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로 쏘아 올린 꿈

지구를 떠났던 사람들

글|송기태, 사진|권순형 | 입력 : 2012/01/30 [12:10]

모두들 그를 두고 ‘우주인’이라 부르고 있다. ‘외계인’도 아닌 우주인이라! 암울했던 시절, 개그맨 김병조는 “지구를 떠나라”는 말로 ‘민족적 감정’을 분출했다. 그로부터 20년 후, 그야말로 ‘지구를 떠났다’가 다시 우리 앞으로 돌아온 여성이 있었다.

‘우주인’이란 이름으로. 그가 지구를 떠나기까지는 ‘지옥의 문고리’를 잡는 것보다 더 고통스런 일들을 감내해야 했다. 무엇보다 36,206대 1이라는 대한민국 역사상 그 어떤 시험보다 가장 살인적인 경쟁률을 뚫어야 했다.

국가적으로도 그렇게 그가 11일 동안 ‘지구를 떠나는데’ 250만 불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대주며(사실 실비-500만 불-의 반밖에 안되는 액수지만)과 그가 입은 옷(우주복)만 해도 아파트 한 채 값인 5억 원이나 되는 돈을 후원하기도 했다.

그가 바로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이자 유일한 우주인으로, 세계적으로 49번째 여성 우주인이자 아시아에선 4번째의 여성우주인으로 기록된, ‘국보적 존재’라 할 만한 이소연 박사(한국항공우주연구원 선임연구원)이다. 

우주인들의 인생이 우주에 다녀온 이후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취재한 책인 다치바나 다카시의 <우주로부터의 귀환>에 따르면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종교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불교인지, 기독교인지, 이슬람교인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교파를 묻는 것이고 서류에 종교를 써넣는 난에는 어느 교파인지를 쓰는 것이라고 한다.

▲ 한국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 박사(왼쪽)가 우주선 발사에 앞서 러시아 우주인 세르게이 볼코프, 올레그 코노넨코 씨와 우주인 보고식에 참석하고 있다.   ©국민일보


우주에 다녀온 이후 제임스 어윈은 우주에서 신을 만났다며 전도사가 되었고, 윌터 쉬라는 우주에서 지구 환경이 크게 오염된 것을 보고 환경운동가가 되었다. 국민적 영웅이 된 글렌은 정계로 진출하여 상원의원이 되었고, 앨런 셰퍼드는 우주 체험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재계 인사들과 친하게 지내다가 백만장자가 되었다. 우주에서 UFO를 목격했다고 주장했다는 소문이 있는 버즈 앨드린은 우주로부터의 귀환 이후 적성에 맞지 않는 빡빡한 홍보 대사 역할에 시달리다 정신이상을 일으켜 정신병원에 들어갔다고 한다.

에드워드 깁슨은 우주에서 지구를 보면 그 어떤 인위적인 국경선을 볼 수가 없는데 실제로는 몇 백 개의 국가가 분단되어 서로 대립, 항쟁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주 우습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 간의 대립이 바보 같은 짓으로 보인다고 했다.

장로교인인 제럴드 카는 우주 체험이 신앙을 강하게 만들었다기보다는 넓혀주었다고 했다. 그는 우주 체험 이전의 신앙은 근본주의자의 입장으로 편협했지만, 우주 체험 이후에는 전통적 교의에 그다지 구애받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이소연의 신앙

우주인 최종 선정 발표 직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성원해준 가족과 교수님, 여러분을 사랑한다”고 첫 소감을 밝힌 이 박사는 크리스찬이다. 그의 어머니는 “하나님께서 오늘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을 줄 거야.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 우주에서 맘껏 보게 해주세요”라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아버지는 “돈이나 실력보단 신앙의 힘(기독교)으로 사람을 대하고 어려움을 헤쳐나가라”고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그동안 그의 어록들을 살펴보면,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예찬과 감사’가 주종을 이루는, 굉장히 신앙적임을 알 수 있다.

“과연 내가 지구에 살 만한 자격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이 지구가 그렇게 감사한 곳인 줄 몰랐거든요.”.

“저는 우주에 가기 전까지 한 번도 이 지구에서 살 만한 자격이나 요건에 대해 따져본 적이 없었어요. 사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감사하기보다는 오히려 불평과 불만이 많았죠.”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 400㎞ 정도를 위(하늘)로 올라가면 뼈를 깎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살기 힘들어요. 숨쉬고,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일부터 앉아 있기 위해 압력을 유지하는 데 어마어마한 돈과 노력이 필요하거든요. 하지만 지구에서는 그런 비용이 필요없잖아요.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귀중한 선물이구나’ 감사한 마음이 들었어요.”

