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초기선교사 권임함의 후손 그웬 커닝햄

선교사 후손인 것이 기쁘고 자랑스러워요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09/10/07 [10:52]

'한․호 선교 120주년 기념대회'를 준비하던 중 한 장로로부터 하나의 이메일을 받았다. 한국 초기선교사 권임함 선교사(F.W. Cunningham)의 미망인을 한 모임에서 만났다는 내용이었다.

`권임함 선교사의 아내가 살아있다?'

믿기지가 않았다. 갑자기 마음이 두근거리고 흥분이 번졌다. 그동안 기자는 호주 선교사들의 복음의 뿌리를 찾아 한국 땅 수많은 지역을 찾아 취재를 떠났었다. 그 때마다 영혼 가득 번지던 그 설렘과 흥분 이후 이런 떨림은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흥분과 떨림은 그녀가 살고 있는 세인트 아이브스(St. Ives) 집 앞에 도착하면서 사라졌다. 본지 권순형 발행인이 고개를 갸웃 거리면서 말했다.

"어? 20년 전에 왔던 집이네. 권임함 선교사의 아들이 이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 권임함 선교사는 학자적 능력과 언어의 재능이 탁월하여 한국에 간 선교사 중에서 한국어가 가장 능통했던 인물로 불리기도 했다. 31년 간 한국에서 사역한 그는 전도자로, 성경교사로 그리고 남궁억, 크레인 등과 신구약 개역위원으로 한국 교회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사진은 성경 개역 작업중인 권임함 목사(가운데)     © 크리스찬리뷰


초인종을 눌렀다. 선한 눈매와 서글한 인상이 매력적인 할머니 둘이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 중 한 할머니가 나서서 자신을 르네이트 메셀(Renate Messerle)이라고 소개한 후 그웬 커닝햄(85. Gwen Cunningham)씨를 돌봐주고 있다고 했다.

"이 분이 커닝햄 선교사의 며느리 그웬 커닝햄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기대 한만큼 실망도 컸지만 며느리도 커닝햄 선교사의 후손으로 방송용어로 그림이 되는 인물이 아니던가? 집안으로 들어가자 온통 한국가구와 한국그림, 한국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래서일까. 고향집에 들어선 듯 편안했다.

그녀는 "차를 마시겠느냐?"며 "진생도 있다'고 했다.

"진생? 아, 인삼차요?"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녀는 한국인으로 살고 있었다.

"참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언제 그렇게 빨리 흘러갔는지. 제 자신이 늙어가면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께서 하신 일들이 참으로 귀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그분들보다 더 오랜 삶을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그분들만큼 교회를 위해 한국을 위해 열심히 살았는지 부끄러울 따름이죠."


▲ 젊은 시절 권임함 목사. 그는 1912년 대학을 졸업하고 26세에 한국 선교사로 진주 지부에 배속되었다.     © 크리스찬리뷰


그녀도 한국을 사랑하고 있었다.

권임함 선교사 (Frank William Cunningham)

권임함 선교사는 한국에 갔던 호주 선교사 중에서 가장 특출한 선교사 중의 한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고상한 인품의 소유자로 지도력과 행정력도 뛰어났고 매사를 사려 깊게 처리하는 이름 그대로 준비된 선교사였다. 특히 그는 학자적 능력과 언어의 재능이 탁월하여 한국에 간 선교사 중에서 한국어가 가장 능통했던 인물로 불리기도 했다.

그가 한국에서 공부했던 한국어 공부교재를 보면 한국어만이 아니라 한문에도 상당한 실력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전도자로, 성경교사로 그리고 성경 번역가로 한국에서 큰 자취를 남겼다.

그는 1913년 한국으로 건너가 진주, 마산, 부산 등지에서 1941년 일제에 의해 한국을 떠나기까지 28년간 사역했다. 해방 후 1947년 다시 한국으로 건너간 그는 한국전쟁으로 한국을 떠나기까지 다시 3년간 사역하였다. 그래서 그가 한국에서 사역한 기간은 31년간에 걸친 기간이었다.

