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필연, 그 섭리의 드라마

데이비스 선교사, 스카츠 교회, 그리고 창신싱어즈

글|송기태,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1/07/25 [10:30]
우연이란 모습의 섭리

하나님께는 ‘우연’이라는 게 있는가? 아니면 모든 것이 섭리(providence)인가? 혹은 섭리 속에 우연이, 우연 그 속에 섭리가 함께 공존하는 것인가? 우리는 성경에서 룻이 밭에서 이삭을 줍다 보아스를 만나는 것이 과연 ‘우연과 섭리’ 가운데 어느 쪽에 무게 중심을 있는가를 생각해 보도록 만든다.
 
▲ 창신대학 교수들로 구성된 창신싱어즈가 ‘호주-한국 우정의 해 2011’에 멜본 스카츠교회에서 이틀간 연주회를 펼친다.     ©크리스찬리뷰


또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는 장면도 나온다. 그러나 천사의 입장(시각)에서 보면, 천사가 어떤 목적하는 바가 없이 우연히(부지중에) 이 땅에 현현(顯現)했을까? 하나님의 심부름꾼인 천사가 우연히 현현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우연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 우연의 우연이 하필이면 아브라함을 만난 사건으로 연결되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말 ‘지극히 보기 드문 현상’ 곧 ‘우연’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에서로부터 야곱으로 축복 이동(shift of Grace), 역시 우연한 사건이었는가? 요셉이 애굽에 팔려간 것이 우연한 이야기인가? 요셉은 소위 뜻밖의 기회를 잘 포착하여 자수성가한 것인가?

아,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우연! 그것은 분명 우연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성경의 모든 역사는 우연한 사건들이 모여서 하나의 필연적인 결과를 만들어낸 편집물이 아니다. 성경의 모든 역사는 우연이란 모습으로 나타난 사건을 추적하면 반드시 ‘필연적인 실체’가 발견된다.

우리는 이를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라고 한다. 굳이 성경뿐만 아니다. 교회사의 모든 사건도 그러하고, 우리의 일상사가 다 그렇다고 보면 된다. 지내놓고 보면 모두가 모든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 은혜와 경륜, 그리고 섭리의 결정체임을 깨닫게 된다. 단지 하나님의 때는 단지 우리가 생각하는 때보다 늦게 나타나기 삽상이라 그것을 깨닫는 것이 늦어질 뿐이다.

▲ 데이비스는 한국 선교를 떠나기 전 누이 메리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크리스찬리뷰


 한 통의 편지와 데이비스의 만남, 우연인가 필연인가?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우연-필연@섭리’의 사건과 사람의 얼개를 맞추어보고자 한다.

8월에 출생하고, 8월에 목사 안수를 받아 선교사로 거듭나고, 8월에 호주에서 한국으로 떠난 ‘조셉 헨리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 한국명: 덕배시)라는 한 인물을 만난다. 그가 누구인가? ‘한·호 수교’의 첫 관문을 통과한 ‘민간 외교관’이자, 호주에서 한국으로 파송된 첫 선교사이다. 여기서 잠깐 그의 삶의 행적을 추적해 보자.

그는 차가운 겨울 1856년 8월 22일 뉴질랜드 왕가라이에서 9남 4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4살 때인, 18 60년 부모를 따라 호주 멜본으로 이민왔다. 멜본대학 재학 중이던 1876년 곧 그의 나이 20세 때 직접적으로 복음에 헌신하기로 작정하고, 호주 씨앰에스(CMS)소속 인도 선교사로 자원하였다.

이것은 선교사로서 그의 생애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결단에는 그의 누이동생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그의 여동생 사라는 아직 10대 소녀에 지나지 않았으나, 1875년 남부 인도 벨로레에 CMS 선교사로 파송됨으로써 인도에 파송된 호주 역사상 최초의 여선교사가 되었다.
 
▲ 중세 고딕 양식의 스카츠교회 첨탑 높이는 120피트로 오랫동안 멜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크리스찬리뷰


데이비스는 그의 동생으로부터 인도에 선교사가 매우 부족하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인도로 향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건강 때문에 인도에서의 그의 사역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건강의 악화로 더 이상 선교지에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자 그는 결국 선교사로서 우선 합당한 자질과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은 채 1878년 5월 21일 멜본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인도에서 보낸 21개월간의 사역은 앞으로의 그의 생애를 위한 중요한 교훈을 남겨주었다.

멜본으로 돌아온 그는 1881년 4월 코필드그래머스쿨을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5세 때였다. 어린 동생들이 장성하여 자립하고, 1886년 그의 모친이 소천하자 더 이상 가정과 가족에 얽매이지 않고 다시 선교지로 돌아가기로 작정했다. 그리하여 지난 7년간 키워 온 학교를 앵글리칸 E. J. 바르넷 목사에게 인계하고 1888년 4월 다시 인도 선교사로 지원하였다.

