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용조 목사-커버스토리(2004.6)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1/08/02 [14:44]
예수께서 꿈꾸신 바로 그 교회를!-커버 스토리(2004년 6월호)
 
추억의 타임머신
 

▲   하용조 목사  ©크리스찬리뷰
 
 
 
▲  하용조 목사   ©크리스찬리뷰

92년 1월 어느 잡지 편집실, 결혼 휴가를 마치고 막 출근한 여기자가 그 달치 잡지를 펼쳐보고 얼굴이 하얗게 퍼졌다. 평소 깐깐하게 일 잘하기로 이름난 그는 인생의 가장 중대사인 결혼식을 고려하여 두 달치 인터뷰를 미리해서 원고를 넘겼다. 널널한 마음으로 ‘무사히’ 결혼도 하고, 신혼여행도 잘 다녀왔는데, 그만 사고가 터진 것이다.

사진이 몽땅 다른 사람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순간, 편집장은 몇 년 전의 유사한 사건이 악몽처럼 떠올랐다(87년 3월). 그때는 특정인의 명예훼손이 될만한 한 문단 정도의 원고로 말미암아 완간된 책을 몽땅 페기처분하고 새로 찍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수천만 원의 부과비용이 들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번의 경우도 일의 전개과정은 불을 보듯이 뻔했다. 특히 6개월 전에는 J교수의 원고 때문에 특정기관(이단에서 집요하게 공격해 오고, 재판을 걸어와 이미 변호사 비용으로 수백 만 원이 지출된 상태였다. 역시 필요 외의 재정손실이 난 것이다.

그대로 배포하고 다음 달에 사과 광고를 하는 방법, 그 부분만 새로 인쇄하여 추가로 제공하는 방법 등 별별 방법이 논의되었지만, ‘흠도 티도 없는’ 완전한 책을 추구하는 발행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

어쨌든 사고가 발견된 그날은 그 부분을 뜯어내고, 다시 인쇄하여 제본하기로 결정하고, 그 일처리로 정신없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발생된 정신적, 재정적 손실은 여기서 계산하지 않기로 하자.

이런 우여곡절 끝에 독자의 손에 책이 도착해졌을 무렵, 편집장은 사표를 써서 안주머니에 넣고 발행인의 방을 노크했다. 혼자 찾기엔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아 동료이자 친구인 C군과 함께 찾았다.

발행인: “이번 일로 많이들 괴로와했을 테니까 아무 것도 안묻기로 했어.”
편집장: (겨우 얼굴을 들고, 믿기지 않은 표정으로) “예-?”
발행인: (씩 웃으며) “괜찮아,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지? 그것으로 충분해.”

그리고 그날 점심시간에 편집부 일행은 삼각지 춘천막국수 집으로 직행했다.
안주머니에 넣고 간 사표는 꺼내보지도 못한 편집장의 등을 C군이 툭 치면서 큰소리로 말한다.

“송기태가 하 목사님을 만난 것은 일생일대의 행운이고, 하 목사님이 송기태를 만난 것은 일생일대의 비극이다!”

그 말에 모두가 유쾌하게 웃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필자는 그날 처음으로 ‘용서의 기쁨’을 경험했다.

하용조 목사! - 그의 이름은 필자에게 참으로 다양한 의미로 다가온다. 20대 후반 청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인생의 멘토로서, ‘가치있게 사는 삶의 의미’를 깊이 각인시켜준 장본인이다. 복음주의 신앙노선을 걸을 수 있는 나침반을 쥐어주었고, 평생에 자부심을 가질만한 일거리도 제공해 주었다.