“내가 만약에 하나님이라면 저렇게 어마어마한 집(지구)을 공짜로 줬는데, 인간들이 매일 싸우며 ‘이것도 안 주시네, 저것도 안 주시네’ 불평하는 걸 본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봤습니다. 지구로 내려갈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지나온 내 삶에 대해 깊이 반성하게 됐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교회 봉사활동에 적극적이었던 그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입학한 뒤에도 지역 교회에서 주일마다 교회학교 교사와 찬양대원 등으로 활동했다. 2008년도엔 대전의 한 교회에서 케냐 지라니어린이합창단의 공연을 본 뒤 합창단에서 알토 겸 드럼을 맡고 있는 라우렌스 군의 학비를 전액 지원할 정도로 ‘긍휼’을 삶으로 실천하고 있다.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는 라운렌스 군이 케냐의 사립 고등학교에 2등으로 합격했지만 학비가 없다는 얘기를 듣고 후원을 결심했다”고 말할 정도로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 그의 부모는 광주 성지교회에서 안수집사와 권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인터뷰는 ‘우주인’이란 공인으로서, 신앙 이야기는 안했으면 하는 의견을 밝혀왔다. 그의 신앙과 삶을 익히 아는 본지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미 가장 밑바닥에 ‘믿음으로 기초공사’를 한 그의 삶을 자기 분야에서 치열하고, 진정성있게 살아가는 모습을 추적하는 것도 적지 않은 도전이 되리라고 생각되었다.

▲ 본지와의 단독 인터뷰 중인 이소연 박사가 어린이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우편엽서에 사인하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진정성, 정직의 결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처음엔 이 박사가 탑승인으로 선발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삼성종합기술원 연구원이었던 고산 씨가 ‘탑승우주인’으로 선발되었고, 이 박사는 ‘예비 우주인’이었다. 그때 그는 “MVP의 멋진 골이 터지기 위해서는 항상 멋진 어시스트를 하는 선수가 있어야 한다. 탑승우주인이 환상의 골을 터트리게 하기 위해서 멋진 어시스트를 하는 예비우주인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우리나라 우주과학 발전이라는 커다란 짐이 한 명의 어깨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주인 두 명이 협력하고, 나아가 많은 분들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과학기술 분야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끊임없이 노력하겠다”고 했다.

지원자 36,206명 중에 선발과정은 5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영어, 종합상식, 심층체력평가, 우주적성검사 등 지루하고도 독한 테스트를 거쳐야 했다. 마지막 우주인 후보 30명으로 추려서 마지막 관문을 통과할 때까지 공군사관학교 교수들을 비롯하여 일반대학 교수, 기자, 기장, 석박사과정 학생, 연구원, 경찰 등 실로 쟁쟁한 인물들과 경쟁해야 했다.

소위 지옥의 ‘서바이벌 게임’이라는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듯 수차례의 초고난도 관문을 뚫어야 했다. 특히 계속 중력 가속도, 저압실 훈련 등 혹독한 고통을 수반하는 우주적성 검사에서 20명이 떨어져 나갔다. 평소 태권도 등으로 탁월한 체력을 다져온 이 씨는 여기서도 당당히 살아남았고, 마침내 2006년 12월 25일 대망의 최종 우주인 후보 2인에 선발됐지만, 마지막 1명을 뽑는 ‘탑승우주인’에는 그가 탈락했다. 그러나 끝나기 전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2007년 3월 10일 소유즈 우주선의 탑승우주인이 고산에서 이소연으로 교체됐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이 바뀐 것이다. 러시아연방우주청에서 “훈련 규정을 위반한 고씨를 교체해 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러시아우주청에 따르면 고산 씨가 외부 반출이 금지된 훈련 교재를 반출해 규정을 위반한데 이어,  교육과 관련 없는 교재를 임의로 빌려 사용하는 등 반복해서 훈련 규정을 위반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러시아 우주청은 “우주에서는 아주 작은 실수나 지시 위반도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며 특히 여러 국가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국제우주정거장에서는 철저한 규정 준수가 요구된다. 고산 씨에서 이소연 씨로 탑승우주인을 교체해 달라”고 하여 교체된 것이다.

▲ 시드니한국문화원이 1월 24, 25일 양일간 개최한 이소연 박사 초청 강연회에는 우중에도 불구하고 150여 명이 참석하는 성황을 이뤘다.(1월 25일)     ©크리스찬리뷰


“탈락하더라도 아쉽지는 않을 겁니다. 중도 포기한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을 정상에 올려놓기 위해 베이스캠프를 지키는 사람이라 생각키로 했어요. 처음 선발됐던 245명의 후보들과 함께 나눈 ‘약속’입니다.”

러시아로 떠나기 전날 밤, 그가 인터뷰 도중 남긴 ‘각오’에서 보듯이, 마음을 비우고, 정직하게 거짓없이 진정으로 임했을 때 증발할 것 같았던 기회가 다시 찾아온 것이다.

