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어트 피긴 박사의 호주 복음주의 기독교의 역사 (14)

제8장 말씀이냐, 성령이냐? (1960-1994년) 3편

번역 | 홍은희ㆍ정의경/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1/08/29 [10:39]
녹스와 성경의 권위

호주에서 개혁 신학이 가장 큰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은 브로튼 녹스가 시드니 성공회의 무어신학교 교장으로 재직했던 1959년부터 1985년에 일어났다. 1912년 아들레이드에서 태어난 녹스는 시드니대에서 수학했고 후에 노동당 수상이 된 휘틀램과 함께 고전어학과에서 헬라어를 공부했다. 그는 당시 시드니대에 활발하게 활동 중이던 EU에 참여하지 않고 자신의 독립적 입장을 드러냈다.

녹스는 영국으로 건너가 목회과정을 밟은 뒤, IVF 성경연구위원회에 참여했다. 그는 개혁 신학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변증가로 명성을 얻었는데, 성경과 반대되는 어떤 것도 (강조의 의미로) 일곱 번이나 ‘아니오’라고 외쳤다고 알려졌다. 그는 이후 복음주의자들에게 자유주의와 성례주의자들에게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도록 가르쳤다.

그는 1947년 무어 신학교에 강사로 임명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유명한 ‘빨간 책 사건’ 재판에 ‘전문가 증인’으로 등장해 대중에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이 재판은 바서스트 주교가 성공회 전통에 벗어난 예배 개혁을 주창하여 교단재판부에 고소된 사건이었다.

녹스는 1953년 옥스포드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논문은 후에 헨리 8세 치세의 ‘믿음’의 이해(The Doctrine of Faith in the Reign of Henry VIII)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녹스의 외모나 말투는 학자 같았지만, 그의 심장은 진실을 추상적으로 소유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분명한 진실을 위해 싸우는 전사의 것이었다. 성경이 보여주는 진리는 순종해야만 할 대상이었다. 그는 성경의 오류로 주장된 내용에도 가차없이 반박했다. 녹스는 다른 신학자들과 교류보다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데 더 관심이 있었고, 믿음과 기도자의 삶의 살았다.

그러나 그는 신학을 사랑했고 논쟁을 즐겼고 학생들에게도 이 두 가지를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빌리 그래함 전도단의 성공적 사역 속에서 녹스가 무어 신학교의 교장을 맡기 시작한 이듬해인 1960년, 그는 라이카트에 시드니개혁신학교(Sydney Reformed College)라는 새로운 학교를 세웠다.

녹스와 무어 신학교 졸업생인 빌 로튼이 교수를 맡아, 매일 저녁 칼빈주의적 교회사와 신학을 가르쳤다. 당시 많은 청년들처럼 빌 로튼은 하이퍼칼빈주의에 열광했지만, 녹스는 성경의 권위와 교회론에 더 초점을 맞췄다.

 
하나님의 계시는 명제적이다.

그는 성경이 신앙과 신학의 유일한 기준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성경에서 발견되는 교리만을 구원의 핵심으로 가르쳐야 하며, 성경은 스스로 증명하며 하나님의 계시만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명제’가 된다고 주장했다. 이 생각은 1960년 ‘명제적 계시가 유일한 계시다’라고 쓴 글에서 발전시켰다.

 (당시 유행하던 바르트주의와 자유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이 일련의 명제들이 이어진 것이 아니라 사건의 연속으로 이해해야 하며, 하나님의 계시는 말씀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녹스는 바로 이 견해를 반박했다. 녹스는 사건 자체는 계시가 아니며, 그 사건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는 성경의 해석이 바로 계시가 된다고 가르쳤다.

그에 따르면 ‘사건이 계시가 되려면, 반드시 하나님이 손수 해석하셔야’하며, 명제적 계시를 긍정하려면 계시에 오류가 없음을 받아들여야 하며, 하나님은 충분히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강조했다. 이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은 ‘심각한 불경건’이다.

따라서 목회의 주된 사역은 하나님만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성경을 가르치고, 신학자는 성경의 무오류성을 방어하고, 신자는 성경을 듣고 배우는 것에서 가장 큰 영광을 누린다고 가르쳤다. 녹스 이후로 이를 강조하는 것이 시드니 성공회의 특징이 되었다. 경건은 말씀을 선포하고 방어하는 것으로 표현됐다.

그리스도는 성경에 연결되고, 생명이 되시며 아버지로부터 오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들어 있는 성경을 통해 경배를 받으신다. 이러한 태도는 시드니 성공회에 큰 장점이 되었지만 이것을 제도화, 정치화하면서 약점이 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신학은 말씀을 위해 싸우는 전사를 만들었지만, 말씀에 대한 개인적 순종보다는 신학 논쟁을 더 좋아한다는 오해를 받을 여지를 만들었다.

