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지킴이 세종대 호사카 유지 교수

한국과 사랑에 빠진 행동하는 지식인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09/07/07 [10:44]
독도는 우리 땅!
 
▲ 별종 일본인 호사카 유지 교수. 그는 토종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본 태생 귀화 한국인이다.  ⓒ크리스찬리뷰

우리에겐 참으로 진부하고, 익숙한 말이다. 이 익숙한 말을 판에 박은 듯이 똑같이 합창하고 있는 일단의 사람들이 있다. 이 합창단원들의 국적이 다를 때, 서로를 바라보며 합창이나 독창을 할 때엔 심각하다 못해 상대에게 맞아죽을 각오로 생명까지 걸어야 할 때가 많다. 우리는 이 너무도 당연한 이 합창을 이웃나라라기엔 너무도 먼 나라인 일본에게서, 한밤중에 수시로 울리는 알람시계 멜로디처럼 듣고 있다. 얼마나 성가신 일인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시도 때도 없이 경각심을 알려주는 사이렌 소리같기도 하다.

이런 성가신 소리를 지겨울 정도로 들어온 한국 사람들에게 일본은 뿌리 깊은 구원(舊怨)에 미운털까지 박혀 미움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별종 일본인을 만났다. 그가 바로 토종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호사카 유지 교수이다. 그의 현재 직함은 세종대학교 일본학 교수이자 독도종합연구소 소장이다. 필자와 체구가 엇비슷한 그를 지난 6월 12일, 호주의 독도 지킴이로 자처하고 호사카 교수를 초청한 고동식 장로의 안내로 파라마타의 근사한 얌차집에서 만났다. 일본 사람과 중국 음식점에서의 만남이라, 한중일의 절묘한 조화같기도 하다. 완벽한 한국말 구사능력은 보통 내공이 쌓인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일본인이고, 3년 전 한국으로 귀화했으니 한국인입니다.” 

그는 독도 문제만이 주특기로 다루는 것이 아니었다. 한일 간의 아픔과 갈등, 미묘한 문제를 뿌리부터 캐내며 원인과 결과를 명쾌하게 증명했다. 우리의 주관심사인 신사참배에 대하여 그의 의견을 들어보자.

당시 일본은 모든 종교를 일단 포용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든 불교든 다 믿어도 된다고 하면서 모든 종교들보다 위에 존재하는 국가신도(천황)는 신의 아들로 살아있는 신이죠. 그래서 천황이 모든 종교보다 위에 있다는 것이 일본의 주장이고, 신도의 주장입니다. 하늘에서도 그렇다고 하지요. 모든 종교를 믿어도 되지만, 그 위에 천황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천황에게 제사지내는 신사에 참배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이런 스타일로 만주, 대만도 정신적인 신사를 만들어 천황중심의 국가체제로 이룩해 아시아를 지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일본은 천황 생일은 공휴일이지만 성탄절이나 석탄절은 공휴일이 아닙니다. 신사참배는 분명히 종교행위이고, 또한 통치도구였습니다. 조선신금 만주신금 등을 세워서 했습니다. 

신사참배, 종교행위이자 통치도구

45년 일본의 지배 정책을 중심으로 보고 그것을 중심으로 연구한 그의 지론이었다. 당시 모든 종교를 천황 아래 하위개념으로 두었습니다. 천황을 살아있는 신으로, 국가신도의 구세주로 보았습니다. 물론 지금은 천황이 상징이니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 국가신도는 기독교의 형식을 많이 빌렸습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에 창조주가 있고 구세주가 예수님이듯이, 일본 신도에 창조주가 있고, 구세주에 해당하는 천황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 예수님의 말씀을 세계에 전파하듯이 일본은 일본 민족이 세계적으로 천황체제로 만들어야 하겠다는 의지로 각지에 신사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 교리를 상당히 차용한 듯한,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 국가신도는 메이지 유신 이후 기독교에 해당하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 만들었습니다. 천황의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며 각지의 신사를 연결시킨 것이 국가신도, 살아있는 신도입니다. 기독교를 대신하여 종교를 만들자 하여 만든 것이지요.

▲ 뉴라이트 호주연합(회장 고동식 장로)은 세동대 호사카 유지 교수를 초청, 시드니와 브리즈번에서 독도 강연회를 개최했다. 사진은 시드니한인회관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인사하는 고동식 회장  ⓒ크리스찬리뷰

호사카 교수는 이런 작업만 없었다면 일본이 기독교 국가가 될 수도 있었다고도 하였다.