우주인으로 선발되고 나서는 러시아어와 우주과학 이론, 생존훈련, 비행기술, 중력가속도적응훈련, 우주적응훈련 등 일 년 동안 소화한 훈련시간만 1천 800시간이다. 가가린센터의 ‘후줄근한’ 겉모습만 보고 처음에 실망했던 그는 러시아의 우주기술을 배우면서 수십 년 동안 쌓여온 노하우와 기술이 양파껍질 벗기듯 계속 나오는 느낌에 하루하루 감탄이 절로 새나왔다. 힘든 가운데서도 무중력 훈련만큼은 지금 생각해도 신이 난다.

우주인이 되고나서 얻은 가장 큰 수확물은 ‘자신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걱정이다. 유명해지면 교만해질까봐. 그러지 않겠다고 또 한 번 마음판에 새긴다.

“어머니는 제가 딸로는 최고지만 며느리로서는 최악이라고 해요. 우주인이 되고 나서 개인적으로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명절에는 거의 외국에 있었습니다(그와 인터뷰한 날도 구정 연휴 끝이다).

한편으로는 젊은이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은, ‘정말 소중한 것을 잡으려면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지요. 제가 우주인이 되고, 유명해지니 식당에서 밥 먹다가도 멈추어 사인해줘야 합니다사람들은 공인이니 명령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동생은 그 자리에서 제 매니저가 되어야 해요, 그러면서 ‘나는 우주인 동생 지원한 적 없다’고 농담도 하지요. 동생보다 더한 것이 부모님입니다. ‘너같은 딸 지원한 적이 없다’고도 해요. 좋은 것만 보니 꿈을 이루고 난 뒤에 망가지기 쉽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 정도는 희생할 각오는 해야 합니다.” 

 
우주에서 노래를 

이번 그는 구정 연휴가 낀 그 주간에 아들레이드에 있는 사우스 오스트렐리아대학교 우주교육 프로그램 방문교수로 초대받아 호주로 왔다. 아들레이드에서 10일 정도 전세계 10여 개국에서 온 40여 명에게 강의하고, 멜본, 캔버라, 시드니에서 강연했다.

그가 다녀온 우주, 아무나 갈 수 없는 우주, 그것에 대해 그는 할 이야기가 많았다. 먼저 우주정거장에서, 우주비행 10일 마지막 날, 다른 우주인에게 노래를 선사하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이야기했다. 

“평생을 로켓 타고 가도 못갈 우주이지만, 우주정거장은 지상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요? 1만 킬로, 5천 킬로, 1천 킬로도 안되지요. 생각보다 가깝습니다. 우주정거장은 타원궤도이므로 300~400킬로로,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 KTX로 3시간 거리입니다.

그러니 우주정거장이 사실 그렇게 멀지 않습니다. 밤하늘에 엄청 밝은 별 하나가 천천히 지나가는 큰 별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머리 위로 우주정거장이 지나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우주에서의 삶은 중력이 작아서 거의 무중력에 가까워 날아다니는 것 외에는 거의 지구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우주인은 화장실도 안간다는 환상도 있지만 큰 차이 없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우주에서 실험을 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지상에서 실험할 것에 곱하기 3정도의 시간이 걸립니다. 우주정거장에서는 쓰고 남은 공구가 날아갑니다. 그래서 쓰던 공구를 지퍼로 채우거나 상자 속에 넣어야 합니다.

▲ 우주복을 입고 태극기 앞에서 포즈를 취한 이소연 박사.    ©국민일보


고등학교 때 태권도 날아차기의 꿈이 있었는데, 우주에서는 누구나 가볍게 할 수 있습니다. 한식은 우주에서 먹기도 어렵습니다. 우리처럼 여러 음식을 죽 펴놓고 먹으면 날아갑니다. 무중력으로 행동도 불편하고요.

그래서 ‘우주멍청이’이란 말도 있습니다. 우주인의 업무 진척은 지상에서의 3분의 2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악으로 깡으로 하면 된다고 고집합니다. 그래서 제게 부여된 임무가 다른 나라 우주인보다 2배로 많았습니다. 그러니 다하지 말라고 들 그래요. 저에게 부여된 18개 실험 중 10개만 하고 와도 훌륭한 일이라면서요.

어쨌든 한국으로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최초의 우주인’으로 아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는 것도 외로운 일입니다. 한국 사람은 무조건 되게 하라는 것이 캐릭터인데 분명 장점도 많지요.”

그가 말한 우주 환경을 살펴보자. 지상에서는 물이 아래로 떨어지지만, 우주에서는 물 한방울을 놓치면 어디로 날아갈지 모른다. 산소도 모자라고, 이산화탄소도 제거해야 한다. 그러니  물이 섞인 것 하나라도 먹을 때나, 화장실에서 소변 한 방울이 잘못 날아가 함께 있는 6명의 우주인이 다 죽을 수도 있다.