 
▲ 스카츠교회 리저오르간     ©Scots’ Church

 
여기서 데이비스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인 편지 한 통’과의 만남을 본다. 이 편지는 중국 푸초(福州)에서 선교하던 CMS 소속 월푸(J. R. Wolfe) 선교사가 쓴 것이었다. 월푸는 1887년 힘들게 부산을 방문하고 선교지인 중국으로 돌아갔다. 선교사 없는 부산에 선교사를 보내주도록 여러 곳에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이렇게 되자 월푸 목사는 부산 방문기와 한국선교사가 필요하다는 편지를 멜본의 매카트니(H. B. Macartney) 목사에게 보냈다.

이 편지를 받은 메카트니 목사는 이 글을 자신이 발간하는 선교잡지 <국내외선교>(The Missionary at Home and Abroad)지에 게재했다. 다시 인도로 돌아가고자 했던 데이비스는 바로 이 편지를 읽고 한국이 인도보다 더 시급한 복음전도지라는 점을 인식하고 인도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가기로 결단하였다.

 

▲ 스카츠교회 색유리창     ©크리스찬리뷰


이 한 통의 편지는 젊은 청년 데이비스로 하여금 한국으로 그리고 부산으로 오게 하며, 그의 운명을 바꾸게 한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다. 그 뿐만 아니다. 데이비스 이후 126명의 호주 선교사들이 한국과 부산, 경남지방으로 향하게 만든 첫 단추가 된 것이다.

데이비스와 한통의 편지와 만남, 그것이 우연일까 필연일까?

 
데이비스·스카츠·창신싱어즈, 그 필연@섭리 법칙

이 한 통의 편지는 청년 선교사 데이비스에게 소속도 바뀌게 했다. 그는 한국 선교사가 되기 위해 데이비스는 그때까지 몸담아 왔던 앵글리칸교회의 관계를 단절하고, 빅토리아주 장로교회로 이적하게 되었다. 멜본 남노회는 데이비스가 영국 에딘버러대에서 신학 교육을 마치고 시험에 합격하면 목사로 안수할 것을 가결했다. 에딘버러대에서 단기 신학교육을 받고 1889년 5월 13일 호주로 돌아온 데이비스는 스카츠교회에서 8월 5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 창신싱어즈는 2004년 8월 크리스찬리뷰 초청으로 시드니와 캔버라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사진은 시드니콘서바토리움 공연 장면     ©크리스찬리뷰


여기서 우리는 데이비스와 그가 안수받은 스카츠교회, 창신싱어즈, 그리고 그가 목사 안수받은 8월 5일이란 기막힌 일치를 발견한다.

여기서 우리는 스카츠교회와 창신싱어즈를 차례로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1835년 존 배트맨이 타스마니아에서 배를 타고 건너와 첫 이민자들을 위한 예배를 드림으로써 멜본 최초의 교회가 된 스카츠교회(스코틀랜드교회)는 빅토리아 장로교의 거점교회로 성장하였다.

1869년 유명 건축가 리드(Reed)와 바네스(Barnes)가 설계한 현 건물은 중세 고딕양식으로 장로교회 건물양식으로는 약간 독특한 편이다. 교회 첨탑 높이는 120피트로 오랫동안 멜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이 교회는 호주가 낳은 유명한 소프라노 가수이자 교회 성가대원으로 활동한 데임 넬리 멜바(Dame Nellie Melba)의 부친 데이빗 미첼이 준공했다고 한다.

 
▲ 창신싱어즈 연주회 첫날 찬조출연하는 스카츠교회 성가대     ©크리스찬리뷰


이 유서 깊은 교회는 멜본 교회음악의 발상지답게 리저 오르간으로 유명하다. 4단과 68개의 스피킹 스톱을 가진 리저 오르간은, 유명한 오르간 설계자인 리저 오겔바우의 고향인 독일 남부 슈와잭에서 온 팀에 의해 1999년 11월 28일 주일 스카츠교회 125주년 기념예배 때 헌정되었다고 한다.

두 부분으로 구성된 오르간은 큰 주요 오르간은 서익부에 위치해 있다. 작은 갤러리 오르간은 콜린스 거리 쪽에 위치해 있다. 모든 부분은 큰 주요 오르간으로부터 연주된다. 2000년 3월, 바하 250주년 기념 콘서트가 개최되면서 오르간은 멜본 전역에 공개되었다. 이 연주회는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성 스테반 대성당 오르간 연주자인 피터 프랜야브스키와 호주 유명 오르간 연주자들의 공연으로 4주 동안 열렸다. 이전 오르간은 1874년, 조셉 리드에 의해 제작된 삼나무 케이스에 보존되어 있다.