 
교회론 논쟁

녹스를 통해 더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견해는 교회에 대한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참다운 교회란 천상의 실체 즉, 천국의 모임(엡 2, 히 12:8)을 가리켰다. 천상의 실체가 현실적으로 표현된 것은 지역 교회며, 성직자들이 목을 매달던 교단이나 당시 유행하던 에큐메니컬운동도 여기에 해당되지는 않는다. 지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그리스도인의 모임이므로 그 자체로 완전하다.

따라서 지역 교회에서 벗어나면 공동체 안에서 은사를 통해 신자들을 세워 가시는 그리스도로부터 단절된다. 그리고 신자는 그리스도로부터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모든 신자가 사역자다. 교단은 지역 교회를 섬기는 종이지, 지역 교회가 교단의 종이 되어선 안 된다. 교단조직은 지역 교회 연합 이상이 되어선 안 되며, 신자의 연합은 소속교단에 대한 충성심으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1982년부터 1993년까지 시드니 대주교로 일한 도널드 로빈슨의 지원을 받았다. 그는 1952년 무어 신학교 교수, 1959년부터 부학장으로 섬기다가 1973년에 파라마타 주교가 되었다. 로빈슨은 사도 신경에 나오는 ‘거룩한 공회’란 천상의 실체를 가르키는 것이며, 세상에서의 교회는 진실한 지역 교회들로 나타난다. 이런 논리에서는 에큐메니컬운동은 동의하거나 가능하지도 않게 된다.

가장 큰 논란이 된 것은 교회는 복음 전도의 도구가 아니라, 복음 전도의 결과라는 그의 강조 때문이었다. 교회를 복음 전도에 동원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전도를 지상 과제로 여기는 다른 복음주의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교회가 세상을 향해 나가는 관심이 약해졌고, 선교 단체 지도자들은 무어 신학교 졸업생들이 해외 선교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1982년 로빈슨이 대주교가 되자, 그의 교회관은 필연적으로 두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즉, 지역 교회가 사역의 중심에 서도록 격려하고, ‘주일 성수’를 강조했다. 반면 성경관이 이들과 같지 않은 이들이 거부감을 일으키고, 성공회 내 다른 전통에 대한 거부감을 강화시켰다. 녹스로 인해 개교회주의적 교회 행정을 선호하는 목사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전통적으로 성공회가 그동안 해 오던 유아 세례, 예배 의례복 사용, 예배 의식과 기도 서식서 사용 등에 거부감을 느꼈다.

이러한 전통이 비성경적일 뿐 아니라, 실제로 비신자들에게 교회가 나가는 데 방해가 된다고 여겼다. 시드니 성공회 총회에서는 이러한 부담으로부터 벗어나자는 압력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는 교회 성장 운동이 인기를 얻으면서 실용주의의 영향이 커졌지만, 이때도 신학이 우선이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 비신자들과의 조화와 그들에게 호소력을 가지기 위해 무엇을 할지에 대한 고민은 ‘순전한 교회’를 지키려는 생각 때문에 순위에서 밀려났다. 이런 분위기는 당시 교회 출석률의 감소 현상과 맞물려 있었다.

 
미완의 성령론

아마도 녹스의 신학에 있어서 가장 취약한 부분은 성령론이었다. 그는 성령을 주로 ‘성경이 쓰여졌을 때 들어간 영감’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했고, 성경 해석이나 이해는 주로 인간의 이성과 성경 자체의 논리성에 의지했다. 마찬가지로 인간 역사에서 성령 하나님의 역할은 별로 강조되지 않았다. 덕분에 성공회의 신론은 이런 식으로 영향을 받았다.

당시 활발해지던 은사운동은 복음주의가 성령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며, 이것은 중세 기독교에 칭의 교리가 무시되던 상황만큼 심각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녹스는 성령에 대한 신학을 따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성령과 삶의 경건성에 대한 관심이 줄어지면서, 이 시기의 시드니 성공회의 복음주의는 말씀과 성령을 서로 밀접하게 연결시키지 못한 체, 심각한 반목 상태로 만들었다.

시드니 성공회 신자들은 복음주의와 은사주의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했고, 은사주의를 선택하면 더 이상 녹스 아래서 훈련 받은 목회자와 불편해 질 때가 많았다.

무어 신학교에서 개혁 신학이 강화되면서 이전 세대의 부흥신학과 경건주의는 자리를 잃어갔다. 이런 ‘협소화’로 인해 호주 교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도 약화되었다. 무어 신학교는 복음주의 울타리 안에서만 영향을 미치는 곳으로 되었고, 덕분에 그 안에서 성령과 세상이라는 복음주의의 내부 요소는 약화되었다. 하지만 이런 비난도 녹스가 이룬 성과를 보면 무시할 만했다. 녹스의 제자들은 신학과 성경과 하나님을 중심에 놓았다. 성공회 교단과 전통에 대한 이들의 무관심은 작은 부수적 피해에 불과했다.