“어떤 우주인 방엔 러시아 정교 성화들이 붙어있고, 자기가 좋아하는 우주인 사진이나 십자가도 붙어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팀 티셔츠를 안에 입고 오는 우주인도 있습니다. 물론 몸에 지닌 모든 물건은 다 등록하고 승인받아 옵니다.

특히 모든 가족 친인척들의 목걸이를 다 걸고 오는 우주인도 있습니다. 나름 ‘우주에 갔다 온 목걸이’라는 기념품이 되지요, 이것이 우주인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입니다. 야구경기 시구를 하기도 합니다.

▲ 유엔본부를 방문하여 반기문 사무총장과 인사하는 이소연 박사.     ©국민일보


한국의 경우 우주가 멀리 느껴지지만, 러시아나 미국은 우주비행 50년 역사입니다. 함께 동행한 다른 우주인들은 모두 10명 중 8명이 이미 우주비행 경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합니다.   체체 우주정거장 규격은 월드컵 축구장 잔디밭만 합니다. 지상에서는 1미터 복도에 누군가 하나 서있으면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우주에서는 날아서 위로 갑니다. 천장에서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상보다 1.5배 크게 느껴집니다. 벽에서도 천장에서도 일할 수 있습니다.”

그의 우주경험 중에 뿌듯하고 재미있었던 것은 한국음식이었다.

“우리나라 음식을 10가지 정도 개발하여 가져갔습니다. 김치, 라면을 가져갔지만 그렇게 맛있지 않습니다. 그건 너무 ‘김치스럽지’ 않기 때문이지요. 캔에 담아갔지만, 우주는 절대 환기가 안되는 곳이므로 그대로 못 가져갑니다. 

우주정거장은 백혈병 환자들의 격리된 무균실과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균도 못가져갑니다. 그래서 김치에 있는 그 많은 유산균을 다 죽입니다. 김치가 너덜너덜해져 20년 묵은 김치 같습니다.  미국 우주인은 한국 라면, 김치를 남기고 가라했습니다. 한국 우주식 중에 고추장 팩과 햇반도 가져갔는데,  노란머리 미국 아줌마가 햇반에 고추장으로 비벼먹는 것을 보며 뿌듯했습니다.”

 
우주인이 되고, 애국자가 되다

우주 정거장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데 90분 걸린다고 한다. 그러면 하루에 16바퀴 돈다. 하루에 16번 해가 뜨고 해가 진다.

“우주정거장에서 우리가 어느 나라 위를 날고 있는가를 알려줍니다. 러시아는 20분 정도 부르다가 중국은 10분 정도 부릅니다. 그러다가 한국 위로 와서는 단 한 번 ‘까레이’하는 동안 지나칩니다. 일본은 부르지도 않고 태평양이 곧장 나옵니다. 한국이 작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고, 한국이 그다지 작다는 생각이 안들었는데 말입니다.

▲ 이소연 박사가 우주에서 우주복을 입고 날아차기 시범을 보인 사진(오른쪽)과 일본인 화가가 우주복을 입고 날아차기 장면을 그려준 그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그렇지만 우리가 살고있는 한국은 우주인들이 한국음식을 두고가라 하고, 핸드폰, TV, 러시아 도로에 꽉막힌 차들의 30% 이상이 한국차라는 사실과 훈련교관이 새로 샀다고 자랑하며 교탁 위에 꺼내놓는 핸드폰이 반짜짝하는 삼성 아니면 LG 것이니, 그 큰 땅덩이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든 것이 있다니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요. 우주항공을 지날 때 1분도 안되는 나라의 잠재력이 이처럼 엄청납니다.”

그는 우주비행 중에 또 하나의 에피소트를 들려주었다.

“한국은 일본과 감정적으로 안좋습니다. 제가 우주에서 하는 실험 중에 독도 미생물을 가져가서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이 학계에 ‘독도’라 이름붙인 독도 미생물을 우주에 갖고 간다고 하니 일본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우주 정거장의 20%가 일본이 투자하여 만든 것입니다. 우리나라 밥 먹기도 힘들 때 20년 동안 투자했던, 일본 사람들이 ‘독도 미생물을 가져가면 일본 기계를 (공짜로) 못쓰게 하겠다’고 엄포를 놨습니다.

미국과 러시아가 일본과 한국 둘이 협의하라 하여, ‘독도’라는 단어가 안보이게 하고 쓰는 걸로 합의했습니다.  공짜로 쓰는 화면기계 하나 쓰는 것 때문에 미국이나 러시아가 손 드는 것을 보면서, 우리도 어느 것 하나 잘 만들면 된다는 자신감이 붙었습니다.”