그 당시 기독교를 국교로 하자고 주장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학을 설립한 사람, 여러 분야에서 활약한 사람들 가운데 기독교인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국가신도가 만들어진 다음에 그 사람들이 없어졌습니다. 일본의 독특한 형태의 국가신도를 임의로 만든 것입니다. 국교로 만들자는 움직임 등 분분한 의견들이 있었지만 기독교인들의 주장이 끝까지 관철되지 못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천황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신사와 연결돼있었던 반면, 기독교는 역사가 없었지요. 또 일본이 2차 대전 때 기독교 국가들과 싸웠기 때문에 적국이었던 것도 한 요인입니다.

주목되는 주장이다. 좀 더 주의해서 들어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유태인에게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진짜 예수 그리스도는 일본에서 와서 살해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일제시대 때 예수님도 죽을 때 천황을 찬양하고 죽었다는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아주 유치한 이야기인데, 그런 이야기를 터뜨리면 재미있게 사람들이 들었습니다. 현재 일본 아우모리현에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이라 불리는 무덤이 있습니다. 기독교 국가와 싸우기 위한 논리로 만들었던 것이지요.

과연 조작과 왜곡에 천재적인 실력을 발휘하는 일본답다. 그랬기에 서슴지 않고 독도는 일본 땅으로 주장하고, 예수의 무덤도 일본에 있다고 증거물로 만들어 놓기도 한다. 이런 왜곡된 주장은 한반도를 넘어 중국과도 맞장 뜨며 도전하고 있다.

만주를 자기 나라로 하기 위해서 일본인들은 당시 마지막 황제 부위는 일본 사람들의 후손이다. 그러니 일본 사람들이 조상이다. 전쟁에서 패했던 무사들이 바다를 지나 만주에 많이 건너갔다. 만주에서 현지여성들과 결혼했는데, 만주 조상 중에는 일본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은 만주를 구하기 위해서 한다 그러면 아무 지식이 없는 보통 사람들은 그런가? 그럼 만주에 진출하는 것도 의미가 있네 하게 됩니다. 

천황의 시조는 백제인

그의 파격적인 주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백제인이 천황의 시조인 것을 학자적 진실로 증언해 주었다.

일본 사람들은 왕인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일본의 중심적인 사람들은 원래부터 일본 사람들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백제인이 일본에 기술적인 것은 많이 전해 주었고, 또 일본의 중심인 왕가는 가야나 백제에서 온 것인데 그런 것은 교묘하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일반인들을 교란시키고 있지요, 물론 전문가들은 알고 있습니다. 역사를 전공한 사람들은 참과 진실, 왜곡된 사실들을 알고 있지만 일반 대중은 모릅니다.

일본의 상식과 지식은 다릅니다. 상식은 통치행위로 만들어집니다. 통치나 치안상 필요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백제 사람들이 천황의 시조가 되는 것이 진실입니다. 이런 사실을 교육시키면 일본인은 없네하여 정체성의 문제가 생겨 그것을 막기 위해 안합니다.

통치행위와 진실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천황의 무덤, 호족들의 무덤을 발굴하지 못하게 합니다. 만일 하게 되면 조상들이 조선 한반도에서 온 것이 다 드러나기 때문에 발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서쪽으로 온 사람들은 한반도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일본에서 인류가 시작된 것은 아니니까요.

일부러 만든 왜곡들이 많습니다. 일본이라는 정체성이 있고,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옛날부터 한반도와 관계를 끊으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 호사카 유지 교수는 독도 문제만 주특기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한일 간의 아픔과 갈등, 미묘한 문제들을 뿌리부터 캐내며 원인과 결과를 명쾌하게 증명했다.  ⓒ크리스찬리뷰

일본인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일본에서 최고 명문 학교에서 교육받은, 일본의 수혜자로서, 한국인들도 잘 모르는 이런 사실들을 밝히며, 일본에 대한 정면 비판의 십자포화를 쏘아대는 호사카 교수! 그는 돈키호테인가? 일본의 시각에서, 일본이란 조국의 입장에서 보면, 배신이란 가장 무거운 멍에를 짊어질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한다.

일본이 나를 낳고 키워준 나라라면, 한국은 내가 평생을 바쳐 해야 할 일을 제시해준 나라입니다. 두 나라 모두 저에겐 조국인 셈이죠. 그렇다고 일본을 버린 것은 아닙니다. 일본에 대해서도 저는 진정한 의미의 애국을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일본이 그릇된 과거를 버리고 올바른 역사관을 갖도록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그릇된 역사관 시정이 내 소명입니다.