권임함 선교사는 1887년 12월 19일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리차드 커닝햄(William Richard Cunningham)의 12남매 중 장남으로 빅토리아주 킬모어(Kilmore)에서 출생했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중등학교를 마치고 멜본대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그의 예리한 지성과 학문적인 안목은 여러 교수들의 관심을 모았다.

1908년 4월 4일 멜본대학을 졸업한 그는 장로교회의 올몬드대학(Ormond College)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스코틀란드의 자유교회(Free Church)의 전통을 계승하고 에딘버러 출신의 신학교수들이 주로 봉사하고 있었는데 당대 호주의 저명한 학자들이었다. 그는 1912년 9월 15일 졸업하였고 곧 목사 안수를 받았다.

선교사로 임명받은 그는 1913년 초 호주를 떠나 1월 16일 한국에 도착해 진주에 배속되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진주 지부는 호주 선교부가 부산에 이어 가장 주요한 전략적 지부였는데 이곳에서 우선 언어 공부에 몰두하였다. 그는 한국에 도착한지 3년이 지난 때부터 진주성경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그 후 20년간 진주성경학교 교장으로 봉사하였다. 그는 성경학교 교육을 담당하면서도 지역교회를 관할하고 순회하였고, 또 당회장을 맡아 봉사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1920년에서 1932년까지 진주지방의 첫 교회인 진주교회의 당회장으로 일했다.

거창지부는 1913년에 설치되었으나 여전히 선교사가 부족하였으므로 진주지부의 선교사들이 거창지역을 순회하기도 했는데, 권임함 선교사가 관할했던 교회로는 가천교회, 위천교회, 함양교회, 초계교회 그리고 구원교회 등이다.

그의 한국에서의 사역 중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사역은 성경 번역 위원으로 활동한 일이다. 1926년 구약 개역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932년에는 신약 개역위원으로 위촉되어 크레인, 남궁억 등과 함께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을 개역하였다. 이후 3인조 개역팀은 1933년 요한복음, 누가복음, 빌립보서를 개역하였다. 1905년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 제2대 총무가 된 후 거의 30년간 한글 성경 개혁과 편찬, 반포사업을 주도했던 밀러(H. Miller)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겨주고 있다.

"호주장로교회의 커닝햄(권임함)목사는 7월에 휴가를 떠나 14개월간 부재할 예정입니다. 그는 한국의 신약개역에서 최고의 사람으로 우리는 그를 그리워할 것입니다. 나는 그가 돌아오면 그의 선교회가 개역작업을 그의 주된 사역으로 만들어서 더 많은 시간적 여유를 주기를 희망합니다."

안식년에서 돌아 온 권임함은 선교의 일을 잠시 중단하고 개역작업에 몰두하였고, 1937년 모두 완료했다. 이 과정에서 권임함은 성경 번역위원으로 커다란 업적을 남겼던 것이다.

호주장로교회의 기관지였던 메신저에는 권임함의 사역과 활동에 대해 '성경 개역위원회의 신약분과 위원으로서 그의 사역은 대한성서공회 총무와 위원들로부터 높이 평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권임함 선교사는 1939년 10월 선교부 회의에 참석한 후 안식년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제2차 대전의 발발로 안식년이 끝났으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결국 그는 1941년 6월 30일자로 선교사직에서 공식적으로 사임하고 링우드 크로이돈(Ringwood Croydon)지역교회의 초청으로 목회자로 돌아갔다.

그 후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1945년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하자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 교장 함태영 목사는 호주장로교 선교부에 권임함 선교사를 교수 선교사로 파송하여 달라는 장문의 간곡한 서신을 보내 권임함 선교사는 1947년 다시 한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6.25동란의 발발로 다시 한국을 떠나게 된다.