그는 우주인 되기 전까지 ‘애국심’ ‘나라’ 등등의 단어는 사치로 생각으며, 그런 말 하는 사람을 보면 ‘참 한가한가 보다’하고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사람 하나도 없는 러시아 군부대에서 훈련받을 때, ‘나 한사람으로 한국을 보게 된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 한국 첫 번째 우주인 이소연이 2008년 4월 8일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우주선기지에서 소유즈호에 탑승하기 전에 손을 흔들고 있다.     ©국민일보


“수만 명이 사는 공군부대에서 한국 여자인 저 한 사람 때문에 모든 한국 사람이 그런 것처럼 생각하지요. 그냥 하나의 실수가 아니라 그걸 본 수많은 사람은 ‘한국사람 이렇더라’고 합니다. 훈련하면서 제일 힘든 것이 이소연이 실수한 것이 아니라 한국우주인 후보, 한국 사람이 실수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대표한다는 생각을 안하고 하루하루 살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잘 생각해 보면 대표입니다. 내 행동으로 부모님을, 모교를, 조국을 추측합니다. 마치 해외여행 가보면 중국사람 수십억 인구엔 1%도 안되는 그 사람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에 그냥 ‘중국 사람들 매너 없다’고 정죄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그들은 중국에서 제일 매너 없는 사람들만 모여있는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우주정거장이나 훈련센터에서 좀 억울했습니다. 제 행동 하나로 한국을 평가합니다. 원치 않든, 원하든 그것은 한국 사람을 대표했습니다. 억울할 것은 없었지만, 그 삶이 피곤했습니다.”

 
바늘 구멍만한 실수도 

우주정거장에서는 바늘만한 구멍이 나도 여섯 명이 다 죽기 쉽다고 한다. 문이 완전히 닫혀있다고 확인되어야 일할 수 있다. 너무나 아름다고 정교한 과학기술의 지구는 중력을 알지 못하고, 뛸 때도 힘들지만, 막상 그 중력이 없으면 일할 때도, 잠잘 때도 밥 먹을 때도 힘들고, 얼마나 중력이 좋은 것인지 몰랐다고 했다.

“중력이 없으면 날아다닐 수 있지만, 막상 없어져보니 중력이 필요하지요. 수많은 과학자들이 우주중력을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팔과 다리의 혈액순환은 심장이 하는 게 아니라 중력이 합니다. 심장이 뛰지 않아도 팔다리에도 피가 도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70%는 중력이 합니다. 30%만 심장이 뇌에 밀어줍니다. 위는 심장이 잘해줘야 올라갑니다.

지구에선 하반신 쪽으로 피가 몰리지만 우주에서는 머리 쪽에 피가 몰려 얼굴은 늘 퉁퉁 붓습니다.  그런데 우주에 올라가면 중력이 없어서 팔다리에 피가 안갑니다. 그래서 팔 다리가 가늘어져요. 저 개인적으로 너무 좋았습니다(웃음). 무중력 상태에서 척추의 뼈와 뼈 사이 연골, 팔다리의 관절이 늘어나 키가 4㎝ 이상 커질 수 있지만 근육·신경이 함께 길어지지는 않기 때문에 귀환하면 원래 키로 되돌아갑니다.

우주는 피부 건강에 관한 한 최악의 환경입니다. 지구에서는 공기 중 산소 비율이 20%(나머지는 질소)에 불과하지만 우주복 안은 100% 산소로 채워졌습니다. 이때 과잉 생산된 활성(유해) 산소가 정상 피부세포에 손상을 주어 피부 노화를 촉진한다고 합니다.

우주에서 3달 이상 살면 뼈나 근육이 가늘어집니다. 칼슘이 빠져나가고, 불필요한 것을 다 빠져나갑니다. 우주인들이 6개월 이상 체류하면 무중력 상태에서 뼈의 골밀도가 감소해 골다공증의 진행 속도가 빨라집니다. 팔다리에 피가 부족하니 우주에서는 지상보다 70%의 피로 삽니다. 지상에 내려오면 2시간 만에 피가 내려오는데, 2주 정도 병원에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중력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없어져 보면 깨닫는다고 하였다. 지상에서 훈련할 땐 선배들의 우주복으로 연습한다고 하였다. 조금만 잘못되면 먼지가 묻고, 바늘구멍같은 자국이 나면 그걸 입고 우주에 못가기 때문이다. 우주비행 두 달 전에 우주복은 자기 몸에 꼭 맞게 제작하여 입은 후 우주복 안에 산소를 꼭 채운다고 한다. 그가 우주복을 만들 때 신기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웬 할아버지가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어요. 누구신가 했더니  유리 가가인 전세계 최초의 우주복을 만든 분이었습니다. 러시아 우주인 할아버지, 한 달에 100불도 못받지만 ‘나 아니면 이걸 못만든다’는 자부심으로 일하신 분이었습니다. 돈 한푼도 안줘도 일하는 분이지요.