10여 년동안 필자는 그가 제공한 삶의 터전에서 젊은 시절을 갈무리해오면서, 그의 탁월한 문화감각과 시대를 앞서가는 통찰력에 감격했다. 또 가치있는 일을 위하여 앞뒤 가리지 않고 밀어붙이는 추진력,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한 번 신뢰하고 맺은 관계의 끈은 결단코 놓지 않는 그의 성품은 감동, 그 자체였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익히 알려진 대로 선지자적인 설교가요, 사도적인 목회자로 한국 교계의 대표적인 오피니언 리더이다. 이미 그의 숨소리까지도 한국교계에 크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생은 수동태

일생 그의 사랑에 빚진 자된 필자는, 시드니를 방문한 그를 만난다는 설레임으로 과속 범칙금을 물기에 아슬아슬한 속도로 차를 몰았다. 발끝이 떨려왔다.

“목사님, 건강은 어떠십니까?”
“유리그릇이야. 무리를 못해.”

추억의 앨범 속에 들어있는 그의 ‘건강’은 모든 이의 변함없는 화두였고,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나 절절 끓는 열정은 언제나 건강의 한계를 극복하는 듯했다. 그때는 간염과 당뇨였다.

“99년, 그러니까 4년 전 미국에서 처음으로 간암 수술을 받았어. 이전까진 죽음에 대하여 생각지도 않았어. 막상 네 번이나 간암 수술을 받으면서, 건강이 이러니 인생은 우리가 어떻게 해나가는 능동태가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수동태라는 생각이 들었지. 당장 급한 게 온누리교회는 누가 끌고 가느냐였어.

내가 없어도 굴러가도록 부목사들 중심의 집단 운영체제로 시스템을 바꾸고, 부목사들에게도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어. 이제 내가 없어도 온누리가 잘 굴러가니, 아팠던 게 화가 아니라 오히려 복이었어.”

생사를 초월한 조용조용한 목소리는 ‘수동태’ 인생인 주제에 ‘성공에 과민’한 오늘의 세태를 향한 선지자의 충고처럼 들렸다.

일본에서 아무도 몰래 2개월 동안 조용히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있었던 진귀한 경험을 들려주었다.

“그때 어느 권사님 댁에 민박을 했어. 그 집에서 한국 여성들이 전도한 야쿠자들로 구성된 교회가 시작되었던 것이야. 모셔다 놓은 한국 목사님이 떠나고 5-6명 남아 있었어, 목사가 없으니 내가 설교를 하게 되었어. 그게 교회였어. 15명 정도 모이게 되었는데, 교인 한 사람을 기다리느라 얼마나 목이 길어지던지... 서울에서는 사람 귀한 줄 모르다가 15명밖에 안모이니 한사람 한사람이 참 소중하다는 것을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것이야.”

서울에서 3만 명 모이는 대형 교회의 담임목사가 일본에서 15명 모이는 초미니 교회를 병약한 몸으로 감당하면서 교회의 신비로움을 경험한 것이다. 십수 년 전 어느 날, 편집회의에서 어떤 이야기 끝에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슈마허의 말을 인용한 그의 모습이 생각났다.


▲ 가치있게 사는 삶의 의미를 깊이 각인시켜준 인생의 멘토인 하용조 목사와 같이 한 필자 송기태 목사 ©크리스찬리뷰


멘토는 멘토를 낳는다

오늘의 한국 교계에 가장 영향력 있는 소위 ‘빅3’에 속하는 그가 있기까지 그에게 큰 영향력을 끼친 4명의 멘토가 있었음에 주목한다.

“대학 시절 CCC 김준곤 목사님이 나에게 민족복음화의 비전을 일깨워주신 첫 멘토시지. 그 분의 주님에 대한 사랑은 얼마나 순수하셨던지. 자네도 마찬가지겠지만, CCC 출신들은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게 있어. CCC에서는 가장 소중한 넷을 만난다고 말이야. 

첫째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지. 둘째는 김준곤 목사님같은 비저니어링을 해주시는 훌륭한 멘토를 만나고, 셋째는 골육의 형제보다 소중한 믿음의 형제들을 만나고, 넷째는 동일한 비전과 꿈을 갖고 일평생 함께 살아갈 배우자를 만나게 되지.”

