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움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함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09/05/29 [14:51]
▲ 2006년 12월 호주를 국빈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마친 후 존 하워드 총리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이보다 더 솔직할 수 있었을까 

5월 23일, 충격의 토요일이었다. 본지 권순형 발행인이 처음으로 전해준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이어 멀리 한국에서 지인들을 비롯하여 사면팔방에서 이 소식을 알려왔다. 순간 2006년 연말 노 전 대통령이 이곳 호주를 국빈방문했을 때, 보고 들었던 그의 웃음과 육성이 살아나는 듯했다. 취재노트를 뒤적이며 몇마디를 재생해 본다. 
“ 저와 다른 모든 정치인들이 함께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래서 호주의 민주주의를 수입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대화와 타협의 호주 민주주의를 수입하고 싶다. 돈은 얼마든지 주고라도 지금 당장 수입하고 싶다” (호주 국회 연설에서) 

“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살기 좋은 두 나라를 말하라면 호주가 꼽히고, 가장 가보고 싶은 나라 다섯 나라를 꼽으라면 호주가 꼽히고, 가장 유학 가고 싶은 나라 세 나라를 꼽으라면 역시 호주가 꼽힙니다.”  

“ 서울은 영하 6도로 무지 추운데 호주산 에너지가 한국의 아파트를 따뜻하게 해주고 있으며, 호주에서 철강석을 보내주지 않으면 우리는 철을 장만할 수 없어서 자동차를 만들 수 없다” 고 하며, “ 호주와 한국 간에 많은 경제적 교류는 호주가 없다면 한국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걱정된다”(호주 총리 초청 오찬에서) 

“ 요즘 제가 힘 빠진 것 아시죠? 그런데 여기 오니 힘이 납니다. 박수로 따뜻하게 맞아주셔서 격려가 돼 감사드립니다. 아름다운 시드니에 2시간 반만 있다가 떠나라고 하니 섭섭합니다. 나는 아직 (대통령으로) 성공하지 못했고 이 점에 대해 국민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나의 정치적 역량의 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 호주 총리 초청 오찬   ⓒ크리스찬리뷰

"한국의 특권과 권위주의 해소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섰지만, 우리는 아직도 싸움을 너무 많이 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각이 옳을 수도 있지만, 옛날 군사독재와 싸우던 때의 기억이 남아서 나쁜 사람, 좋은 사람을 갈라놓고 ‘저 사람들 옛날에 많이 해먹던 사람’ 이라는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상대도 나를) ‘길거리에서 데모나 하던 사고뭉치’  라고 서로 인정하지 않는 문화가 있습니다. 나의 역량이 부족해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이뤄내지 못했습니다.” (시드니 동포간담회에서) 

이보다 솔직담백한 연설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어떤 연설이든 거리낌 없이 만면에 웃음을 띄며 여유있게 연설하던 모습이 강하게 각인되었다. 

당시 산자부 장관이었던 정세균 현 민주당 대표가 기자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어 캔버라의 몇몇 장소에서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노 전 대통령의 숨소리를 들으며 취재할 수 있었던 것도 아름다운 추억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노무현’이란 이름이 보여주고 상징한 것은 한두 마디로 정의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만큼 그의 거의 모든 언행은 ‘파격’ 그 자체였다. 그러다 보니 노회한 정치인의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지도자와 국가 수장이란 표현보다는 욕설과 비하를 더 많이 들었던 정치인이다.

▲ 교민과의 간담회에서   ⓒ크리스찬리뷰

퇴임 이후 그가 보여준 귀거래사(歸去來辭) 역시 신선한 충격이었다. ‘서울의 찬가’  속에서 영원히 서울을 떠나지 않을 것 같은 전임 대통령들에 비해 얼마나 시원시원한 파격인가? 그러나 그 고향에서 여생을 여한 없이 살 것처럼 새로 잘 지은 집에서 불과 15개월밖에 보내지 못했다는 것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필자는 노 전 대통령의 지난 달 홈 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그의 진솔함과 인생의 모든 것이 무너져 깊은 심연속으로 빠지는 것을 보았다. 이미 매스컴에서는 그와 그의 가족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 처음 형님 이야기가 나올 때에는 '설마'했습니다. 설마 하던 기대가 무너진 다음에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용서 바랍니다.' 이렇게 사과드리려고 했습니다만, 적당한 계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마음속 한편으로는 '형님이 하는 일을 일일이 감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저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변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500만불, 100만불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제가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이미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명예도 도덕적 신뢰도 바닥이 나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말을 했습니다. '아내가 한 일이다, 나는 몰랐다' 이 말은 저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 뿐이라는 사실을 전들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국민들의 실망을 조금이라도 줄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미 정치를 떠난 몸이지만, 저 때문에 피해를 입게 될 사람들, 지금까지 저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계신 분들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었습니다..... 