오르간과 성가대석 맞은편에서는 서쪽 벽 창문이 보인다. 왼편 창문에는 ‘성전을 정화하시는 그리스도’가 오른 편에는 ‘아이를 통해 겸손을 가르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인다.

 
▲ 창신싱어즈 연주회 둘째 날 찬조출연하는 피아노 트리오     ©크리스찬리뷰

 
멜본 최초인 스카츠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데이비스는 한국의 첫 선교사로 파송받고, 이후 그의 뒤를 따라 한국으로 파송된 호주 선교사들은 경남, 부산 지역의 도시마다 무수한 최초의 교회를 설립한다.

멜본 최초의 교회가 경남, 부산 지역마다 최초의 교회를 개척하는 산파역을 담당한 것은 우연일까, 섭리일까?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이 있다. 유명한 소프라노 가수로 성가대원이었던 데임 넬리 멜바의 부친인 데이빗 미첼에 의해 준공된 스카츠교회는 교회음악의 맥박이 뛰고 있는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데이비스 선교사 역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으리라. 이후 빅토리아 장로교 선교사들 중에 음악에 조예가 깊은 이가 경남, 부산 지역에 서양음악을 보급한 이가 적지 않았다.

특히 1932년 미혼의 청년으로 선교하다 선교현지에서 소천한 알렌 선교사의 경우는 서양음악으로 한국 교육사에 남을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데이비스 선교사 후예로 한국에 파송된 A. 아담슨 선교사는 1901년 마산 최초의 교회인 마산포교회(오늘의 문창교회)의 설립자이자, 이번 멜본 스카츠교회에서 공연한 창신싱어즈의 모태가 되는 창신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마치 데이비스 선교사가 코필드 그래머스쿨을 설립했던 것처럼.

스카츠교회의 정신이 흐르는 창신학교에서는 한국 음악과 문학을 완벽하게 조화시켜 국민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며 감성을 터치한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한 것도 우연일까 필연일까?

창신이 배출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남쪽 바다’ 마산이 낳은 인물이기도 한 노산 이은상 선생이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물 흐르듯 거침없이 이어지는 선율로 하여 온 국민의 귀를 울려줌으로써 예술 가곡에 대한 진수를 맛보게 했다. 8.15 이후 가곡 인구의 저변 확대에도 적잖은 구실을 한 공을 높이 사야할 이 곡의 노래말을 쓴 노산은 창신학교 초등과와 고등과 및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다시 창신학교 고등과 교사를 역임하기도 한 한국문학계의 거장이다.

 

▲     ©크리스찬리뷰

 
저 유명한 ‘산토끼’를 비롯하여 ‘오빠생각’ ‘해바라기’ ‘단풍’ ‘반딧불’ 등 우리 귀에 익숙한 동요를 작사 작곡한 이일래 씨는 이은상 선생처럼 창신 초등과와 고등과를 졸업한 후 모교 교사로 봉직한 적도 있었다. 그는 복음성가도 작곡했는데, ‘요한복음 3:16’ ‘시 23편’을 작곡하기도 했다. 1938년 ‘조선 동요작곡집’을 냈는데, 이 속에 ‘산토끼’와 ‘시편 23’을 비롯하여 주옥같은 동요 21편이 수록되어 있다.

창신 초중등학교에서 성장한 인물들이 해방 이후 국민정서를 일군 음악의 샘줄기는 창신싱어즈라는 ‘수력발전’까지 일으키게 된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더더욱 그 창신싱어즈들이 창신의 태반이 되는 스카츠교회, 그것도 창신의 시조가 될 데이비스 선교사가 안수받은 바로 그날, 그곳에서 공연하게 된 것도 우연일까, 필연일까?

 
8월에, 8월에

빅토리아 장로교단의 목사가 된 데이비스 선교사는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았다. 그의 누이 메리 데이비스는 뜻있는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멜본교회 기독교연합회(Suburban Christian Union)의 지원으로 한국으로 향했다. 처음 한국 선교는 빅토리아주 장로교회 해외선교부를 통해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겨우 창립 1주년 밖에 안된 26개 교회 청년 약 300여 명으로 구성된 청년연합회를 통해서 시작되었다.

이들의 후원으로 데비이스 선교사 남매는 1889년 8월 21일 오후 기차 편으로 멜본을 떠나 시드니에 도착했다. 8월 28일 증기선 치난호를 타고 증기선으로 브리스베인을 경유하여 9월 2일 다윈항에 도착했다. 9월 12일 오후 3시 호주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출항하여 9월 21일 오전 7시 홍콩에 도착, 해변 휴식과 런던선교부를 방문했다.