그 역시 CCC에서 예수님과 김준곤 목사 외에 특별히 두 사람을 ‘의미있게’ 만나게 된다. 그의 순장의 첫 순원이 되는데, 그 순장이 바로 홍정길 목사(남서울은혜교회)이다.

한국교계에서도 가장 모범적으로 알려진 두 사람의 우정과 동역은 이렇게 20대 초반부터 시작하여 40여년에 이른다. 또 한 사람은 CCC 간사 시절 제자로서 아내가 된 이형기 사모이다.

그에게 영향을 준 또 다른 멘토들은 신학교 시절 만난 주선애 교수와 영국 체류 중에 만난 존 스토트, 짐 그레함 목사이다.

“주 교수님은 나에게 가난한 자에게 베푸시는 긍휼한 마음을 가르쳐 주셨지. 그리고 존 스토트 목사님은 나에게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쳐 주셨고, 짐 그레함 목사님은 성령 사역을 가르쳐 주셨어.”

특히 망원동 일대 뚝방마을을 일일이 찾아다니던 주 교수에게서 강인한 인상을 받는다. 그는 나중에 두란노서원을 설립하고 뚝방마을에서 상록수처럼 살다 죽어간 어느 전도사의 삶을 ‘뚝방마을’이란 제목으로 책을 펴내기도 했다.

[현대 사회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 등으로 유명한, 금세기 최고의 기독교 지성이요, 저술가로 꼽히는 존 스토트 목사와의 만남은 더욱 각별하다. 먼저 존이 런던에서 운영하는 현대기독교연구소(Institute  for Contemporary Christianity)에서 하 목사는 놀라운 영감을 받는다. 이 기관을 통해 이미 영국으로 떠나기 전에 개원했던 두란노서원의 미래 방향과 철학을 분명하게 정립하게 된다.

특히 세계적인 석학인 존이 학생들과 함께 자신이 소장으로 있는 연구소에서 학생들과 설거지하는 모습, 식사초대를 받아 대단한 기대를 하고 가보니 겨우 맥도날드와 칩스만 대접하면서(그는 독신이다) 맥도날드는 얼마든지 있으니 마음껏 먹으라고 하던 일, 일 년 내내 소매깃이 다 닳은 양복과 외투를 입으며, 낡은 차를 타고 다니는 모습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존 스토트 목사의 이런 모습은 필자도 경험했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세계복음주의신학회(WEF)가 열렸을 때였다. 그를 인터뷰하러 갔더니, 점심시간임에도 외식하러 가지 않고, 호텔방에서 맥도날드로 점심을 ‘대접’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맥도날드는 원고 쓰는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한 방법 중에 하나였다. 그의 식사 초대는 먹고 즐기는 데 있지 않고, 식탁에서의 담론을 즐기며 교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짐 그레함 목사를 통해서는 예배갱신과 성령사역을 한국교회에 접목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짐 그레함을 몇 번이나 한국에 초대해서 예배갱신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다.


스피릿+스파크= 시너지

이러한 멘토들로부터 흘러내리는 스피릿과 그의 삶이 스파크를 일으키면서 더 큰 시너지를 일으킨다.

학교 졸업 이후 CCC 간사로 대학생 사역을 하던 그의 환경은 신학을 해야 하는 쪽으로 몰리게 된다. 평생 젊은이에게 꿈과 비전을 심어주며 살고 싶었던 그에게 보통의 도전이 아니었다.

“참 고민 많이 했지. 처음엔 신학을 해도 목사 안수를 안받으면 되겠지하며 신학교에 갔고, 목사 안수를 받아도 목회를 안하면 되겠지 하고 신학공부를 했지.”

그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장신대 신대원으로 진학했다. 이렇게 전도사 타이틀을 딴 그는, 전도사 시절에 맨땅에 헤딩하듯 참으로 무모하다 할만한 일에 도전하여 기어코 ‘사고’를 쳤다. 여기서 ‘무모하다’고 표현한 것은, 통상적인 관념을 뛰어넘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이유가 그렇게도 분명하고 많았기 때문이다.

