달렸지요."

기도 끝에 작품을 연출하는 이종한 PD를 어렵게 찾아갔다. 먼저 20일 동안 미국에 갔다오길 원한다고 하자 이PD는 대뜸 “무슨 CF 촬영이 있으신가요?” 했다. 방송 질서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 PD에게 그가 만난 예수님에 대해 진실되게 간증했다. 오래도록 듣고 난 이 PD가 말했다.

“최 여사님, 그렇다면 한번 가실 수 있도록 우리 노력해 보십시다”

그날부터 주님은 바쁘게 일하셨다고 밝혔다. 그가 떠나기 20일 전부터 시작된 ‘왕룽일가’는 단 2주일 4회 방송됐을 뿐인데 시청자들의 반응이 대단했다. 박인환, 최주봉, 김영옥, 박혜숙씨 등 출연자들은 신바람이 났다. 작가 김원일 씨도 일주일에 4~5회분씩 술술 대본을 썼다. 연출가는 안방신이 나올 때면 마을 앞 마당에서 야외신으로 대신 촬영해주며 이런저런 모양으로 그가 출연하는 부분을 미리 찍어주었다. 미국으로 떠나야 하는 전날까지 방송국에서 4회분의 촬영에 매달렸고 결국 출연자들의 도움으로 잘 끝낼 수 있었다.

 

 뉴욕서 하와이까지 잇따른 간증집회

 
처음 미국행인데 돈 한푼 없이 떠났다. 그럼에도 두렵지 않았다. '하나님의 일로 부름받아 가는데 무슨 돈이 필요하겠는가. 그분이 다 먹여주고 재워주실텐데…'하는 담대함이 생겼다고 했다. 그때쯤 주간드라마 ‘당추동 사람들’을 같이 하던 탤런트이자 성우 1기 동기생인 나문희 씨가 미국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 최선자 권사    ©크리스찬리뷰


“너 미쳤니. 어떻게 먼 길을 떠나면서 돈 한푼도 안 가져가”하고 울먹이며 그에게 100불을 쥐어주었다. 친구의 우정에 감사하며 처음 떠나는 선교여행을 위해 빠짐없이 짐을 챙겼다. 뉴욕에서부터 필라델피아,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새너제이, LA, 하와이까지 12번의 집회를 이어갔다고 했다.

"우물서 나온 개구리격인 저는 하나님이 지으신 나라의 풍성함과 융성함을 보고 느끼고 만졌습니다.우리 일행은 ‘새롭게 하소서’의 두 진행자 고은아, 민창기, 지금은 목회자로 변신한 가수 겸 작곡가인 장욱조, 재즈가수 윤희정, 왼손 하나로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를 하는 황재환 전도사였습니다. 황 전도사는 피아노뿐 아니라 트럼펫 연주 실력도 수준급이었습니다. 그가 찬송가 545장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를 부르면 온 회중은 강 같은 은혜 속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저의 몫은 그 은혜 속에서 저를 구원해주신 은총을 간증하는 일이었습니다."

 

 기독교문화의 저변확대, '미리암선교회’

그는 예능교회(옛 연예인교회) 성가대에서 찬양을 드리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80년 초부터 선교뮤지컬 ‘새롭게 하소서’, ‘타오르게 하소서’ 등 선이 굵고 호흡이 긴 대형 곡들을 작곡한 기독교 문화의 개척자인 최성찬 집사가 이끌고 있다. 가끔 최집사가 새롭게 만든 곡으로 부활절 칸타타나 교회 창립예배 때는 특별 찬양을 준비해 연주하기도 했다.


▲ 최선자 권사는 ”보라빛 자카란다가 너무 아름답다”며 창밖의 자카란다 나무를 배경으로 기념사진 한 컷을 남겼다.     ©크리스찬리뷰


몇 년 전 제주 영락교회에서 개최되는 총회에서 특별 프로그램을 기획하던 중에 예능교회 성가대를 초청했다. 그러자 최성찬 집사가 작곡한 곡으로 뮤지컬을 만들어 공연하기로 했다. 당시 이름없던 그저 평범한 청년 최민수와 가수 윤복희 씨가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 역으로 초청되었다. 대원들을 흥분했고, 어떤 집사는 감동을 받아 수백만 원짜리 음향기기를 준비해 헌납했다. 또 조명기기도 새로 구입하고 의상도 맞췄다.