호사카 교수의 한국사랑은 아주 어린 시절 시작됐다. 그의 부친이 운영하던 사업체(플라스틱 렌즈 공장)에 종사하던 재일교포들이 그에게는 한국 길라잡이였다.

아버지 회사와 거래처에 재일교포가 많았습니다. 그분들 중에 물론 귀화한 분들도 있었고, 일본 이름을 가진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집에 생일 때나 잔치 때 초대를 받아 가면, 한국 여성분들이 부채춤이나 민속무용을 보여주었습니다. 무척 아름다웠고 친근감을 느꼈어요. 그때가 15세 무렵이었는데, 그 후 한국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이후 그는 계속하여 한국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좋은 인상을 갖게 되는 일이 빈번해졌다.

아버지가 서울대 교수들을 좀 알았습니다. 그분들이 일본에 오셔서 세미나 할 때 같이 심포지움에 참가하기도 했지요, 특히 서울대 기계공학과 박 교수라는 분은, 기계용어 사전을 만드신 분으로 초창기 기계공학과의 기초를 다지신 분입니다.

이 분은 일본사람들 중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굉장한 인격자였고, 나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습니다. 일본에도 인격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일본에도 없는 인격자가 한국의 서울대 교수였습니다. 아버지는 그분의 명함을 보여주며 굉장히 자랑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에서 뵙지는 못했지만, 혹 살아계시면 연세가 굉장히 많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 경험한 아름다운 한국춤, 굉장한 인격자인 한국의 석학, 그리고 일본에서 재일 한국인이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것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고 밝혔다. 스포츠나 연예계 등 재일 한국인이 굉장히 많았다고 했다.

굉장한 기록을 세운 사람들이나, 노래를 엄청나게 잘하는 사람들이나, 잘 생긴 사람들은 알고보먼 다 재일한국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중학교 시절에는 한국인 가라테 신화 최배달, 일본 프로레슬링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역도산 등을 보면서 한국을 동경했습니다. 

한국과 사랑에 빠지다

호사카 교수는 일본에 사는 한국인이 왜 그렇게 우수한가를 추적해 보면서, 오히려 일본에서 다른 길이 없어서, 그리고 일본 사람들이 길을 막아서 재일 한국인들이 스포츠나 연예계로 진출한 케이스가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학 시절 재일교포 친구들이 생겼습니다. 일본이름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엔 몰랐으나 친하게 되면 외국인 등록증을 보여줘요. 굉장이 다른 이름인데, 바로 한국 이름이었습니다. 그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던 70년대는 아직 일본에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굉장히 심했습니다. 차별을 받고 있었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 친구들이 상당히 어른스러웠고, 많이 성숙되어 있었습니다.

차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세대의 일본 사람들과는 많이 다른 것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친하게 되니 그들을 통해서 한국의 역사에 대해 많이 알게되었습니다. 70년대, 일본에서는 한국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한국을 많이 침략했다는 교재도 없었습니다.

그 친구들을 사귀면서, 잡지를 통해서 한국의 분단 원인이 일본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일본이 식민지 지배했기 때문이라고 친구들이 말해 주었다. 점점 그는 한국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언젠가는 한일관계에 대해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각오를 했다.

재일교포 모임 등에 나가 교포 행세를 할 정도로 한국 사랑에 푹 빠졌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잡지를 만났다. 그 잡지에는 19세기 후반 일본 정부가 자객들을 동원, 왕궁에 침입해 대한제국의 국모였던 명성황후를 죽였다는 짤막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상당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이건 엄청난 일입니다. 내 조국이 설마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의 천황 부인이 외국인에게 살해당했다는 말인데요. 그러면 일본 사람들은 외국인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의 분노는 일본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었지만 한국에 가서 한국말로 제대로 한국을 많이 배워야 한국 사람들의 마음과 사고방식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연한 기회가 와서 한국에 유학했습니다. 
 

▲ 시드니한인회관에서 열린 독도 강연회에서 호사카 유지 교수의 강연을 경청하는 교민들(6월 12일)  ⓒ크리스찬리뷰

명문 도쿄대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뒤, 가업을 이으며 평범하게 살던 그는 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한국 유학을 감행했다. 처음 고려대학교 어학당으로 들어가 한국어를 배웠다.