 
기독교학생운동내에서 복음주의의 분열

복음주의의 분열은 학생 사역에서 그 어느 곳보다도 첨예하게 드러났다. 1960년대 호주 고등교육이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할 때, 신학적 자유주의는 급속도로 쇠퇴했다. 1970년대 말, 대표적인 자유주의적 기독교학생단체인 SCM은 호주 전역에서 회원이 100여 명에 불과했다.

반면 복음주의 학생 단체인 IVF는 나날이 커나갔다. IVF는 신규대학개설과 캠퍼스확장과 더불어 성장했지만, 1970년대부터 이전에 비해 구심점을 잃어갔다. EU은 거대해졌고 성숙과 성경지식을 구비한 지도자들이 이끌었지만 조직이 너무 거대해진 바람에 열성 회원이 줄면서 전체적인 열성도 희석되었다.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여 15년간 이 조직을 이끌었던 이안 버나드는 IVF의 우선순위를 정리했다. 먼저, 시사 문제들에 성경적으로 접근하고, 둘째로 적극적인 전도활동을 유지했다. 셋째로, 학교마다 담당자를 세워 관리했다.

이러한 전략도 1970년대부터는 복음주의자들이 너무 많아지고 공통되는 적을 구별하기 어려워짐에 따라 내부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원래의 IVF가 표방했던 경건주의적 복음주의는 다양한 극단적 복음주의로 대체되었다. 부분적으로는 미국의 영향도 컸다.

미국에서 IVF는 (영국에서 시작된) 외래 단체로 이해됐고, 지나치게 이지적이며 전도의 적극성이 부족하다고 인식되었었다. 어쨌든 이제 등장한 복음주의적 파벌주의 앞에서 지도자들은 무력했다. 학생 복음주의는 분열하여 6개의 흐름으로 등장했는데, 이 중 처음 두 가지는 1977년부터 1984년까지 총재를 역임한 토니 맥카티의 지도를 받은 IVF 안에서 나타났다.

첫째는 개혁 또는 청교도적 복음주의로, 자복 신앙과 전통적 경건성을 강조하고 개혁신학자들을 양성했는데, 대표적인 대변자가 ‘진리의 깃발’(Banner of Truth)출판사다.

두 번째는 정통 복음주의 또는 신복음주의로, 근본주의적 배타주의에 대항하고 빌리 그래함 연합전도운동에 영향을 받은 부류이다.

세 번째 그룹은 복음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하는 ‘자유주의적 복음주의자’들로 대표적인 인물은 멜번의 펜맨 대주교(1984-89)였다.

네 번째는 네비게이토와 CCC계 근본주의자들이다. 두 그룹 모두 다소 기계적인 전도법와 제자양육법을 강조했다. 다섯 번째는 은사주의자들로 주로 Students for Christ로 알려진 그룹을 통해 알려졌다.

‘마라나타’도 규모 면에서는 이보다는 작지만 역시 같은 종류의 그룹이다. 마지막으로, 일부 캠퍼스에서 매우 공격적인 사역을 수행하는 Church of Christ도 있었는데, 그리스도의 교회 교단과는 관련이 없다.

 
기독학생운동의 변화

1980년대 중반부터 IVF 위기론이 퍼지면서, 1984년 총재가 된 앤드류 라이드는 급진적 재정비를 시작했다. 학생들이 물질주의와 무신론의 영향 아래 전 세대보다 성숙도와 독립성, 능력, 인내 등이 부족하다는 인식 때문에, 라이드는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필요한 양육과 지도력을 공급할 수 없다고 판단해 전문사역자와 학자들의 지도를 요청했다.

학생사역은 학생들에게 체계적인 성경 지식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따라서 이들은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치지 않거나 기본적인 성경 진리가 무시되고 있는 교회를 점차로 떠나게 되었다. 기존 지도자들은 이러한 모델에 반대하면서 학생 스스로의 주도성을 망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1975년 활력이 넘치는 새로운 참여자가 등장했다. 새로 뉴사우스웨일즈 대학교 교목으로 임명된 필립 잰슨은, 그 학교 IVF로부터 환영받지 못하자 따로 모임을 시작했다. 10여 년간 젠슨의 성경공부반은 매주 300명 이상 참석한 반면, IVF는 붕괴했다. 젠슨은 복음 전도와 성경 공부인도의 뛰어난 능력, 실용적 전도훈련을 결합하고, 미국 단체인 Student Life를 모델로 호주식으로 적용했다.

일부에서는 이 새로운 운동의 성경중심주의가 극단적인 근본주의로 치닫는다고 비난했다. 여기서 성공을 거둔 미국식 접근법은 전통적인 IVF 기반에 분열을 초래했고 나아가 말씀을 강조하고 성령을 소홀히 했다는 점에서 복음주의 운동에도 분열을 가져왔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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