이제 저는 이 마당에서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의 분노와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제가 무슨 변명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를 더욱 초라하게 하고 사람들을 더욱 노엽게만 할 것입니다....이제 제가 할 일은 국민에게 고개 숙여 사죄하는 일입니다. 

사실관계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나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이상 더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 없다. 나는 이미 민주주의, 진보, 정의, 이런 말을 할 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나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다. 여러분은 이 수렁에 함께 빠져서는 안 된다. 여러분은 저를 버려야 합니다." 

남이 써준 원고로 사과문을 발표하는 전임 대통령들과는 다른 그의 진면목이었다. 이 글을 대했을 때, 필자의 눈에서는 전혀 강요하지 않았는데 뜨거운 눈물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사실관계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나면 국민에게 고개 숙여 사죄하겠다던 그의 약속도 “담배가 있나?”  "저기 밑에 사람이 지나가네"라는 마지막 육성을 남긴 뒤 추락한 순간 바람처럼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 캔버라전쟁기념관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 내외가 한국 전쟁 전사자 명단 앞에서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본지 송기태 편집국장(사진 왼쪽)이 밀착 동행 취재했다.  ⓒ크리스찬리뷰

비주류에게 꿈과 희망을 

비극적인 최후를 마치며 전 국민을 충격속에 몰아넣은 노 전 대통령은 뿌리깊은 관료적 권위가 판치는 한국 사회에 비주류의 성공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지방 상업고등학교 졸업이란 짧은 가방끈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한 것은 그해 유일한 고졸 합격자였다. 그 출세한 법관 자리도 ‘체질에 맞지 않아’  짧은 기간에 과감히 떨쳐버릴 수 있는 것도 보통의 용기가 아니라면 도무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부림사태와 대우조선 이석규 씨 변호를 맡으면서 소외받는 노동자와 학생들의 인권변호사로 떠올랐다. 2.12 총선 때 그를 눈여겨 본 김영삼 전 대통령이 발탁으로 12.12 사태 때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장군을 총으로 겨누며 연행했던 허삼수 씨와 정면대결하여 넉넉한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렇게 당선된 국회의원도 못해먹겠다고 사임서를 낸 적도 있었던 것이 나중에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말로 연결된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는 '5공 청문회'에서 정주영, 장세동 씨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청문회스타'로 떠올랐다. 초선의원 시절인 1989년 국회 5공 청문회에서는 '전두환 살인마'를 외치며 전두환 전 대통령을 향해 의원 명패를 집어 던진 사건은 주류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그 자체로 '반란'이요 ‘이단아’ 나 다름없었다. 

▲ 노무현 대통령이 존 하워드 총리의 집무실 뒷뜰에 마련된 한호 양국 공동기자회견장으로 입장하고 있다. (2006.12.6)   ⓒ크리스찬리뷰

1990년 3당 합당 때는 '역사적 반역'이라며 합류를 거부했다가 '삼수'의 시련을 겪었다. 1992년 총선 실패, 1995년 부산시장 낙선, 1996년 서울 종로의 패배 등 쓰라린 경험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 1997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국민회의에 입당해 김대중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새로운 기회를 잡았다. 이어 1998년 7월 서울 종로 보선에서 6년 만에 원내 재입성에 성공했으나, 2000년 16대 총선에서 종로를 마다하고 부산에 자원 등판했다가 쓴 맛을 봤다. 

그러나 부산에서의 출마는 '지역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됐고, ‘바보 노무현’  ‘노무현 일병구하기’ 등의 말들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국민적 지지의 출발점인 '노사모'도 이 무렵 탄생했다. 긴긴 정치방학 시절에 중간중간에 식당경영, 생수회사 경영으로 사업계의 쓴맛도 처절히 경험해야 했다. 