제 친구들 중에 좋은 기업 간 친구들 지금 저보다 월급 두세 배 많이 받지만, 저는 직업을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돈보다 느낌, 우주인으로서의 자부심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2불도 안되는 한 끼 식사를 하지만, 제가 우주복으로 태권도 날아차기 자세를 하니 ‘우주복은 태권도 하라고 만든 것이 아니야, 우주복이야’하면서 화도 안내면서 웃으묘 편안하게 말해 주던 그 할아버지가 굉장히 인상에 남아있습니다.”

출발 직전, 러시아 정교회 의식에 따라 사제가 성수를 얼굴에 뿌려주었다. 러시아 군부대 안에서 지구를 지키기 위해 우주로 파견되는 것을 신고했다. 이때 기다리는 시간에 여성 최초의 우주인인 대통령 할머니가 한국 최초의 우주인이라는 말을 듣고 특별기 전세기를 내어 만나러 왔다고도 하였다.

우주정거장에서 그는 18가지 우주 실험을 했다. 화학실험, 물리실험, 모든 나라가 하는 실험 18가지 중에 틀린 것 하나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초중등 교과서에 나온 4가지 실험이 지상과 우주가 뭐가 다른가? 지상에서의 물과 우주에서의 물의 차이 등등 18개 실험하기에는 24시간 하루가 모자랄 정도였다.  

 
역경이 단련시켰다

 
▲ 이소연 박사가 국제우주정거장에서 과학실험을 하고 있는 모습.     ©국민일보


그는 KAIST 기계공학과에서 여학생이 2명일 때, 은연중에 그의 행동은 모든 여성의 행동을 대표하더라는 경험을 이야기했다. 어쩌다 지각을 한번 해도 ‘여자는 지각하고 다 그래. 게을러!’ 그런 식의 평가를 받던 것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렇게 주목되니 창피하지 않으려고, 눈에 띄는 여학생 하나로 그렇게 올라간 성적은 결국 자신의 것이 되더라고 했다.

“가장 힘들고 ‘괴로웠던 조건’이 저를 단련시켰습니다. 외국에서 교환학생이 오면 내 옆에 앉히고, 미국에 공부하러가 인터넷으로 컴퓨터를 주문했는데 오지 않아 전화하니 저쪽에서는 연발 ‘죄송합니다’는 말만해요. 죄송이고 나발이고 저는 당장 컴퓨터를 써야 하잖아요. 그런 상황들이 5년간 겹쳐질 때 하나씩 헤쳐가면서 강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UC 버클리 교환학생 때, 금요일 밤에 넉다운 되도록 마시고도 그 다음날에 끄떡 없이 실험하는 백인들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고 했다. 그때 한 선배가 체력은 백인을 못따라간다는 말을 듣고 ‘IQ가 똑같다면 하루라도 더한 놈이 이긴다’는 마음으로 매일 달리기 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때 그것이 우주인 선발 제일 첫관문인 체력 테스트(3.4킬로 달리기)에 그렇게 도움이 될 줄을 몰랐다고 한다.

“그렇게 원수처럼 했던 순간, 불편하게 하던 불편한 것들이 저를 날아가게 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씨줄과 날줄이 되어 한 인생을 성숙시키는 튼튼한 줄이 된다는 사실을 그의 삶에서 배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성경 말씀을 삶으로 증언하는 것이다.  

“우주인 선발 시 3만 2천 명이 넘는 지원자 중 10명이 남았을 때였습니다. 팀워크 테스트 때 주변 물건 이용하여 기계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어릴 적에 컵에 식용소다를 넣고 사이다를 부으면 부글부글 이산화탄소 나오는 초등학교 ‘탐구생활’ 과목에 나오는 실험을 저 혼자서 해본 것이 생각나서 써먹었습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생활에서 한 것들을 얼마나 써먹을 것인가 생각하지만 언제 어떻게 써먹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쓸 날은 꼭 옵니다. 한국 사람이지만 한국에 대해 모르는 것이 제일 많습니다.

전 세계 우주인 다  모이는 자리가 일 년에 한 번 있습니다. 마침 그때 한국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걸 물어보는 거예요. 우주인이 다 모인 자리에서 조선왕조에 대해 물어보는데 저는 대답을 못하는데, 옆에 있는 미국 친구가 그걸 좔좔 설명을 해요. 어떻게 알았나 하고 물어보니 대학 시절, 교양으로 들었다고 해요. 과학도로서 과학만 하고 인문학적 소양을 넓히지 못한 것이 참 후회되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와 초등학생용 ‘맹꽁이 서당’ 국사 교과서 등을 읽으니 ‘어마, 학생들 강연하니 눈높이 맞추려고 그러는군요, 우주인이 이런 책을 읽고 있으세요?’하고 물어봐요.” 