고대는 민족대학으로 서울대와 맞먹는 한국의 대학이라는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습니다. 9개월 정도 한국말을 공부했습니다. 재일교포들과의 관계로 한국말을 일본에서 많이 배운 덕분에 1년 코스를 9개월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고대 정외과에 3학년으로 편입하여 정외과에 필요한 1년간 필수과목을 이수하고, 대학원 석사 박사 과정으로 진학했습니다. 원래 역사를 좋아했지만 아버지의 권장으로 어쩔 수 없이 공대로 진학했는데, 사실 공대 체질이 아니었습니다.

공대 졸업하고, 전공을 바꿀 생각을 했습니다. 역사를 아주 좋아했지요, 제대로 전공을 바꿨습니다. 정외과를 선택한 것을 근현대사를 공부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근현대사, 한일관계 중심으로 한 비교정치가 전공인데, 메이지 시대 이후 한일관계를 주로 공부했습니다.

민족 고대에서 한국과 더 깊은 사랑에 빠진 그는 일본통인 조정남 교수의 지도로 한국의 조선개화파와 일본의 관계를 연구한 일본의 한국침략 배경 연구로 석사학위를, 식민지 시대의 조선 만주 대만에 대한 일본의 지배정책을 연구한 일본 제국주의의 민족동화정책 분석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3년 세종대 교수에 임용됐다. 


독도에 천착하다

그 연장에서 독도문제가 나왔고, 역사왜곡 문제도 나왔습니다. 독도도 일본의 식민지 시대에 생긴 문제이고, 일본의 침략 때에 생긴 문제입니다.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것이 많았습니다. 식민지 시대를 공부한 나에게 있어서 현재 한일 간에 벌어지고 있는 독도, 아스꾸니 신사, 역사왜곡문제 3가지는 한일 문제의 현안인데, 전공한 내용의 연장선상에 있는 문제였습니다.

특히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한국의 90년대 말부터 대학에서 가르쳤는데, 그때마다 학생들이 나에게 독도가 어느 나라 땅이라고 생각하느냐고 수업 중에 자꾸 물었지만 잘 몰랐다가 심도있게 연구했습니다.

이런 계기로 독도문제에 끝장을 본다는 각오로 매달리기 시작했다. 결론을 갖고 시작한 연역적인 연구가 아니었다. 학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독도는 어느 땅인가를 추적해 가는 귀납적 연구였다. 일본의 책과 자료, 한국의 자료 책을 계속을 읽어나가니 상당히 많은 것이 발견되었다. 일본이 독도에 대해서 상당히 은폐하고 숨기고 있는 자료들이 있음을 발견했다. 치명적인 자료나 공문서를 숨기고 있었다. 양쪽의 주장을 객관적으로 비교분석하면서 일본이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단 이것은 누구 편에서 서서 연구한 것이 아니고 학문적 신념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가 어떤 말을 해도 진실이 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독도는 양쪽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국 쪽 주장이 여러 방면에서 세계에서 밀리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일본이 갖고 있는 힘 때문이지요. 한국인에게 왜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지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한국의 지식인 중에서도 독도가 왜 한국의 영토임이 타당한가에 대한 논리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1%가 채 안됩니다. 그냥 망언이라고 감정적인 수준에서 대답하는 정도지요.

▲ 강연을 마친 후 참석자들과 함께 ‘독도는 우리땅’ 을 흥겹게 합창하는 호사카 유지 교수(가운데). 왼쪽부터 뉴라이트 호주연합 고동식 회장, 정한준 부회장, 오른쪽은 승원홍 한인회장 부부  ⓒ크리스찬리뷰

반면에 일본인들 중 10~20% 정도의 지식인들은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논리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 및 반환 요구를 끈질기게 주장하는 이유 중에는 한국인들이 논리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 상당히 큰 이유입니다.

냉철하고 철저한 고증과 근거를 바탕으로 체계적인 논리와 세계적인 홍보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한국에겐 승산이 없습니다. 한국은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을 무조건 일고의 가치도 없다며 무시하지 말고 정확한 근거를 제시,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설득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감정이 아닌 논리로

물론 그는 독도문제는 한국이 역사적으로도, 국제법상으로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영토라는 것이 분명한 입장이다. 그러나 일본은 분명한 한국의 영토를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일본 것으로 만들겠다는 치열한 전략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속셈을 간파해야 한다고 했다.