‘사고를 쳤다’고 한 것은 비록 그 일 자체는 훌륭히 해냈지만, 그 결과 지금까지 괴롭히는 건강을 상했기 때문이다.

바로 ‘연예인교회’의 개척이다. 그 당시 연예인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연예계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으면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때였다. 그만큼 복음의 불모지였고, 척박한 전도환경이었다.

“연예인교회를 하면서 대중문화를 배웠어. 대중문화를 통하여 많은 연예인들에게 전도가 가능했어.”

몇 년 동안 그는 이 사역을 위하여 진액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 한국 교계에 특수목회의 새 장을 열만큼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육체적으로는 간을 다치고 만다. 결국 교회를 사임하고, 영국으로 요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영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그는 연예인교회에서 위로금(일종의 퇴직금)으로 6백만 원을 받았다. 건강을 상해 가며 일한 대가로는 결코 큰돈이 아니지만, 1980년 당시의 화폐 가치로 따지면, 뭔가를 소박하게 시작할 수도 있는 액수였다.

예수원에서 기도하면서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사도행전 19장 8-20절에서 눈이 머문다. 바로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 에베소에서 제자들을 따로 세워 두란노서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던 모습이었다. 한국 교계에도 이런 기관이 있었으면 하는 소망이 생겼다. 교회가 한계를 느꼈을 때, 교회 밖에서 교회를 섬기며 격려해 줄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신촌 이대 입구 4층 빌딩에 두란노서원을 개원한 것이다. 그의 건강과 맞바꾼 6백 만 원이 종자돈이 되었다. 그러나 일단 두란노서원은 ‘띄워만’ 놓은 채 고무송, 문영탁 장로에게 일을 맡기고 그는 영국으로 떠나버렸다.


영국, ‘꿈의 인큐베이터’

영국에서 3년의 충전 기간은 그에게 제 2의 사역을 여는 인큐베이터가 되었다.
WEC에서 세계 선교 비전을 배우고, 선교 후원금을 모금하지 않고 철저히 기도에만 의존하는 그들의 방법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영국의 서점가를 순례하며 각종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장래 두란노서원에서 이룰 꿈을 위해서였다. 성경에 대하여 기막히게 아름다운 자료들이 눈에 빨려 들어오다시피 했다. 그야말로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 마시듯 ‘자료 헌팅’이 계속되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그의 가슴 속에는 ‘기독교 잡지’에 대한 생각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령 씨가 만들던 [문학사상]과 한창기 씨가 만들던 [뿌리 깊은 나무] 등 너무너무 환상적인 잡지를 보았던 것이야. 아, 문학을 이렇게 아름답게 담아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더군. 그리고 [뿌리 깊은 나무]는 한글세대를 위한 첫 잡지이지. 잡지에 그래픽 디자인 개념을 처음 도입했고, 한글 문체의 혁명을 일으킨 잡지였지. 기독교에서도 이런 잡지를 만들 수 없을까. 아니 꼭 만들어야 한다고 소망했었어.”

언제 이루어질지 모를 그 꿈을 그려보며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준비했다. 조금이라도 자료가 될만한 것이 눈에 보이는 대로 확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3년을 쏟아부으니 나중에 귀국할 즈음엔 산더미처럼 불어났다.

그러나 그에게 ‘공부나 하고, 자료나 모으던’ 그런 충전의 기간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이내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당시 대우 런던 지사에 근무하던 김낙웅 장로(현 러시아 선교사) 등과 함께 한인일링교회를 개척하여 이민 목회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교회론과 목회철학,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며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성경적인 교회, 사도행전적인 교회, 예수님께서 꿈꾸신 교회를 묵상한다. 현실의 고통, 문제, 아픔 때문에 산산조각나지 않는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DNA를 가진 교회, 교단 교회가 아닌 우주적 교회, 이 시대를 구원할 수 있는 교회에 대하여 천착한다. 