"드디어 제주 영락교회에서 총 리허설을 할 때, 제주 KBS방송국 중계차가 들어오더니 카메라가 설치되고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들이대며 배우들마다 인터뷰를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총회에 참석한 많은 목사님들도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지금까지 기독교 큰 이슈를 가지고 제주도에서 많은 회의와 모임을 가졌어도 이처럼 방송국이 관심을 갖고 인터뷰를 청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저는 연예인들이 예수의 작품을 극장도 아닌 교회에서 공연한다는데 방송국에서 그렇게 취재에 열을 올리는 것을 보며 충격을 받았습니다. 연예인들의 힘이 선교현장에서 얼마나 크게 나타날 수 있는지를 체험한 순간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기독 연예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조금씩 되돌려 드리기로 뜻을 모았다. 먼저 하나님의 작품에 동참하고자 하는 신앙인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작가 작곡자 연출가 탤런트 뮤지컬배우 무용가…. 곧 배역을 놓고 기도하며 한 사람씩 초청하기 시작했다. 예수님 역에 곽은태, 모세 임동진, 막달라 마리아 윤복희, 노아 장욱조, 세례 요한 박철호, 베드로 김민식, 혈루증 여인에 최선자.

1991년 7월 14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그가 창립단장을 맡고 기독연예인들이 모여 세운 기독문화단체 ‘미리암선교회’ 창립공연을 갖게 됐다. 최성찬 작곡, 이의일 연출의 뮤지컬 ‘지금 우리는’이 1부 하나님의 사랑, 2부 회개와 찬양으로 꾸며졌다.막을 올리는 날 아침 주룩주룩 비가 내렸다. 선교회 회원들은 무대 위에서 총연습을 끝내고 무릎을 꿇고 둘러앉아 성만찬을 거행했다. 세상의 것들로 사용된 이 극장의 무대와 우리 모두 예수의 피와 살로 깨끗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미리암의 첫 공연은 기독교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일간지와 방송사에서는 아예 외면당했다. 이런 상황에다 비까지 쏟아졌다. 정말 관객들이 찾아와줄까? 불안하고 초조하기만 했다. 성만찬을 막 끝내고 매표소와 극장 문이 열렸다. 무심코 밖을 내다보던 한 스태프가 소리쳤다.

“와! 우산을 쓴 입장객들이 거의 광화문까지 줄을 섰어요”

"우리 미리암 식구들은 다 함께 '오,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했습니다. 얼마나 주님께서 기다리셨던 작품이었고 이날이 오기를 기다리셨을까요? 기독문화단체 ‘미리암’의 창립공연 뮤지컬 ‘지금 우리는’은 그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잘했다'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해 10월쯤 창립공연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육군사관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매년 가을 ‘화랑제’라는 축제가 열리는데 할 수만 있다면 ‘지금 우리는’이라는 작품을 공연해달라는 초청이었다. 원래 학교 측에서는 당시 인기가수였던 조용필 씨를 초청했지만, 조 씨가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어 어떻게 알고 들었는지 큰 성공을 거둔 뮤지컬 ‘지금 우리는’을 초청해온 것이다.

"미리암 식구들은 뛸 듯이 기뻤습니다. 복음이 공식적인 절차를 밟고 육군사관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니까요. 그게 바로 10월 28일. 육군사관학교 을지극장에는 교장을 비롯,지휘관들이 앞좌석을 메웠고 1∼2층에는 젊은 사관생들로 가득찼습니다."

드디어 막이 올랐다.천지가 창조되고 노아가 약속의 무지개를 띄우고 이사야의 경고와 세례 요한의 외침, 시험 당하는 예수와 공생애를 마치고 골고다의 길을 걸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 그리고 부활하시는 이야기 등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쾅쾅’ 못 치는 소리는 을지극장에 가득 메운 심령들의 마음을 함께 쳤다. 교장선생님이 드디어 눈물을 쏟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심령이 극장 안에 가득찼다.