소위 조용한 외교로써는 해결할 수 없는, 해결이 안되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일단 일본 측의 주장을 완전히 비판하고 극복할 수 있는 학술적인 연구를 계속하고 논리를 개발해야 합니다. 오히려 조용한 외교라는 관점에서는 일본이야말로 독도에 관해서 조용한 외교를 치밀하게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한국 사람들이 독도가 한국땅이라고 외쳐도 일본에서는 대응하지 않고, 일본인들의 주장을 세계의 핵심적인 인물들에게 주장을 굉장히 설득력있게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도 일본 사람들이 만든 영어 사이트가 굉장히 많습니다. 독도라는 검색어를 치면 일본 사람들의 입장에 선 내용들이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 질량면에서 한국의 영어판 인터넷 사이트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독도 문제에 대해서 해야 할 일, 인식해야 할 일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호사카 교수는 대표적인 경우로, 안이한 태도로 가만히 있다가 당한 경우로 지난해 미 지정 지도에서 일주일 간 바뀐 적이 있음을 들었다.

당시 부시 대통령이 원상회복을 명령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 상당히 바꾸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저들은 굉장히 물밑 작업을 치열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1회성 강경 대응이나 항의도 물론 필요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를 더 연구해야 합니다.

한국은 독도 관련 세미나를 개최할 때 축사를 해주는 고위인사들조차 독도의 핵심쟁점 사항이 무엇인지, 일본 측의 주장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막연하게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주장하는 것보다는 사회지도층을 중심으로 일본의 분쟁지역화 움직임에 대응논리를 강화해 나가야 합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이후 검토 결과 독도는 한국의 땅이 맞다고 인정하는 미국 측 비밀문서가 발견된 것 같은 객관적 자료를 가능한 많이 모아 일본의 주장을 반박하며, 일본 측에 수시로 제시해야 합니다.

호사카 교수는 한국과 다른 일본의 독도 접근 방식도 간파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한국은 독도에 대해 영토와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은 일본이 무력으로 1905년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킨 것에 대해 깊이 반성하면 독도에 대해 도발해오지 않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독도 문제를 역사로 접근하면 한국의 전략에 말려들기 때문에 영토로만 취급하려고 합니다. 영토문제에 한정되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문제로 둔갑합니다. 이 차이점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지 앞으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이미 역사적으로는 독도는 분명히 한국땅입니다. 1696년 에도막부(중앙정부)가 돗토리 번(현재의 현)에 다케시마(당시 울릉도), 마쓰시마(독도)의 소속을 물었고, 돗토리번은 자신의 번 소속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또 1877년 일본 내무성은 다케시마와 외일도(독도)를 시마네현 지적(地籍)에 넣어도 되느냐는 확인 요청에 태정관(당시 최고권력기관)이 일본과 관계 없다고 밝히는 등 여러가지 역사적 근거 자료는 충분합니다. 그러나 영토문제로 들어오면 현 일본 정권은 정부가 직접 나서지 않고 학계와 지역 보수 시민단체, 자치단체에 맡겨두고 있습니다. 이들로 하여금 영어, 불어 등 외국 언어로 번역된 다케시마 홍보 책자를 세계 각국에 배포할 예정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호사카 교수는 표면적으로 한․일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학계 등 두뇌집단을 동원, 새역사교과서 등을 통해 한․일 양국간의 긴장 효과를 조성하는 것이 일본 정권의 스타일이라고 밝혔다.

현재 집권당인 자민당 내에는 독도 연구 모임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으며, 일본 특성상 이 모임이 연구소로 확대되고, 결국 국민적 힘을 결집시킬 수 있는 큰 기관으로 변모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크리스찬리뷰

행동하는 지식인

흔히 우리는 일본을 가깝고도 먼나라라고 한다. 이제까지 살펴본 일본의 음험한 모습을 보면, 그들은 황당무계하다할 정도로 치밀한 논리를 동원하여 사실관계를 뒤집어엎을 정도의 배짱(?)으로 국제무대를 종횡무진하고 있다.

양심적인 지식인, 호사카 교수가 한국과 일본은 숙명적으로 이웃 나라이기 때문에 사이좋게 지내야죠.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사실에 입각해서 바로잡아야 합니다라고 하는 말은 오히려 가려운 곳 긁어주는 정도의 덕담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러면 왜 일본은 그토록 독도를 그들의 땅으로 고집하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호사카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이는 유엔이 배타적경제수역(EEZ)을 12해리에서 200해리로 확대하는 방안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해 94년 국제법으로 결정한 것과 직결됩니다. 결국 일본은 독도와 독도 주변의 수역, 동해 진출에 궁극적인 관심이 있는 반면 한국은 독도에 더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내면을 꿰뚫어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독도와 인근해양을 한․일 공동관리 구역으로 만드는 것이 첫 번째 목표입니다.