호주로 돌아온 그는 브란스홈(Branxholme)에서 은퇴할 때까지 사역하였다. 현역에서 은퇴한 그는 박스 힐(Box Hill)에 거주하면서 발윈 하이츠교구(Balwyn Hights Parish)설립을 위해 봉사하였고 1981년 8월 18일 성 앤드류 병원(St. Andrew's Hospital)에서 9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1920년대 초 한국에 파송된 호주 선교사들. 권임함 목사 부부 앞에 앉은 사람이 왕길지 선교사이며 왼쪽 끝에 매견지 선교사 등이 보인다.     © 크리스찬리뷰


시아버지는 매우 경건한 분

"시아버지는 참 조용하고 경건한 분이셨어요. 7개 박사 학위도 가질 수 있었으나 시아버지가 고사해서 박사학위 하나도 가지지 않으셨다고 동료 선교사들이 얘기를 해주셨지요. 성경 말씀을 대할 때는 하나님을 대하는 것처럼 두려워 하셨어요. 기억이 생생한데 걸음은 빠르셨지요. 그리고 항상 바쁘셨던 것 같아요."

"한국에서 사역하실 때 힘들었다는 이야기는 없었는지요?"

"이 말씀은 하셨어요. 각 지역을 다니면서 교회에서 먹고 자고 하셨는데 참 굶기도 많이 하셨대요."

"시어머니(Catherien Treischman Canningham)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지요."

"시어머니는 원래 독일에서 태어나셨어요. 미국으로 건너가신 후 감리교 선교사로 일본으로 가셨는데 영어 선생이었대요. 어느 날 후지산에 갔다가 시아버지를 만나 결혼하셨는데 그 후 한국으로 가 남편 짐(Jim)을 낳은 거지요. 시어머니도 참 조용하시고 침착하셨어요."

"짐은 어떻게 만나 결혼을 하셨는지요?"

"멜본에서 열리는 크리스찬 컨퍼런스에서 만났어요. 참 진실한 크리스찬이었지요. 짐도 시아버지를 닮아 온순하고 사진 찍기를 좋아했어요. 우리는 1952년도에 결혼했지요. 시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짐은 늘 부모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한국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여기 보세요. 짐이 간직했던 거에요."

그녀가 내민 것은 낡은 사진첩이었다. 권임함 선교사가 남긴 유품들, 가슴이 철렁했다. 일생을 다 내주고 빈손으로 다녔는데 유품이 있다니, 영혼까지 두근거리는 기분이었다. 그의 체취가 담긴 사진을 보노라니 울컥 가슴이 흔들렸다.


▲ 사진 촬영에 남다른 관심이 많았던 권임함 선교사는 그의 사역지였던 진주, 마산 등지에서 한국인들의 생활상을 담은 많은 작품사진들을 남겼다.     © 크리스찬리뷰


"또 있어요."

이번엔 놋 쟁반이었다.

"시아버님이 1933년 안식년으로 귀국하실 때 거창교회 교우들이 기념으로 준 거에요."

마음이 우우 떨리면서 전율이 느껴졌다.

그녀는 두 딸(Esther, Catherine)이 있다고 했다. 거동이 다소 불편한 듯 부축을 받으며 각종 유인물이 전시돼 있는 탁자로 자리를 옮기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1960년 멜본에서 시드니로 왔지요. 짐하고 우린 행복했어요. 선교사 자녀인 것이 참 자랑스러웠어요. 짐은 1991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지요."

"한국에는 다녀오셨는지요?"

"예, 두 번 갔었어요. 한 번은 한호선교 100주년기념대회에 초청되어 갔었구요. 또 한 번은 여행길에 한국을 방문했어요. 부산, 마산, 진주, 울산을 거쳐 서울까지 갔는데 서울 영락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지요. 얼마나 감격스럽고 놀라웠는지요. 시아버지가 한국에 심은 작은 씨앗이 그렇게 풍성하게 열매를 맺은 것을 보니 울컥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녀는 "Amazing(놀랍다)!"을 연발했다.

