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 온 미래는 낯설지 않다

이규현/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0/12/27 [12:22]

옆집의 담쟁이가 슬며시 우리집 울타리를 타고 건너오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그것이 지루할 정도로 느려 변화를 감지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줄기를 타고 나팔꽃도 함께 뒤엉켜 침범해 들어오더니 어느 날 우리 집 뒷뜰의 모든 곳은 담쟁이와 나팔꽃이 어울려 만든 다른 세상이 펄쳐져 있었다. 느리고도 느리게 보였던 담쟁이가 만들어 낸 속도에 화들짝 놀랐다.

우리는 주변의 상황들을 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찾아온 변화들로 인해 놀랄 적이 있다. 어느 날 훌쩍 커 버린 아이로 인해 놀라고, 자동차의 백미러에 비치는 얼굴을 보며 시간에 익어온 역력한 흔적들에 흠칫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얼굴을 통해 사라진 시간을 확인하게 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까마득해 보였던 미래가 어느새 내 앞으로 지나가 버린 것이다. 한 개인의 살아온 실록은 과거의 어떤 지점에서 보면 하나의 미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순간엔가 현재를 건너 아스라한 과거가 되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충격을 받는다.

시간은 느린 것 같아 보이지만 잔인할 정도로 빠르다. 그 속도 때문인지 사람들의 미래를 대하는 방식과 기술은 늘 낯설고 서툴다. 그것은 역사를 통해서 배우는 교훈이기도 하다. 미래라고 하는 시간은 내가 준비를 했든 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모른 체하고 처리하지 않았던 고지서가 또다시 날아 드는 것처럼 밀고 들어온다.

대개 미래가 갑작스럽게 여겨지는 이유는 오늘이라는 현실의 무게가 녹록하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나중에는 누구의 것이 될것인지도 알 수 없는 집 하나 장만하느라 정신없이 뛰어 다니고 별 사용될 것 같지 않은 스펙 쌓는 것 때문에 주변을 볼 틈도 없다.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은 과분한 사치로 여겨질 때가 많다.

그러나 준비된 사람에게 미래는 그렇게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다. 미래란 일찌기 누구에게나 예견된 것이기에 미래는 결코 낯선 얼굴이 아니다. 미래라는 시간은 오늘이라는 시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오늘은 또 어제라는 시간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선은 점의 연결이듯이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직선의 점들이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를 통해서 이미 알려진 얘기지만 오래된 것 안에 이미 미래는 존재해 있었다고 해야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과거라는 역사 속에 미래는 숨을 쉬며 자라오고 있었고 오늘의 행위 안에 내일은 명백히 예언되어 있는 것이다.

과거라는 거울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에서 오늘의 나를 확인한 사람에게는 미래라는 시간은 공포를 가져다 주는 괴물이 아니다. 다만 과거를 괄시하거나 현실에 게으른 사람에게 미래는 불쑥 찾아드는 부담스러운 불청객일 수 있다.

인생은 시간이다. 시간 안에 인간의 삶이 주어졌다. 시간의 세계를 이탈하면 그것은 곧 죽음이다. 삶이란 시간 여행이다. 삶의 기술은 시간을 다루는 것이다. 다가오는 시간을 낯설어하지 않고 친숙하게 지내는 법을 익힌 사람은 세월을 탓하지 않는다. 시간을 귀중히 다루는 사람은 어제의 역사, 오늘이라는 치열한 삶의 현장, 그리고 비록 예측할 수 없는 내일을 거부하지 않고 정성껏 가슴으로 끌어안는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면 인생의 감가상각은 더해져가고 남은 미래는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지나간 시간의 투자를 통해서 축적된 지혜, 미래를 보는 열려진 예지는 그저 그렇게 살아온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인생을 살게 만드는 기회를 제공한다. 갑자기 맞닥뜨린 미래는 당황스러운 것이지만 기다려 온 미래는 반갑게 맞이할 수 있다.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 다만 과거를 부정하지 않고 오늘 주어진 시간을 두손 벌려 환영해야 그것은 가능하다. 돈보다 시간을 더 소중히 여기며 진지하게 미래를 향한 시간 여행을 즐길 수만 있다면 삶은, 우리를 속이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이규현/시드니새순장로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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