그리고 독도 문제가 밀리면, 기타 러시아와 북방 영토문제, 대만과 중국 사이에 있는 조도 문제도 밀릴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니 일본은 아무리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 것으로 알고 있어도 양보하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일본이 그런 면에서 힘의 논리를 적용시켜서 영토문제를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한마디로 일본이 분쟁지역화 하려는 북방 4도와 센카쿠 열도에 힘을 받게 하기 위해서라도 독도문제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필자는 오랜만에 양심적인 지식인, 행동하는 지식인을 만났다. 비록 한국으로 귀화했다고 하지만, 또 아무리 사실이라 할지라도 모국인 일본을 향하여 이렇게 예리하게 지적할 수 있다는 것은 육체적, 정신적, 학문적 생명을 걸지 않으면 결코 행할 수 없는 행동임을 안다. 그럼에도 그는 일본에 절대 당하지 마라 등의 저술과 새 역사 교과서와 한일 관계를 비롯한 다수 논문을 통해 일본의 잘못된 역사 인식을 가차없이 지적하고 있다. 고뇌하는 지식인의 마음고생과 진실을 향한 열정을 읽을 수 있는 말을 들려주었다.

“일본에서는 인터넷 사이트에 나에 대한 공격이 상당히 많습니다. 내 이름을 입력시키면 80-90%가 공격하는 사이트로, 200-300개 정도 됩니다. 나를 향한 지적 살인일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일단 내가 어느 편에 서느냐는 내 주장에 근거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무시하지 못하고 있지요, 오히려 내가 주장하는 내용을 일본에서 받아들인 부분도 있습니다. 아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한국에 온 일본 사랍들이 일본어로 독도 강의를 해달라는 사례가 몇 차례 있기도 합니다. 
 

어떤 기회에 왔던 대학생들이 30명 정도가 내 강의를 듣고 싶다고도 했고요. 어떤 단체가 일본에 초청하려고 했는데, 일본에 가면 초청에 반대하던 사람들도 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한국에 와서 강의를 듣는 경우가 120명 정도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 중에서도 왜곡된 부분을 뛰어넘어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움직임이 늘어날 것이고, 당연한 흐름이 될 것입니다.”

어쨌거나 그의 활동이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면서 일본 우익의 테러 위협이 심해진 탓에 그와 가족들의 불안감이 커졌다. 일본 언론에 자신의 활동이 작게 소개되어도 그를 비방하고 테러를 암시하는 댓글이 수천 건씩 올라온다.

그는 요즘 일반인을 상대로 한 공개강좌를 열 때마다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한다. 이메일 등을 통해 그와 가족에 대한 테러 위협이 전해질 때마다 공포를 느낀다고 하였다. 그래서 가족에 대해서는 최대한 말을 아끼고 있었다.

일본에서 그와 비슷하게 양심적인 활동을 하는 학자들도 가족을 밝히지 않는다고 하였다. 단지 그의 가족에 대하여는 한국 여성과 일본의 어느 심포지움에서 만났다가 국경을 넘어가며 먼거리 연애를 하다 86년도에 결혼했다고 하였다. 결혼식은 일본에서 했고, 한국에서도 했다고 하였다. 딸은 일본대학에 입학했다가 한국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일본 대학을 휴학하고 재수하고 있다고 하였다. 고등학생인 아들 그리고, 막내가 중2라고 하였다. 한국에서는 일본인이란 이유로 차별을 느낀 적은 없다고 하였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는 독도 문제를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와 한국의 선비문화로 풀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논리와 명분을 중시했습니다. 정쟁의 핵심에는 늘 논리와 명분 싸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논리와 명분은 넓은 지지 기반을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었고, 나라를 이끌어 가는 힘의 중심이었습니다.

반면 일본은 오랫동안 사무라이, 즉 무인이 지배하는 사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력으로 패권을 다투는 전쟁이 700년 간 계속됐습니다. 일본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팽창주의 특성을 가진 사무라이 문화가 얼마나 잔혹한지,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내재된 침략정신이 얼마나 철저하고 치밀한 지를 한국인들이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더욱이 중국까지 급속히 성장하기 때문에 한국이 강대국이 되지 않으면, 과거에도 그랬듯이 이웃한 중․일 양국에 밀리고 또다시 당할 수밖에 없다는 한국의 국제정세에 대한 그의 지론을 들으니 새로운 경각심이 들었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선교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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