 
한국 출생자는 로또 복권 2등 당첨자

우주에 갔다오고 난 뒤 그는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하루에 지구를 16바퀴 돌면서, ‘저 넓은 지구에 하필이면 대한민국 광주 우리 아빠의 딸로 태어났을까? 신청서도 안썼는데, 내가 그 누구도 원해서 아닌데, 왜 누구는 아프리카에 태어나 얼마 안돼 죽어야 하며, 전쟁 통 한가운데 태어나야 하는가?’ 이 사실이 우주에서 아래로 지구를 쳐다보고 있으니 너무 궁금했다고 했다.

“우주에 올라가 내려보니, 전세계 상위 10%인 대한민국에 태어났더라구요. 이를 계산해보니 대한민국에 태어날 확률은 로또 2등 당선될 확률보다 높아요. 1등보다 낮고요. 우리는 날 때부터 로또 2등으로 당선된 것입니다. 비유하기 뭣하지만, 아이들을 지구 위에서 뿌렸을 때 떨어질 확률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필이면 북한이 아닌 남한에 태어난 것도 감사하구요. 아프리카 후원하는 단체 아이들은 꿈이 뭣인가 하면 학교가는 것입니다. 한국에 태어난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이소연 박사는 우주비행을 마치고 귀국 후 청와대로 이명박 대통령을 예방했다.    © 국민일보


특히 저의 경우, 제가 왜 꽤나 잘나가는 한국에서 태어났는가도 축복이지요. 한국에 50년 전에 태어나도 우주에 못갔을 것이고, 50년 후에 태어났어도 최초의 우주인이 못됐을 것 아닙니까? 2006년에 대한민국 공학박사 과정의 29세 여학생이 선발될 확률, 택함받을 확률이 굉장히 낮습니다. 그래서 3만 6천명의 탈락한 분들이 TV를 봤을 때, ‘쟤가 하길 참 잘했다’고 하는 맘이 들기를 바라면서 오늘을 살아갑니다. 30세에 우주 비행을 하게 되었지만, 19세 이상이면 무조건 지원할 수 있었을 때, 18세 나이로서는 억울할 일이지요. 누구든 제 자리에 오면 저보다 더 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꿈은 소박했다. 이웃 사람들에게 ‘옆집 언니, 옆집 아줌마~ 재도 하는데 나도 왜 못해?’하는 말없는 격려자가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는 어릴 때 여름 장마만 되면 침수하는 지역에서 성장했다. 곧 물에 잠기게 된다는 동사무소 방송이 나오면 친척집으로 피신해야 하는 마을이었다. 그 마을에서 그가 우주인으로 선정되었을 때 작은 센세이션이 일어났다. ‘TV 봤느냐 걔와 똑같애!’라는 소문이 퍼졌다. ‘이런 동네에서 그런 아이가 이 동네에서 나올 수 없다’는 숙명론으로 물든 마을이었다. 그래서 우주인이 되고 나서 그의 꿈도 ‘엄마 아파트 사주는 것’일 정도였다.

“올림픽 때 금메달 탈 선수들의 집에는 가족들의 표정을 잡으려고 기자들이 대기하잖아요? 마지막 두명 중 우주인 선택 순간 기자들이 우리 집에 진 치려고 했는데, 부모님들이 찜질방으로 피난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분들의 얼굴 담으려고 하지만 ‘이 꼴’이 전국에 다 나가면 어떡하느냐는 딸의 자존심을 생각하신 거지요. SBS 국장님이 ‘집 보여주기 싫어서 그러시는데 괜찮겠느냐?’고 그래요.

제가 이런 집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 집의 ‘이 꼴’을 보고, 동일한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많은 분들이 자신감을 갖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하여 ‘다 보여드리라’고 했습니다. ‘쟤도 하는데 내가 왜 못해?’ 하는 자신감을 갖기를 바랬지요.”

그런 약자들을 향한 배려의 마음을 소유하고 있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이였다. 작년 카이스트에 자살사건이 일어나자, 학내 커뮤니티 사이트에 익명으로 ‘딸기 100박스를 나눠줍니다’라는 글을 올리고 다음 날 레게머리와 선글라스 차림으로 캠퍼스를 찾았다.

“딸기 파티 시즌 후배들이 우울해 있으니, 한달 라디오 출연료 털어서 딸기 100박스 사서 갔습니다. 시험기간이었어요. 잇단 자살사태로 마음이 얼어붙은 후배들을 잠시나마 풀어주고 싶었어요. ‘무슨 사태가 어떻게 일어났든지 현재 내 삶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후배들의 ‘프리 허그’ 활동에도 참가했다. 그는 후배들을 꼭 껴안은 채 “절대 좌절하지 말고 힘을 내야 한다”고 격려했다. 

