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땅 두 번째로 밟은 이약신 목사의 5녀, 이은화 교수 인터뷰

호주 선교사들이 흘린 피와 땀, 잊지 않고 있습니다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09/08/03 [10:27]
호주 선교사 ‘허대시‘와의 만남
 

▲ 한·호 선교 120주년을 맞아 본지에서 출간한 <쥬야 나를 불샹이 넉여 도아 주쇼셔> 출판기념회를 찾아 온 이은화 교수.  ⓒ정윤석

이은화 교수(이화여대 명예교수, 새문안교회 권사)와 기자는 7월 21일(화) 오후 5시 서울 경복궁역 인근에서 만났다. 이 교수는 호주 땅을 밟은 두 번째 한국인으로 알려진 이약신 목사(1898~1957년)의 5녀다.

이 교수의 부친인 이 목사는 호주 선교사 허대시(Miss Daisy Hocking)를 만난 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 이 때가 1921년의 일이다. 이 목사는 허대시 선교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랑과 이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을 얻을 수 있다” 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기쁨을 알게 된 이 목사는 부인 이옥경 여사에게 당시, 어제 선교사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지속적으로 깨끗하게 해주신다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갑자기 내 마음 속에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이 확 벗겨지는 것 같은 시원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진한 사랑을 체험한 이 목사는 주기철 목사와 함께 신사참배반대 운동을 벌이고 옥고를 치르다가 1957년 별세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0여년이 훌쩍 지나가는 2009년 7월 17일, 이 목사의 5녀 이은화 교수는 한․호 선교 120주년 감사예배와 <주야 나를 불샹이 넉여 도아 주쇼셔>(크리스찬리뷰 刊, 권순형 엮음) 출판 감사예배에 참석해 은혜를 나눴다.

빚 중의 가장 큰 빚은 복음이 빚이어서일까? 이은화 교수는 기자를 만난 날, 다시 한번 한국 땅에 복음을 전해 준 호주 선교사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시했다. 호주 선교사들이 없었다면, 어쩌면 목사로서의 이약신도 없었을지 모른다. 인터뷰를 하는 중간 중간 그녀는 눈에서 눈물을 훔쳤다. 이역만리 타국 조선 땅에 복음 들고 들어와 이름도 빛도 없이 사라져간 선교사들의 순교적 사명이 생각할수록 고맙고 또 고마워서다.

이 교수는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선교사에 대해서는 너무도 많이 들어왔고 또 한국 땅에서 세운 업적도 많다고 간단히 평했다. 그런데 그녀는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에 대해 얘기하며 유독 눈시울을 붉혔다. 호주에서 6개월에 걸쳐 한국 땅에 왔다가 쪽 복음을 들고 서울에서 수원, 과천, 충청도, 경상도를 지나 60일을 걸어서 부산까지 찾아갔던 데이비스 선교사다. 그런 데이비스 선교사는 1890년 4월 4일 부산에 도착한 다음날 하나님의 품에 안긴다. 오랜 시간의 여행과 겨울 추위와 뜻하지 않은 질병 폐렴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분의 사역과 노고가 내 가슴에 남아 너무 감동이 됐어요. 농부가 밭에 씨만 뿌리고 간 것과 같아요. 하나님이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을 키워 주셨어요. 그래서 이렇게 열매를 맺게 된 것이죠. 너무나 감사해요. 그런 순교의 사명을 이 땅에서 감당하고 이름없이 빛도 없이 사라져간 선교사님들께 고마운 마음입니다.”

이 교수는 ‘세상에서 가장 큰 빚은 복음의 빚’이라며 요즘 세계복음화를 위한 선교사역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목숨을 건 선교사들의 전도로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들이 그 빚은 갚는데 게을러서는 안 된다며 한국교회가 첫째도, 둘째도 생명구원이라는 사명을 갖고 세계선교의 빚을 감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이은화 교수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 평양 신광교회 여자청년면려회. 앞줄 중앙이 이약신 목사(1940)  ⓒ이은화 교수
 
1937년 이약신 목사 호주 방문

- 7월 17일 국회 도서관에서 열렸던 한호선교 120주년 감사예배와 <주야 나를 불샹이 넉여 도아 주쇼셔> 출판 감사예배에 참석하신 것으로 들었습니다.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선교사에 대한 얘기는 많이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 그분들은 한국 땅에 많은 업적도 남긴 분들이죠. 그런데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가 쪽복음을 들고 서울에서 수원, 과천, 충청도, 경상도를 지나 20일간의 답사여행을 마치고 목적지인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무리한 도보여행으로 인해  천연두와 폐렴이 겹쳐 6개월 간의 짧은 사역을 마치고 하나님 품에 안겼다는 사실을 듣게 됐어요.