이후로 이 작품은 대구·광주·청주·부산의 기독교방송 초청공연으로 이어졌고 하나님은 흑인폭동으로 잿더미가 된 슬픔의 땅, LA로 미리암을 인도하셨다.

"제주공연이 있기 전날 기독연예인들은 기도했었다. 남쪽바다를 건넜으니 이제 태평양을 건너 오대양 육대주로 뻗어가게 해달라고.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LA 폭동 현장서 한·흑 화해 공연 추진

 
1992년 LA 한인타운은 폐허의 현장이었다. 흑인들의 방화와 총격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살아온 한인들은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었다.주위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누가 공연장을 찾겠느냐”며 말렸다.

 
▲ 뮤지컬 ‘지저스 지저스’ 중에서 ‘십계’     ©미리암


"그러나 우리 ‘미리암’의 마음은 달랐다. 하나님은 이때를 미리 아시고 그 상한 심령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위로하고 주님 앞에 나오라는 뜻으로 우리를 보내신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라면을 먹고 차디찬 마루바닥에서 잠을 자도 좋았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한 그들에게 예수의 생명과 살아계심을 전하기만 하면 됐습니다.‘미리암’ 단원은 서울의 스케줄을 모두 미루고 더욱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떠날 사람은 중보기도팀과 출연진 모두 68명이었습니다. 첫 문제는 미국 비자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차근차근 서류를 준비했습니다. 

68명 가운데 비자가 있는 사람은 임동진, 윤복희, 강경화, 최선자 등 겨우 8명뿐이었고, 단원은 대부분 미혼이 많아 비자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 관광비자도 싫습니다. 선교비자를 주세요. 한 사람도 실족하지 않게 모두 보내 주세요'하고 기도했습니다. 특히 저는 공연 준비로 LA를 오가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계획이 떠올랐다고 회고했다.

"하나님은 LA 끝자락에 위치한 세계적인 목회자 로버트 슐러 목사님의 수정교회를 접하게 하셨습니다. 부활주일 그 교회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다룬 공연을 해마다 하는 것을 알게 하셨고 우연히 그 공연을 보게 하셨습니다. 수정교회는 공연장으로 변했고 예수 부활을 알리는 천사들이 온 교회 안을 훨훨 날아다녔습니다.

그러나 ‘미리암’의 작품 속에 들어 있는 복음의 진수는 따라올 수 없었어요. 저는 바로 이곳 수정교회에서 상처받은 교민뿐 아니라 모든 인종이 모여 눈물의 고백이 올려지기를 간절히 꿈꿨습니다. 작은 나라 대한민국이 전하는 헌신된 자들의 몸짓과 찬양이 이곳에 울려퍼지기를 바라는 강한 열망이 생겼습니다.한국으로 돌아와 바로 공연 때 찍어둔 비디오 테이프와 ‘미리암’의 간절한 소원을 적은 편지를 담아 로버트 슐러 목사님께 보냈습니다. 그리고 답을 기다렸는데, 놀랍게도 수정교회에서 공연을 해달라는 답장이 왔습니다. 수정교회 역사상 다른 어떤 단체도 그 교회의 단에서 공연을 한 적이 없다는 내용도 들어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미리암'은 로버트 슐러 목사 서신을 원본 그대로 미국대사관에 제출했다. 그 결과 68명의 단원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한 사람의 낙오자 없이 비자를 받게 됐다. 이와 함께 '미리암'은 아카데미 시상식이 자주 열리는 LA ‘슈라인 오라토리움’이라는 세계적인 극장에서 공연할 수 있는 길도 열렸다.

 

 LA공연 풍성한 열매

그렇게 날아간 미국! 1992년 6월 18일 ‘슈라인 오라토리움’에서 총연습을 끝내고 객석을 바라보니 ‘6천 400석이 다 채워질까’하는 마음으로 솔직히 불안했다고 하였다. 공연 시작 전 언제나처럼 성만찬을 진행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객석을 둘러보니 겨우 300여 명이 앉아있었다고 하였다. 그러자 더 힘차게 기도했다.

