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릉!"
핸드폰의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새로 들어갈 집으로 이삿짐을 옮기고 있는 중이었다. 호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을 꺼내 보니 권순형 발행인의 번호가 떴다. "정 목사님, 긴급 상황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헬렌 맥켄지 선교사가 어젯밤에 돌아가셨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너무 당혹스럽고 믿겨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호 선교 120주년 기념을 맞아 그녀를 10월 호 표지 인물과 함께 이야기를 실을 거라며 글 부탁을 받은 후 며칠 끙끙대다 글을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뿐만 아니라 다음 달 7일 96세 깜짝 생신 축하 파티를 한국에서 온 일신 병원 관계자들과 함께 열거라며 들 뜬 전화를 받은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단 말인가? 물론 연세로 봐 선 늘 준비하고 있어야 됐지만 그래도 이렇게 갑작스레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그녀의 죽음을 확인시키는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양성대 목사(딥딘교회)의 것이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본인이 한국 사람이라며 한국에 가서 부산에 일신병원을 세워, 많은 여성들을 돌본 헬렌 맥켄지 선교사가 어젯밤 (저녁 7시경)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1913년 10월 6일 생이므로 만으로 거의 96세였습니다.) 2주 전에도 교회에 나와 같이 예배를 드렸고, 어젯 밤에도 동생과 같이 저녁 식사를 하며 잘 있었는데, 식사하고 나서 몸이 안 좋다고 침대에 들어갔는데 금방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저와 제 처는 어제 우리 교회의 영어 회화반에 가서 자원봉사를 하였는데, 마침 모발폰을 갖고 있지를 않아, 헬렌의 동생들이 연락을 했는데 제게 연락이 닿지를 않았습니다. 어젯밤에 한 중국인 학생을 멀리 집에 데려다 주고 밤 10시 넘어 집에 왔는데, 우리 딸아이가 몇 차례 전화가 왔었다고 말해 주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어젯밤 11시 가까이 늦게 헬렌(매혜란 선교사)의 양로원에 가서 같이 살고 있는 동생 실라를 만났습니다. 실라는 자기 방에서 잠을 자려고 침대에 들어가 있더군요. 아무튼 늦게 실라를 만나고 오늘 아침 헬렌의 동생 루시, 실라와 장례식에 관하여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장례는 10월 9일 금요일이 좋겠다고 식구들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선교사로 갔던 사람들이 모이기가 쉬운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지내고 있는 존 브라운 목사님이 지금 한국을 방문 중인데, 이 분이 돌아온 후, 좀 더 자세히 장례 절차를 상의하기로 했습니다."
아, 꿈은 아닌가 보다. 그녀의 죽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고 나자 마음 한 켠이 후회와 함께 시려왔다. 지난 번 그녀를 만나고 와서 혼자 외로이 있는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혀 한 번 곧 찾아 뵈야지 마음먹었었는데 이런 저런 일로 미루다가 그만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 앞에 죄송스럽기도 하고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왜 하나님께서 지금 그녀를 데리고 가셨는지 야속하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몸이 안 좋아진 후로 그녀는 우울증까지 앓았었다고 했다. 선교사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나서 병실에 갇혀 늙어만 가는 자신의 처량한 처지에 낙심이 됐으리라. 빨리 하나님께서 데려 가셨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때는 데려가지 않으셨다. 그렇게 시간만 지루하게 흘렀고 사람들로부터 점점 잊혀져가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최근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한․호 선교 120주년 즈음부터였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한․호 선교의 산증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96세의 생신을 맞이하게 돼서 그녀 자신에게 있어서도 뜻 깊은 날이기도 했다. 모두가 늙고 병든 그녀를 축하할 준비를 마쳤었는데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이다.
지난 번 그녀의 양로원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느낀 것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의 사랑을 받도록 이 땅에 가장 귀여운 모습으로 우리들을 보내시고 가장 늙고 추한 모습일 때 데려가신다는 것이다. 왜일까? 그 누구도 반기지 않은 모습일 때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들을 받아 주신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기까지 하나님은 노년의 유예의 기간을 보내게 하신다는 것이다. 오직 그분의 품만이 우리의 안식과 최종적인 환영의 곳임을 깨닫도록 하심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혹 사랑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질투는 아닐까? 지금 천국에서는 하나님과 그분의 품에 안긴 헬렌이 이런 대화를 하고 있지 않을까? "하나님, 사람들의 축하 속에 96세 생일잔치를 받게 하시지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부르셨어요? 사랑이 그리워 그동안 너무 외롭고 힘들었는데..." 야속하다는 듯 투정을 부리는 그녀를 품에 안으시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실까? "헬렌아, 그래서 지금 부른 거란다. 사람들에게 너의 생일잔치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단다. 너의 기쁨이 오직 나였으면 해서... . 딸아, 사랑한다!" 그 무엇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당신을 가장 사랑했고 사랑해 주실 그 분께 당신을 보내드리며 천국에서 맞이하실 96세의 생신을 우리 모두가 축하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한국을 사랑해주신 당신께 고마운 마음을 담아 이 편지를 보냅니다. 사랑하는 헬렌 선교사님!
덧붙이는 글 1956년에 제임스 노벨 맥켄지 목사(한국명 매견시)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약속한 말처럼 그의 두 딸을 한국 사람에게 보냈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초등교육을 받았던 맥켄지 목사의 큰딸인 의사 헬렌 맥켄지(Dr. Helen Mackenzie, 매혜란)와 둘째딸인 간호사 캐서린 맥켄지(Catherine Mackenzie, 매혜영)는 1950년 6.25사변이 일어나 우리 민족이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 당하고 있을 때, 그의 부친이 세상을 떠나기 4년 전 1952년 9월에 부모가 일하였던 부산으로 건너와 부산시 동구 좌천동 부산진교회의 일신유치원에 일신부인병원(Il Shin Women's Hospital)을 설립했다.
그 후 한때 부산진교회였던 현재의 자리에 병원을 신축하여 운영하다가 20년을 마무리하고 1972년 9월에 부산진교회의 김영선 의사에게 원장을 넘겨 운영케하고 본국으로 귀국했다. 그 후 관계되는 교육기관의 신설, 진료과목의 증설, 200병상의 시설 확장 등 발전을 계속하다가 1982년 11월에 종합병원으로 승격하면서 현재의 이름인 일신기독병원으로 개명했다. 1985년에 공군 의무감 출신인 부산진교회의 박경화 장로가 제3대 원장에 취임하면서 세계은행 차관으로 모자보건센타와 함께 병원을 크게 확장하여 지역 굴지의 우수병원으로 발전하여 병상 320개를 가지고 하루 외래환자 1천 명, 매 년 분만 수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그후 병원 발전의 긴 안목을 가지고 1999년 부산의 발전하는 변두리인 북구 화명동에 직원 80여 명, 병상 70개의 화명일신병원을 개원하여 운영하고 있다.
매혜란, 혜영 자매는 귀국 후 수시로 자신이 설립한 병원을 찾아와 출석하였던 부산진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2002년 9월에는 개원 50주년을 맞아 맥켄지 역사관을 개관하고 맥켄지 목사가 한국에 온 지 20주년을 기념하여 1930년에 건립하여 소실된 건립비를 일신기독병원과 상애교회가 공동으로 일신기독병원 옆에 복원 제막하였다. 병원에 관계되는 많은 자료는 일신기독병원의 맥켄지 역사관에 전시, 보존되어 있다.☺
글/정원준(멜본 우물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