기자가 창신대학교 팜플렛을 발견하고 물었다.

"마산 창신대학교도 다녀오셨군요?"

"그래요. 그렇게 큰 학교인 줄 몰랐어요. 사진으로 보았던 옛 학교는 작고 허름한 모습이었는데요."

"그러면 창신대학교 강병도 총장을 아시겠네요?"

"예, 기억합니다."

"이번 한․호 선교 120주년을 맞아 강 총장님이 주축이 되어 부산, 경남지방에서 별세하신 8명의 호주선교사들을 위한 묘원을 조성하기로 했어요, 기념관 건축도 계획하고 있구요."

"아, 그래요?"

"강병도 총장님이 이번 시드니 행사에 참석하십니다. 오시면 찾아뵙도록 하지요."

"고맙습니다."

▲ 권임함 선교사가 타고 다녔던 조랑말과 마부     © 크리스찬리뷰


그녀는 한․호 선교 120주년 기념대회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권순형 발행인이 한․호 선교 120주년 기념으로 출간된 <주야 나를 불샹이 넉여 도와 주쇼서> 한 권을 건네면서 "책이 나온 지가 얼마 안 됩니다. 제일 먼저 드리는 겁니다"라고 하자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띠며 말했다.

"한국에 대해 항상 그리움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선교사 후손인 것이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이 말이 비수처럼 기자의 영혼을 찔러왔다. 심한 방망이질을 당한 듯 가슴이 쿵쿵 울렸다. 

왜 그랬을까?

'우리가 전수받은 이 신앙이 누구의 피 값인지 아느냐?'고 성령께서 조용히 묻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 권임한 선교사는 독일 출신으로 일본에서 사역 중인 미국 감리교 선교사(영어 교사) 캐서린을 일본에서 만나 결혼했다.     © 크리스찬리뷰


에필로그

예의와 명분에 매여 있었던 땅 끝. 조선 복음화는 수많은 서양 선교사들의 희생과 눈물의 열매임을 부인할 수 없다.

「크리스찬리뷰」는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에 나갔던 호주 선교사들의 발자취와 업적을 지속적으로 취재하고 발굴해 왔다. 민족 신앙전수의 뿌리를 찾았다는 희열감은 '기록으로 보존해야한다', '선교사와 후손들에게 빚을 갚아야한다'는 절박한 사명감으로 이어졌고 이번 한호선교 120주년을 맞아 '한․호 선교 120주년 기념대회'를 계획하게 되었다.

▲ 주막(Inn)에서 식사하는 권임함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그러나 아름답고 효과적인 기념대회를 위해 '한․호 선교 120주년 기념대회'를 호주연합교회 총회와 예장 통합 총회가  공동 주최하기로 결의하고 본사가 기획하고 준비한 모든 것을 양 교단 총회가 수용하기로 하는 한편, 한․호 양국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행사를 진행하기로 하고 본사는 그동안 추진해왔던 대부분의 사항들을 준비위원회로 넘겼다.

시드니와 멜본에서 열리는 기념대회에는 그동안 한국에서 사역한 호주 선교사 총 130여 명 중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37명의 선교사들을 초청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이 기간 중 세미나도 열어 호주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발표할 예정이다.

▲ 일본에서 권임함 선교사와 결혼하고 1917년 한국으로 온 부인 캐서린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성공적인 기념대회가 될 수 있도록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린다.


▲ 권임함 목사가 1933년 안식년으로 귀국할 때 거창교회 교인들이 증정한 놋 쟁반.             © 크리스찬리뷰
▲ 그웬 커닝햄 여사의 집안은 온통 한국색 일색이다.     © 크리스찬리뷰
▲ 권임함 선교사의 자부 그웬 커닝햄 여사(85)     © 크리스찬리뷰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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