“예수께서 꿈꾸신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하는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고백 공동체, 예수님이 주인 되신 공동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능력 공동체, 천국의 열쇠를 소유한 구원 공동체가 바로 예수님의 의도하신 ‘바로 그 교회’의 원형으로 보았지.”

이처럼 영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DNA를 가진 교회, 성령께서 운행하는 교회에 대한 확고부동한 교회론을 정립하고, 두란노서원에서 문화혁명을 일으킬 콘덴츠를 품은 인큐베이커터가 되었다.


양날의 칼

84년, 그의 귀국 보따리에는 제 2의 사역을 펼쳐갈 양날의 칼이 잘 벼려있었다.

그의 귀국은 한국 기독교는 100주년 기념으로 들떠 있었다.

먼저 가장 이상적인 기독교 잡지 창간을 위하여 알아보았다. 사방이 막힌 담이었다. 당시 군사정권은 출판 언론은 철저히 허가제로 묶어놓고 있었다. 새로운 정기 간행물의 발행을 아예 허락하지 않았을 때였다. 이 벽을 뚫는 것이 첫번째 부딪힌 난관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었다. 그의 열정에 감복한 몇몇 도움의 손길이 나타났다. [빛과소금]의 ‘난산 스토리’에 얽힌 일화들은 아무리 암울한 시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기적은 계속된다는 것이었다.

당국에서는 월간 잡지 [빛과소금] 하나를 허락하기 위해 타종교와 균형을 맞추어야 했다. 가톨릭의 [생활성서]를 비롯해, 불교 잡지도 하나를 허락하면서 발행허가를 내준 것이다. 하나의 벽을 넘으니 그 다음 과정은 비교적 순탄하였다. 

이영덕, 손봉호, 이만열, 김명혁, 이수영, 김중은, 옥한흠, 홍정길, 이태웅, 신성종 등 20년 전 당시 한국 기독교의 차세대를 책임질 대표적인 인물들을 편집위원으로 위촉했다. 여느 잡지와 달리 간판용, 전시용이 아닌 헌신적으로 참여할 실질적인 편집위원이었다. 

해직 언론인 출신 고무송 장로를 초대 편집장으로 한 이른바 SKY 출신의 젊은 엘리트들로 편집진을 구성했다(필자만 예외였다). 여기에 모델로 삼았던 [뿌리 깊은 나무] 출신의 미술 책임자와 사진 책임자를 영입했다. 환상적인 팀이었다.

그 시절 한두 군데를 제외하고 원고료를 거의 주지 않던 교계 잡지의 사정이었다. 그만큼 척박한 언론환경에서 일반 잡지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원고료를 지급했다. 그 결과 매 달 고급 필진의 완성도 높은 원고를 게재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밑지고, 뒤로도 밑지는 도무지 타산이 맞지 않는, 바닷물에 자갈 채우기였다.

“[빛과소금]이 자리 잡기까지 2억이 들어갔어.”

필자가 두란노서원을 그만두는 날, 교계의 언론출판 환경을 말하며 들려준 말이었다.

물론 [빛과소금]은 두란노서원의 여러 사역 가운데 한 파트에 불과했다. 한국교계에 ‘강해설교’란 말을 유행시킨 데니스 레인 강해설교 세미나를 비롯하여, 큐티 세미나 등등 숱한 세미나를 개설하여 폭발적인 인원을 동원했다. 그가 인물별 성경공부를 이끌던 두란노서원 지하실은 입추의 여지없이 꽉꽉 들어찼다.

이즈음 한남동 횃불회관에서는 주일마다 그의 인도로 13가정이 모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세상의 계급장’ 다 떼고 성경공부를 하면서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꿈을 키웠다. 

영국에서 3년 동안 정립한 교회론인 예수님의 DNA가 흐르는 ‘바로 그 교회’가 잉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가정들이 바로 오늘의 온누리교회가 있게 한 부흥의 핵이었다. 창립 7년 만에 6천 명을 돌파하고, 20년이 된 현재 3만 명의 대가족이 되었다.