 
▲ 최선자 권사     ©크리스찬리뷰


“지금까지 도우신 주님,오늘 이 시간에도 도와주소서”

성만찬이 끝나고 다시 한 번 무대의 막을 슬쩍 들어 객석을 봤다. 모두들 소리치기 시작했다.

“온다! 사람들이 몰려온다”

공연시작 20분 전부터 봇물 터지듯 관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세 차례 진행된 공연 모두 매진이었다. 대성공이었다. 하나님은 하늘문을 활짝 여시고 언제나 최후의 일각까지 그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신 뒤 마지막에는 이렇게 풍성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주셨다고 하였다. 라면을 먹으면서도 소명을 이루겠다고 결단했던, 많은 곳에서 '미리암'을 초청해 주었고, 큰 대접도 받았다고 하였다. 특히 LA 해변에서 춤추고 찬양하며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고 했다.

그 일이 있은 뒤 그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1:8)는 음성을 듣게 됐고 대형 뮤지컬로 무대에 서는 일뿐 아니라 전국의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제 전국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까지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하나님은 그를 세워주셨다.이러한 은혜들을 모아 그는 폐기처분된 버스나 아주 작은 교회, 산꼭대기에 비닐 하우스로 세워진 허름한 교회를 비롯해 기차, 버스, 비행기, 통통배를 타고 소록도를 지나 찾아간 섬마을 교회 등에서 찬양하며 간증했다.

기도의 용사 ‘미리암’이었지만 쉽게 이뤄지지 않는 기도제목이 있었다.바로 가깝지만 먼 일본 800만 귀신을 섬기는 그 땅에서 예수님을 전하고 싶었다. 주님은 그 땅의 영혼들을 위해 채찍을 맞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미리암은 그들을 찾아가 두들기고 쟁기질하며 그들의 마음에 복음을 심어주고 싶었다.일본 땅을 여러 차례 밟고 도쿄에 있는 극장까지 예약했지만 일본은 그저 캄캄하기만 했다. 기도를 3년 가까이 쌓아갔다. 뮤지컬 제목도 ‘지저스 지저스’로 바꾸고 유경환씨를 연출가로 새롭게 영입했다. 음악도 SBS 예술단장 김정택 장로의 지휘로 새옷을 갈아입었다. 지난 1996년의 일이었다.

 

 불모지 일본, ‘지저스’ 공연 성공

 
"1995년쯤 일본의 아사호란도 목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매일 십자가를 지고 일본 국토를 6개월 동안 걸어서 통과하신 분이었습니다. 저는 아사호란도 목사의 사진을 구해 성경책 사이에 넣어두고 그 귀한 목사님을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3년 가까이 기도를 한 것 같은데, 어느 날 한 집사가 전화를 걸어 ‘권사님, 일본에서 아사호란도 목사님이 오셨는데 조찬을 함께 하시죠’라고 말하는 거예요.3년을 기도하며 기다렸던 목사님. 그분의 사진이 아직도 성경책에 들어있었어요. 저는 그것을 가지고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한순간에 성령의 감동으로 역사하시어 아사호란도 목사를 통해 ‘미리암’의 일본 공연을 적극 도와주셨습니다."

▲ PPP십자가 대행진에서 선두 그룹을 이끌고 있는 최선자 권사와 아사호란도 목사(오른쪽부터 호주기독민주당 총재 프레드 나일 목사, 한기총회장 이용규 목사, 민주당 김영진 의원, 최선자 권사, 아사호란도 목사, 국가조찬기도회 장헌일 사무총장 (2007년 8월 15일)     ©크리스찬리뷰


때마침 일본 순회집회를 인도하던 신현균 목사를 통해 가장 많은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의 오카와 목사를 소개받았다. 그는 ‘리바이벌 미션’이라는 500여 교회가 모이는 성령운동의 지도자였다.공연 포스터는 오카와 목사를 통해 도쿄의 일본 교회에 배포되었고 매일같이 한인교회와 신주쿠에 들어차 있는 한인 식당가를 방문해 포스터와 전단지를 돌렸다.