그는 2000년 해양수산부 장관 발탁으로 정치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조직생활의 리더십을 처음으로 경험하면서 대권 도전의 중요한 발판으로 삼기도 했다. 2001년 3월 장관직을 떠난 뒤 본격적인 대선 준비에 나섰다. 변변한 조직도 없이 돈키호테처럼 참여하여 '국민참여 경선'에 힘입어 '이인제 대세론' 맞받아치며 극복했다. 

몇 차례 말실수로 '불안하다'는 지적과 함께 지지도 하락을 경험했지만 월드컵 축구 4강 열기에 힘입어 상승세를 탔던 '국민통합21'의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 협상 등을 거치면서 대권을 거머쥐었다. 제16대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를 겪는 등 정치적 굴곡은 계속됐다. 

그의 20년 정치 인생은 말 그대로 '충돌'과 '도전'의 역사였다. 그러나 이 모든 충돌과 도전은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져 아무도 넘보지 못할 그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비주류에게는 “ 쥐구멍에도 볕들날이 있다” 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으며, 원칙에 벗어나는 타협은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뺄셈이 정치’ 도 그에게서 시작되었다. 가장 밑바닥 경험을 해본 사람들이 갖는 용기요, 기백으로 이었다. ‘이보다 더 낮아질 수 없는’  상황에서 무서운 에너지를 축적하며, ‘소위 꿀리지 않는’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는 신분상승과 계층이동의 모델이었고, 치사하게 살지 않고도 정상에 이를 수 있다는 삶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12월 7일 시드니에서 동포간담회를 마치고 떠나려는 순간 대전에서 함께 살았던 김용철 집사(시드니제일교회)를 30여 년만에 만났다. 당시 노 대통령은 제17회 사법고시에 합격, 1977년 대전지방법원 초임판사로 발령을 받고 왔을 때 김용철 집사 집에서 세를 들어 살았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2008년 APEC 때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헤어졌는데, 노 대통령은 APEC 일정이 바쁜 가운데도 김용철 집사 가족을 호텔로 초청, 식사를 함께 나누었다고 한다.   ⓒ크리스찬리뷰

끝이 좋아야 다 좋다 

필자는 이 글에서 이미 고인이 된 노 전 대통령의 구체적인 비리를 언급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가 평생 정치적 자산으로 내세웠던 '도덕성'에 금이 가기 시작하고, 온 가족이 검찰에 소환되는 불명예를 보면서 “돈 앞에 이기는 장사 없다”는 말을 실감했다. 

"농촌으로 돌아가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삶을 살겠다"며 퇴임 직후 고향인 봉화마을로 낙향했지만, 그 도덕성은 시골에서 마음놓고 유기농조차 지을 수 없도록 몰아붙이고 말았다. 서거 직전 최종 저장 시각 오전 5시 21분으로 밝혀진 14줄로 된 유서는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다. 노 전 대통령은 컴퓨터를 끄지 않고 모니터를 그대로 켜놓고 5시 45분쯤 경호관 1명과 함께 자택을 나와 평소 자주 바라봤던 뒷산 부엉이바위로 산행을 떠났다. 

  “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노 전 대통령 유서 전문) 

노무현 전 대통령이 23일 남긴 유서에는 투신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지를 택한 노 전 대통령의 심리상태가 투영돼 있다. 여러 요인이 거론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 검찰의 수사로 인한 심리적 압박이 투신의 가장 큰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미 ‘600만 불의 사나이’라는 별명처럼, 640만 달러를 받은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이미지 실추와 낙담, 억울함이 복합적으로 겹친 결과라는 것이다. 자신의 상징과도 같았던 도덕성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은 것이 심리적으로 큰 타격을 줬다는 분석이다. 정치 입문 이후 도덕성을 최대 무기로 대통령의 권좌에까지 올랐지만 수뢰 혐의자로 내몰리면서 도덕성이 부정되고 비난과 조롱을 받는 상황에 처했다. 

63세를 일기로 타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 대한민국 민주화의 숨길과 희비가 담긴 한편의 '서사시'라고 할만큼 다이내믹한 삶! 파격으로 시작된 그의 인생여정이 파산으로 끝나 못내 아쉬운 마음이다. 더더구나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그 기회를 번번히 놓친 그의 삶이 애처롭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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