절묘한 조화

“두란노는 교회를 깨워주고, 교회는 두란노를 세워주는 절묘한 만남이었지. 처치와 파라처지의 이상적인 조화라 할까.”

두란노에서 발행되는 어느 책을 펼치든 두란노의 사명선언문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마지막 문장에 스치듯 한 ‘예수문화 및 경배와 찬양사역’이란 한 문장이 채 안되는 사명인 경배와 찬양사역 역시 한국 교계에 새바람을 일으킨다.

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하 목사의 동생 하스데반 선교사에 의해 주도된 이 사역이 청소년 문화에 미친 영향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처음 ‘목요 경배와 찬양’이란 이름으로 이 사역이 시작되었을 때, 마치 바람에 밀려오는 밀물같았다. 온누리교회로 들어오는 37번 버스와 지하철 이촌역과 서빙고역은 미어터질 듯했다. 특히 지하철을 이용하려면 내릴 때 집으로 갈 차표를 미리 끊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

그렇게 모여든 청소년들이 한쪽에서는 열광했고, 한쪽에서는 흐느꼈다. 각 교회 청소년 담당, 찬양담당 사역자들은 비디오로 녹화해 가서 콘덴츠를 분석하기도 했다. 이처럼 경배와 찬양이 청소년 문화의 ‘해방구’가 되었다. 이후 경배와 찬양은 대학로, 잠실경기장으로 동남아를 비롯하여 세계 각국에 ‘올네이션’이란 사역이 확장되어 갔다.

두란노와 온누리와 절묘한 조화 못지않게, 두 형제의 절묘한 조화가 한국 기독교문화에 미친 영향도 흥미있는 부분이다.

또 하나의 절묘한 조화를 든다면 소위 ‘4인방’의 우정과 네트워크이다. 평신도를 깨우는 제자훈련이 트레이드 마크인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 인격과 덕망 그리고 장애우 사역으로 유명한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 목사, 한국의 골드 마우스(gold mouth)라 할 만큼 탁월한 강해설교가인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 문화변혁의 대명사인 하용조 목사 등 이들은 이미 독립된 개체가 아니다.

바울과 바나바처럼 어느 한사람의 이름이 나오면 자동으로 다른 사람의 이름이 끌려나올 만큼, 이들은 한국 교계에서 ‘동역의 대표단수’이다. 성경에서 대부분의 동역자들은 두 사람씩 묶어서 나온다. 이에 비해 이들의 동역은 네 명이 한꺼번에 묶여서 등재된다. 그만큼 한국 교계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80, 90년대 부흥운동을 주도하면서, 20년 넘게 섬기던 교회를 후임자에게 일체의 잡음 없이 넘긴 홍정길, 옥한흠 목사의 미담은 세대교체의 귀로에 선 한국 교회에 귀감이 되고 있다. 또 이들은 차세대 양육을 위하여 세계 각국에서 코스타(KOSTA)를 개설하는 등 이들의 한마디 한마디는 한국 교계의 키워드로 자리잡고 있다.

“서로 교파도, 성격도, 나이도 다르지만 비전이 같았기에 우리의 우정은 유지되고,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었어. 우리의 교회가 교파 교회를 초월하여 하나님왕국의 교회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돼.”


사람을 소중히

흔히 큰일을 성취한 사람들의 특징은 그의 업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일 중심’으로 추진하기 쉽다. 그러다 보면 사람을 별로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런 면에서 하 목사는 참으로 따뜻하다. 두란노서원에 근무하는 한, 누구든지 자의로 그만두지 않는 한 해고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한번 신뢰하고 일을 맡겼으면,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은 한 책임을 묻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 글의 초입부에 밝힌 예가 대표적인 사례이리라. 일반 기업체같으면 시말서를 써도 몇 번이나 쓸만한 사안을 한 번 웃는 것으로 지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사실 필자의 ‘가방끈 길이’가 편집부에서 제일 짧았다. 그럼에도 그것을 공적으로 사적으로 한 번도 내색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최단 시일에 데스크로 진급시켜주기도 했다.