"도쿄의 온 땅이 울리도록 2개월 가까이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97년 9월 11일∼12일. 신주쿠 ‘나카노제로 문화센터’에서 3회 공연을 성공리에 마쳤습니다. 일본에서 믿음의 아버지로 존경받는 혼다 고지 목사께서 성만찬을 인도해 주시며 우리나라에 범한 죄를 회개하셨습니다. 한국인의 공연물에 일본인들이 80% 넘게 찾아온 경우는 ‘미리암’의 ‘지저스 지저스’뿐이라고 현지 목회자들이 전했습니다. 계속해서 기립박수가 터졌을 때 ‘미리암’은 소리쳤습니다. '오 주님,주님이 승리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일본공연 후 한국을 방문한 아사호란도 목사는 “주님께서 한국땅에 아벨의 피가 소리친다고 하십니다. 일본이 지은 죄를 십자가대행진으로 사죄하려 합니다. 도와주세요”라고 했다.그러자 최 권사는 '주님의 음성으로' 듣고 순종하기로 결심했다. 

98년 7월 14일 부산을 출발해 8월 28일까지 계속된 십자가대행진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청년 20명과 이 일에 감동받은 국회조찬기도회 회장 김영진 장로를 비롯하여, 믿음의 의원들,그리고 일본선교회 JEM이 함께 했다.십자가는 경상·전라·충청·경기도와 서울로 이어지면서 큰 화합의 물결을 이뤘고 한여름을 더욱 뜨겁게 달궜다. 그해에는 장마로 큰 피해가 있었지만 십자가가 지나는 길목에는 구름기둥이 시원한 바람을 일으켜 ‘군병들’이 지치지 않도록 했다.

밤마다 도착 장소에서 피를 토하는 아사호란도 목사의 사죄의 메시지가 있었고 최 권사 역시 간증했다.8월 15일, 십자가는 독립기념관에 도착했다. 기념관에는 작두로 목을 자르고 인두로 지지는 모습, 어린 처녀를 군위안부로 짓밟는 영상자료들이 있었다. 일본 청년들이 그 사진을 보더니 밖으로 뛰쳐나가 통곡하기 시작했다.그는 그들을 위로했다. “울지 마세요. 당신들의 선조는 예수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제 당신들이 그 땅을 고치는 밀알이 돼야 합니다.”

십자가는 판문점을 지나 평양까지 가길 원했지만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아픈 마음에 주님은 중국으로 떠나 십자가를 안고 백두산에 오르는 길을 열어주셨다.중국에서는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었다. 감시가 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몸을 붙이고 한쪽 팔을 펼쳐 인간 십자가를 만들어 기도했다.

 

 길을 내는 주역

‘미리암’ 단원들 가운데, 10년을 헌신하더니 방영섭은 CCM 가수로, 홍수철은 복음가수에서 신학대학원 학생이 돼 목회의 길을 준비하고 있다. 장옥조 목사, 중국 선교에 열심인 손동호 목사 등등 모두 하나님의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하였다.

▲ 최선자 권사의 오랜 기도 제목과 꿈은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극단 미리암이 ‘지저스 지저스’ 공연을 갖는 것이다. 최 권사는 시드니를 떠나 기 전날 밤 본지 권순형 발행인과 JK엔터테인먼트 강의봉 사장 등 관계자들을 만나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공연 가능성을 타진하며 승리의 V자를 그렸다.    ©크리스찬리뷰


최선자 권사, 그는 길을 내는 주역이었다. 교회에서 ‘다락방 순장자리’를 ‘은혜받는 금방석’의 길을 내고, 극단 미리암으로 한국 기독교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길을 냈다. 사람살이가 길을 낸다. 그 길이 모여 역사를 이룬다. 역사가 다시 길을 낸다. 그 길을 따라 사람살이가 이어진다. 어느 때 어느 사람이 어떤 이유 때문에 걸었던 그 길은 역사 속에 남아 후예들에게 길을 이른다. 아름다운 길, 꼭 가야 할 길은 먼저 길을 낸 주역들의 개척정신이 가장 중요하다. 극단미리암을 통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한 최선자 권사는 분명 없던 길을 내어, 사람들이 그 길에서 길을 찾도록 한 '매력 충만의 주인공'이었다.

 

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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