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생각

8월의 자유(Freedom)를 찾아서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09/08/03 [10:21]
8월 15일은 광복절이다. 3.1절, 제헌절, 개천절과 함께 4대 국경일의 하나로 온 국민이 이날을 경축한다.  광복절을 영어로 ‘Liberation Day’라고 표현한다.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은 날이라는 뜻이다. 영어에는 자유라는 두 가지 표현이 있다. ‘Freedom’ 과 ‘Liberty’이다. ‘Freedom’은 내적 자유이고, ‘Liberty’는 외적 자유이다. 내적 자유는 마음에서 출발하지만, 외적 자유는 환경에서 출발한다. 그날 우리는 ‘Liberty’를 얻은 것이지, ‘Freedom’을 얻은 것은 아니다.

내적 자유와 외적 자유 사이에 공유되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외적 자유가 허락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적 자유를 온전히 누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적자유 없이 외적자유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황금 만능주의라는 말이 있다. 황금으로 외적 환경을 변화시켜 내적 자유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이다. 정말 그럴까?   

돈으로 사람(person)을 살 수는 있으나 그 사람의 마음(spirit)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호화로운 집(house)을 살 수는 있어도 행복한 가정(home)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최고로 좋은 침대(bed)는 살 수 있어도 달콤한 잠(sleep)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시계(clock)는 살 수 있어도 흐르는 시간(time)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얼마든지 책(book)은 살 수 있어도  삶의 지혜(wisdom)는 살 수 없다. 돈으로 좋은 약(medicine)은 살 수 있어도 평생 건강(health)은 살 수 없다. 돈으로 피(blood)는 살 수 있어도 영원한 생명(life)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섹스(sex)는 살 수 있어도 진정한 사랑(love)은 살 수 없다. 돈으로 맛있는 음식(food)은 살 수 있지만 식욕(appetite)은 살 수 없다.

윗 글에 공감한다면, 외적환경을 변화시키려는 노력 대신 먼저 내적 마음의 태도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 살다보면 내 뜻과 내 의지와 관계 없이 계속된 외적자극 (Stimulus)을 만난다. 자극자체를 통제할 수는 없지만, 자극에 대한 내적반응 (Response)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 자극(Stimulus)보다 중요한 것은 반응(Response)이다. 환경보다 중요한 것은 태도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처한 환경을 당장 변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환경을 바라보는 태도는 지금 선택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Freedom’이기 때문이다.      

얼마전 차를 타고 출근하는 길에 횡단보도를 지나려고 하는데,  갑자기 젊은 여자가 지나가는 것이다. 급정거를 하며 미안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인상을 쓰며 나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기도하며 은혜 가운데 시작했던 하루가  그녀의 손가락으로 인해 은혜는 간데 없고 분노가 치미는 것이 아닌가! 사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당돌하고 맹랑한 그녀의 방자한 행동이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조금 전에 일어났던 일을 묵상하여 보았다.  

자기 손가락을 자기가 올리는 것은 그녀의 자유지만, 내 마음을 내가 지키는 것은 나의 자유가 아닌가! 그녀의 외적자유 때문에 나의 내적자유를 잃어 버린다면, 문제는 그녀가 아니라 나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손가락은 그녀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마음은 내 것이니 내가 통제해야 할 것이 아닌가!

내 서재에는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자가 있다. 저자인 빅터 프랭클이 죽음의 수용소인 아우슈비치에서 살아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쓴 글이다. 그는 유태인으로 2차대전 때 독일의 포로가 된다.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고 짐승과 같은 취급을 받으며 수용소 생활을 한다. 

수용소 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었다. 이렇게 사느니 차리리 죽는게 낫다며 자포자기한 사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할 의미를 찾고 살기로 결단한 사람들이다. 인간은 살아야할 의미가 있다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살 수 있지만,  삶의 의미를 잃을 때는 그  순간부터 죽어간다.

수용소 안의 프랭클은 ‘Liberty’는 없었지만, ‘Freedom’까지 빼앗기지는 않았다. 결국 그는 죽음의 수용소를 살아서 나온다. 그 후 프랭클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의미의 치료(Logotherapy)를 창안한다. 그는 인간존재의 본질은 의미와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자유와 마음의 독립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비록 환란일지라도 그 안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환난이 아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 


 
김환기 
호주구세군 다문화 및 난민 조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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