필자가 앞서 밝힌 C군과 함께 ‘독립을 선언하여’ 출판 잡지를 하려고 할 때의 배려도 잊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결코 두란노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재량권을 부여받아 가장 신나고 재미있게 일 때였다.

단지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로 있던 친구 A군이 이미 6개 월 전에 출판업에 뛰어들어 [우선순위 영단어] [우선순위 영숙어] [부끄러운 A학점보다 자랑스런 B학점이 되라] [서울대 기숙사] 등의 책으로 베스트셀러를 쑥쑥 뽑아내는 데에서 도전받은 것이었다. 그래서 C군과 N군과 의기투합하여 ‘우리도 한 번 해보자’는 오기가 발동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사의를 표명하자, 당시 LA 두란노서원 대표로 있다가 잠시 귀국한 오성연 장로(전 한동대 행정 부총장)를 통하여 보여준 사랑을 잊을 수 없다. 3개월 동안 “두란노서원에서 함께 뜻을 펼쳐보자”고 한 그 권유를 끝내 뿌리친 것이, 지금도 못내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다. 

그렇게 권유할 만큼 소위 ‘예쁜 구석’이 우리에게는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늘 사고만 친 우리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준 것은 바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그의 성품에서 나온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가 두란노를 떠나는 날, 들려준 말이 체험적, 충격적 고백록이었다.

“가치 있는 돈이 되지 않는다.”
“베스트셀러는 베스트의 책이 아니다.”
“출판을 하려면 반드시 사이드 잡(job)을 가져라.”(우리의 사이드 잡으로 ‘두란노 문화강좌’ 강사로 불러주고, 광고로 밀어준 배려는 참으로 큰 가슴의 소유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광야같은 출판 현장으로 나가는 ‘철부지’들이 보기에 딱했는지 덧붙였다.
“책 안 팔리면 다 가져와. 두란노에서 사줄께.”
“일이 잘 안되면 다시 돌아와. 언제든지 받아줄께”(특이하게도 두란노 직원 가운데는 나갔다가 산전수전 경험하고 재입사하는 경우가 참 많다. 심지어 서너 번이나 왔다갔다 하는 경우도 있다).


심비에 새길 큰 바위 얼굴

보통 사람이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네 번의 암 수술과 초인적인 그의 활동의 원천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 함수관계는 좀처럼 풀리지 않을 듯하다.

“내 생애 마지막 남은 일이 있다면 죽어가는 한국 교회를 살리는 거야. 서구교회의 모습이 남의 일이 아니야. 이대로 가면 다 죽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DNA가 흐르는, 예수께서 꿈꾸시고, 계획하신 그 교회를 위하여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의 본질을 소유하되, 포스트모던 시대의 문화를 이해해야 할 것을 당부했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식 사고로는 젊은이들을 교회가 불러오지 못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교파의 벽도, 경쟁의 벽도 이미 초월했다. 문화적으로 잘 훈련된 교회 청년들을 100명, 200명씩 다른 정체된 교회로 파송하여 그 교회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섬기도록 한다. 또 기독교 대학의 채플이 아무런 흥미를 끌지 못하는 점을 감안하여 매력적인 예배를 위하여 젊은이들의 문화코드로 훈련된 온누리 청년부를 보내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인터뷰의 마지막 한 마디까지도 ‘죽어가는 한국 교회 살리기’였다 바로 그의 ‘한국 교회 사랑’에서 뿜어져 나오는 쇠하지 않는 열정이었다. 이 열정이 육체의 질고를 녹여가는 듯했다. 교회를 너무 사랑함으로 병이 난 모습이었다. 앓기까지 교회를 사랑한 그는 오늘을 사는 목회자들의 ‘심비에 새길 큰 바위 얼굴’이었다.† 


글ㅣ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ㅣ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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