그분의 사역과 노고가 내 가슴에 남아 너무 마음에 감동이 됐어요. 농부가 씨만 뿌리고 간 것과 같아요. 하나님이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을 이 땅에 뿌리 박고 가꾸신 것이 감사해요(이 얘기를 하며 이 교수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런 호주 선교사의 일기가 책으로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출판 감사예배에도 일부러 참석하게 됐어요. 그렇게 복음을 위해서 한국 땅에 와서 살다가 가신 분의 책이 나온다고 하니 더욱 반갑고 고마워요. 저희 아버지이신 이약신 목사님도 호주 선교사의 복음을 듣고 예수를 진심으로 알게 되셨거든요.” 

▲ 호주장로교회 100주년 기념 집행위원회 회의(1937). 이약신 목사는 한국대표로 초청받아 6개월간 호주를 방문했다.   ⓒ이은화 교수

- 교수님의 부친이신 이약신 목사님이 호주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들었군요?

“네, 아버지는 호주 선교사 허대시를 만난 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 때가 1921년의 일이죠. 아버지는 허대시 선교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랑과 이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요.” 

- 이약신 목사님은 호주 땅을 두 번째로 밟은 한국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호주에는 어떻게 가게 되셨으며, 호주 선교사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1937년 호주 장로교 100주년 기념대회에 참석했어요. 일제의 탄압이 가장 극성을 부리던 때였죠. 무척이나 가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도 호주 장로교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게 된 것은 그 당시에 드물게 영어에 능통한 목회자라는 부분도 있어요. 그뿐 아니라 호주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듣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험을 하게 된 체험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 어떤 체험인가요?

“아버지께서는 허대시 선교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랑을 알게 된 후 어머니(이옥경 여사)에게 어제 선교사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지속적으로 깨끗하게 해주신다’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갑자기 ‘내 마음 속에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이 확 벗겨지는 것 같은 시원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요."

▲ 이약신 목사와 부인 이옥경 사모. 진해남부교회 앞에서.   ⓒ이은화 교수

"이게 호주 선교부와의 인연이라면 인연이 됐어요. 호주 장로교회가 1937년 10월에 호주장로교회 설립100주년을 맞아 기념대회를 열었어요. 아버지는 이 대회에 초청을 받았어요. 그 이유는 20대 청년 시절에 마산에서 아버지가 처음 만나 기독교의 진리에 눈뜨게 도와준 호주 여선교사 허대시의 역할도 간접적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여요. 호주선교부가 한국선교를 전략적으로 담당했던 영남 지역에서 목회했던 이유도 있었을 거예요.

아버지는 목회의 출발도 호주 선교사 권임함 목사(Rev. Cunningham)가 담임으로 있는 진주 옥봉장로교회에서 시작했어요. 동역목사로서였죠. 이곳에서 아버지는 젊은이들과 일반교인들을 감화시키는 힘이 있어서 호주 선교사들의 기록에 의하면 부임한 직후 선교사들이 시작한 성경학원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 많은 이가 참석했으며 저녁 성경반 모임에는 2천 명 이상의 참석자들을 끌어들였다고 합니다.”  

 
▲ 오산중학교 제7회 졸업 사진. 앞에서 둘째 줄 끝이 이약신 목사이며, 세 번째가 주기철 목사이다.  ⓒ이은화 교수

한복을 입고 유창한 영어로 한국교회 소개

- 1937년 호주에 가셨으면 정말 그것 자체가 뉴스 아니었을까요?

“네, 아버지는 1937년 11월 추수감사절을 기해 열리는 호주장로교회 100주년기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그 해 5월 7일 부산항에서 여객선을 타고 3개월에 걸친 항해를 하셨다고 해요. 갈 때는 멜번대학에서 간호학을 공부하려는 간호사 2명도 동승했다고 하더군요. 도착해서는 2달 가까이를 쉬셨어요. 긴 항해와 낯선 호주 땅을 처음 방문한 것이기 때문에 충분한 휴식과 적응하기 위한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죠.