9월 28일 투키오 배편으로 비가 오는 가운데 홍콩을 떠나 9월 30일 아침 일찍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그리고 1889년 10월 2일 이른 아침 부산에 도착하였으며 일본인 거주지를 돌아본 뒤 오후 4시 부산을 출발하여 남·서해안을 돌아 10월 4일 오전 11시 인천에 도착했다. 10월 5일 말을 타고 서울에 도착하여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최초 선교사로 미국 선교사들의 환영을 받았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다음날(10월 6일) 언더우드가 설교하는 외국인 연합예배에 참석하였으며, 한국어 공부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10월 8일 월세로 집을 빌렸으며, 11월 3일 외국인 연합예배에서 “고난 받는 종”에 대하여 설교하고, 11월 5일에는 학교에서 첫 성경 강의를 했다. 1890년 1월 1일에는 헤론, 기포드 선교사와 축호전도를 했다.

1월 7일 영국 총영사 서리 힐러를 만나, 한국 내륙 여행허가를 한국 정부에 요청하여 독판교섭통상사무 민종묵으로부터 경기, 강원, 충청 지방을 순회할 수 있는 여행 허가증을 받았다. 1월 16일 기도회 인도를 마치고, 1월 19일 처음으로 한국인에게 성찬식을 집례했다.

당시 언더우드 선교사 부인은 데이비스에 대하여 “남편과 똑같은 열정적인 정신, 힘, 언어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두 사람은 완전히 마음이 통하여 협력자로 동역하기를 원했다”라고 했다.

그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따라 서울과 평양 등에 이미 다른 교단이 정착하였기에, 선교지 개척을 위하여 1890년 2월 28일 한국 정부로부터 전라, 경상 지방 여행허가를 받아 서울-부산 간 장거리 여행을 도보로 출발했다. 그리하여 1890년 3월 14일 서울에서 어학선생과 수행원을 대동하고 판매 목적의 성서와 전도지와 상비약을 준비하여 과천-수원(3월 15일)-천안(3월 18일)-공주(3월 20일)-경천(3월 21일)을 순례했다.

수원성을 거닐 때는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둘러싸이기도 하고, 로스역 마가복음과 요리문답서를 팔기도 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며, 천안 삼거리 여인숙에서는 목화솜을 파는 호남지방 상인들과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설교도 했다. 공주를 지나면서 금강과 계룡산의 풍경은 아름다운 라인계곡을 연상케 한다고 했다.

계속하여 논산(3월 22일)-전주(3월 24일)-오수(3월 25일)-남원(3월 27일)-하동(3월 29일)을 거쳐 지리산 기슭 산악 지역을 통과했다. 전주를 향해 걸어 갈 때에는 많은 비로 인하여 길이 물에 잠겨 장화를 벗고 걸어야 할 정도였다. 지리산 지역에서는 호랑이 울음소리도 전해 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서울에서 남원까지 670리를 걸었을 정도로 강행군이었다.

그의 선교지를 향한 열정과 애정은 그칠 줄 몰라, 그토록 힘든 여행 중에도 매일 5-6시간씩 공부하면서 사람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듣고 조금씩 말을 하려고 노력했다. 마지막 부산 행로는 진주(3월 31일) 부근을 경유한 것으로 추정되나 그 후의 경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그는 무리한 도보 여행을 하는 가운데 추운 날씨와 불편한 잠자리, 맞지 않는 음식으로 허약해진 체질에 폐렴과 천연두에 감염되어 마지막 5일간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카나다 게일 선교사의 도움으로 4월 4일 비 오는 금요일 부산으로 이동하였으나 병세가 악화되었다. 일본인 병원에 입원하여 하룻밤을 병상에서 지내다가 치료도 제대로 받기 전에 1890년 4월 5일 순직하였다. 임종을 지켜본 게일은 “그는 병원에서 죽어가면서 내게 뭔가를 말하려 했다. 오후 1시 평온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다”고 함께 온 누이 메리 선교사에게 편지했다.

이처럼 8월에 (5일) 목사 안수 받고, 8월에 (21일)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은 데이비스 선교사는 선교지에서 비록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불꽃처럼 살다 갔다. 그 8월에 그의 후예들이 열매 맺은 창신싱어즈들이 그의 숨결이 깃든 스카츠교회로 온다.

그가 그토록 사랑하며 죽어간 주를 찬양하기 위하여.

그가 그토록 사랑한 선교지의 음성을 갖고서.

데이비스와 한국의 섭리 같은 특별한 만남의 씨앗의 씨앗은 셀 수가 없다. 그 씨앗이 맺은 열매마다 그의 사랑이 담긴 따뜻한 눈빛과 깊은 사랑으로, 그의 한국 사랑을 기념했으면 한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꿈꾸었던 일들이 날이 갈수록 더 풍성히 이루어지도록 서로 응원하는 8월엔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순간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데이비스와 한국의 만남! 그것은 분명 굽이굽이에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숨겨진 하나님의 큰 섭리였다.〠

 

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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