 
우주투자와 삶의 질

사실 그의 부친은 딸이 우주인으로 지원한 줄 모르고 정부의 우주 투자를 욕할 정도였다. 피땀흘려 바친 세금으로 지상에서 가장 비싼 옷을 입혀 우주로 보내는 것이 필시 못마땅한 것이었다. 전혀 실속도 없어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먼저 우리 손의 필수품인 핸드폰이 인공위성이 없으면 안됩니다. 구글 맵도 마찬가지구요. 테니스 라켓, 등산복, 라텍스 침대, 운동화도 뒷굼치에 펌프 달린 것 등 모두가 우주기술 개발과 더불어 개발된 것입니다. 전자레인지를 개발한 것도 한 대에 몇 억씩 하면서 우주에 올려보냈던 것입니다. 우주인 밥 먹이려고 만든 것이 오늘 아침 음식 데워먹는 것이 되었습니다. 우주기술이 그만큼 가까이, 우리 생활 속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면서 그는 로켓 설계도를 그린 러시아 우주과학자 치아곱스키를 소개했다.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 발명하기도 전에 그 당시 우주 정거장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한 분입니다. 사비 털어서 비행기 만들었지요, 그분은 ‘지구라는 곳이 인류에게는 요람이다. 누구도 요람에서는 평생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지구가 요람입니다. 공짜로 지구에 있는 모든 것이 주어졌습니다. 인류가 발전하려면 지구를 떠났을 때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구를 떠나면서 핸드폰, 인공위성으로 지구 반대편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주로 나가는 게 더 발전하는 길입니다. 우주기술은 인류에게 가장 기본적인 기술입니다. 얼마나 탁월하느냐에 따라 국력이 좌우합니다. 우주기술을 많이 가진 나라가 강력한 국가임엔 틀림없습니다. 우주기술은 나사 하나 때문에 다 죽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박사는 어느 날 화장실에서 “피나는 노력의 결과는 어느 날 행운처럼 다가온다”는 말이 기막히게 와닿아 이제껏 살아오는 동안 좌우명이 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노력하고 이때쯤 결과가 오겠지 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2~3년 전에 취직해야 하는데, 우주인이 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한 결과는 어떤 시기에 행운처럼 오는 것 같았습니다.”

‘한국 최초의 우주인’으로서 사회적 기대감을 한몸에 받고 있는 그는 ‘한국 과학기술발전의 전도사’로서, 다른 분야의 사람들에게 과학이 친근하게 느껴지도록 하는데 일조를 하고 싶어 했다.

우주인이란 한마디로 ‘지구에 있는 사람을 대신하여 우주에서 일하는 로버트’라고 생각하며, 좀더 튼튼하고 대신해 주는 사람이지 뭔가 더 잘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겸손하게 말했다. 그가 말하는 과학이란 우리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으로, 과학 덕분에 편하게 사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사람이 게을러지게 하는데 가장 과학이 크게 역할한다고도 하면서.

감동있게 읽어본 추천하고 싶은 책으로 <연금술사> <우주로부터의 귀환> <항아리>를 들었다.

“책을 읽을 때면, 다른 사람의 인생과 생각으로 가득 채워진 집안을 문에 난 작은 구멍을 통해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제 기분이나 생각에 따라 부분적으로 일그러지기도 하고, 때에 따라 특별히 한 부분만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는… 그런 면에서 제게 책은 다른 사람의 생각과 인생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바늘구멍 사진기처럼 말입니다.

특히 <항아리>는 ‘어른이 읽는 동화’라는 부제처럼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읽어보면 또 다른 교훈과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항아리>는 안데르센이나 이솝의 동화들 못지않게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인생에 대한 또 다른 생각과 반성을 주는 그래서 가끔 다시 펴보게 되는 책입니다.”

30여 년 전, 똘망똘망 반짝이는 눈빛을 가진 주일학교 어린 소녀, 이소연은 우주를 주제로 개최된 학교 미술대회에 상상력을 가득 담은 그림 한 점을 출품했다. 그림에는 ‘은하철도 999’처럼 우주를 나는 기차를 타고 다른 별로 향하는 소녀 자신이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은 이후 오랫동안 소녀의 방에 걸려 있었고, 무시로 소녀를 꿈과 희망의 세계로 이끌었다. 이 소녀는 어느덧 훌쩍 자라 전도유망한 공학도가 됐다.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꿈을 먹고 살아가던 어느 날, 우연히 펼쳐 든 신문을 보다가 한 줄의 기사에 눈이 고정되었다. 이내 쿵쾅거리는 가슴! 어린 시절 이후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그래, 이거야! 나라고 못할 게 뭐 있어!’

그 작은 결심은 바로 우주를 향해 쏘아올린 꿈이었다. 그 꿈은 여전히 더 큰 꿈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진행형이었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자료사진제공|국민일보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