아버지는 대회에 참석해서 한국교회의 빠른 성장을 알리고 호주 선교사들의 놀라운 사역과 성과에 대해 보고하셨어요. 그리고 복음을 전해 준 호주교회에 한국교회를 대표해 감사의 뜻을 표하셨구요. 물론 한복을 입고 유창한 영어를 사용하셨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영어를 사용해서 유머로 청중을 웃기셔서 긴장된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주셨다고 해요. 당시 아버지는 한국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유일한 아시아인 목사로서 그 대회에 참석하셨어요. 그것 자체가 큰 뉴스였던 셈이죠.

호주의 허대시 선교사는 그의 글에서 아버지의 호주 방문은 호주 장로교회에 감사의 인사 이상의 많은 것을 호주 교회에 가져다 주었다. 기쁨과 선의가 흘러 넘쳤던 따뜻하고 생명력 넘치는 젊은 목사는 호주 교회의 형제 우애가 넘치는 영적인 분위기를 호흡했다.... 라고 했어요.”
 
▲ 진주남부교회 부설 유치원 졸업사진(1953)  ⓒ이은화 교수

이약신 목사, 사회복지 활동에도 열심

- 한국으로 돌아와 아버지는 어떤 사역을 하셨는지요?

“아버지는 목회뿐만 아니라 사회복지 활동에도 열심이었어요. 해방 이후 사회복지 단체인 경신재단을 설립했는데 설립 동기는 아주 작았어요. 1945~1946년 당시 호열자라는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가 동네에 있었어요. 그 아이가 너무 불쌍하셨던 거예요. 아버지는 아이를 사택에 데리고 와서 돌봐주셨어요.

이게 시초가 돼서 고아들을 돌보는 경신재단이 세워진 거예요. 이 재단은 63년째 사회복지 활동을 하고 있어요. 나중에 아버지는 모자원도 운영하게 됐는데 아이들을 맡기려고 경신재단을 찾아온 엄마들이 기술을 배워 장사를 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 줬어요. 현재 경신재단은 육아원으로 운영 중입니다.” 
 
▲ 진해 희망원 초기사진(1954년경)  ⓒ이은화 교수

- 이약신 목사님들의 자제는 어떻게 되나요?

“1남 5녀입니다. 다섯 째까지 딸을 낳았고 막내로 아들이 태어났어요. 저는 딸 중에서 막내예요. 모두 건강하구요. 첫째 효주 언니는 의사와 결혼했는데 형부는 노인들을 위한 무료진료 등 우리 사회에 많은 공헌을 했어요. 둘째 효재 언니는 여성운동가들의 대모로 불릴 정도로 활동적으로 살고 있어요. 셋째 효숙 언니와 넷째 성숙 언니는 미국에서 살고 있고 저는 유아교육을 전공했고 이화여대에서 35년 동안 교수생활을 했어요. 새문안교회 권사이구요. 막내 성웅은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살고 있지요. 우리 모두 부모님의 신앙을 이어 받아 교회를 돕는 일에 힘쓰고 있어요.”

▲ 진해 남부교회 청년부 졸업사진(1956)  ⓒ이은화 교수  

- 호주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한국교회에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나요?

“현재 한국사회가 이렇게 성장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선교사들의 순교가 있는 나라는 많습니다. 그러나 선교사의 순교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그 복음의 빚을 갚으려는 나라는 적습니다. 대한민국이 더욱 복된 나라가 되려면 선교의 빚을 갚는 나라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교의 빚이 가장 큰 빚입니다.

요즘 세계복음화를 위한 선교사역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목숨을 건 선교사들의 전도로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들이 그 빚을 갚는데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한국교회가 첫째도, 둘째도 생명구원이라는 사명을 갖고 세계선교의 빚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 호주 크리스찬리뷰 독자들에게도 한 말씀 해 주세요.

“호주의 한인들은 국제화돼 가는 세계 속에서 대한민국의 국력 자체예요. 어디에 계시든 하나님의 복의 근원으로서 사는 백성들이 됐으면 좋겠어요.“ ☺ 
 
 

정윤석/크리스찬리뷰 한국주재기자
사진제공/이은화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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