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와 캐나다 장로교회의 초기 한국선교 비교연구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09/10/07 [11:02]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와 캐나다 장로교회의 초기 한국선교 비교연구
- 헨리 데이비스와 윌리암 맥켄지의 선교를 중심으로


A Comparative Study of the Earlier Missions of 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
and the Presbyterian Church in Canada


▲ 윌리암 맥켄지 (William Hohn McKenzie)     © 크리스찬리뷰

19세기 말 한국을 찾아온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와 캐나다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Canada)의 선교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두 교회 모두 역사적 신학적으로 스코틀랜드 개혁교회 전통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둘째, 두 교회 모두 영국연방 식민지에 세워진 이민교회다. 셋째, 두 교회 모두 각각 자국의 전국적 차원의 교회연합과정에서 분열을 경험했다. 1925년 캐나다연합교회(The United Church of Canada)의 설립과 1977년 호주연합교회(The Uniting Church in Australia)의 설립 당시 연합에 참여하지 않은 장로교인들이 현재도 독자적인 장로교회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넷째, 한국선교에 있어서 두 교회 모두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선교했다. 호주교회는 한반도 동남부의 끝 부산경남지역에서, 캐나다교회는 동북부의 끝 함경도와 만주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다섯째, 두 교회 모두 헌신적인 독립선교사의 사역과 죽음을 통해 공식적인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바로 호주교회의 조셉 헨리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 1856-1890)와 캐나다교회의 윌리암 맥켄지(William John McKenzie, 1861-1895)가 그들이다.

데이비스와 맥켄지에게도 많은 유사점이 발견된다. 두 사람 모두 당시 해외선교사로서는 다소 늦은 나이인 30대 초반에 한국을 찾았고, 그의 사역을 일기로 자세히 남겼으며, 무엇보다도 죽기까지 헌신했다. 마지막으로 이들 두 선교사의 죽음 이후 두 교회는 각각 5인의 첫 공식선교사들을 한국에 파송한다.

본 연구의 목적은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와 캐나다장로교회의 초기 한국선교에 대한 비교연구를 통해, 미국장로교회 선교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그 중요성이 다소 과소평가되어 온 호주와 캐나다 장로교회가 초기 한국기독교 형성과정에 끼친 영향을 밝히는 것이다.1) 이를 위해 먼저 호주와 캐나다 장로교회의 선교정책에 대해 살펴본 후, 두 교회의 한국선교가 어떻게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는지를 헨리 데이비스와 윌리암 맥켄지의 사역과 죽음을 통해 연구하려고 한다.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있었던 서울과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미국선교사들 뿐만 아니라,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있었던 부산경남지역과 함경도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호주와 캐나다 선교사들에 대한 통합적인 연구를 통해서만이 초기 한국선교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가 가능하다.

1. 선교정책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와 캐나다장로교회는 모두 스코틀랜드장로교회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또한 이러한 영향 하에 두 교회 모두 호주와 캐나다에서의 교회 연합에 참여하지 않고 독자적인 장로교회로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빅토리아장로교회는 1859년 4월 7일 빅토리아대회(Synod of Victoria), 빅토리아자유장로교회(Fre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 빅토리아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 등 장로교파들의 연합을 통해 설립되었다. 그리고 1977년 6월 22일 호주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of Australia) 다수와 호주회중연합(Congregational Union of Australia) 그리고 대양주감리교회(Methodist Church of Australasia)의 연합을 통해 호주연합교회가 설립될 때, 이 연합에 참여하지 않은 소수의 장로교인들이 호주장로교회로 오늘까지 남아있다.

캐나다장로교회도 1925년 6월 10일 캐나다장로교회 다수와 감리교회, 회중교회 등이 캐나다연합교회(The United Church of Canada)로 연합할 때, 소수의 장로교인들은 이 연합에 참여하지 않고 캐나다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Canada)로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호주와 캐나다교회의 선교정책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먼저 호주교회의 경우, 빅토리아장로교회가 설립된 이듬해인 1860년 총회에서 해외선교위원회(Foreign Mission Committee)가 조직된다. 1860-1889년 동안 빅토리아장로교회의 선교사역은 주로 호주원주민, 중국이민자, 뉴헤브리데스 주민들에게 국한되어 있었다.

이상규 교수는, '당시 저들의 선교의 동기는 고전적 의미에서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 당시 문서를 보면 해외선교(Foreign Mission)란 말보다는 이교도선교(Heathen Mission)란 말이 주로 사용된 점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분석한다.2)

빅토리아장로교회 내에서 해외 선교활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사람은 프랭크 패이튼(Frank Paton, 1870-1938)이었다. 그를 통해 빅토리아장로교회의 해외선교정책은 다음과 같은 원칙을 가지고 전개되었다. 첫째, 모든 선교사들은 효율적인 선교협력을 위해 선교지의 선교협의회(Mission Council)와 선교지부의 감독을 받도록 했다. 둘째, 해외선교위원회가 1909년 5월 확정한 `선교사 정관'에 따르면, 선교사 자격은 안수 받은 목사, 의과대학 졸업생, 의사면허소유자, 평신도 사역자들로 제한되었다. 셋째, 무엇보다도 모든 선교사들은 3년 동안 어학훈련을 받아야 했다. 한국인 선생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우고 어학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넷째, 모든 교회가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하는 일에 힘썼다. 1910년 9월 해외선교위원회는 해외선교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선교기도띠잇기(A Missionary Prayer Cycle)』를 출판했다.3)

흥미로운 사실은,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으로서 노바스코시아(Nova Scotia, 캐나다 동부해안 지역) 장로교회의 파송을 받은 존 게디(John Geddie, 1815-1872)는 호주 뉴헤브리데스의 첫 선교사였다. 그는 1860년 빅토리아장로교회 총회에서 폴리네시안들에 대한 선교적 책임을 역설하여 감명을 주었고, 3년 뒤인 1863년에는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로 이적했다. 호주장로교회와 캐나다장로교회의 선교정책이 상호연관성이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4)

캐나다교회의 경우도 호주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개혁교회 계통의 개혁교회들의 경우 보편적인 선교정책을 수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75년부터 1915년까지 캐나다장로교의 해외선교위원회(Foreign Mission Committee)는 동부와 서부의 두 지부(Western/Eastern Division)로 나눠져 있었는데, 이들은 해외선교위원회와 총회의 동의 하에, 선교사역을 시작하거나 중단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선교사를 파송하거나 다시 소환할 수도 있었다. 이들은 선교사들의 급료와 경비를 결정했으며, 자국 내 교회들에게 선교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한편, 선교활동에 관련된 모든 문제들에 대해 감독하는 일을 했다. 이들 두 지부는 1915년 해외선교회(Board of Foreign Missions)라는 이름으로 통합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많은 선교사들의 군 입대를 하였고 이로 인해 선교지에서의 사역자들이 감소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해외선교에 있어서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분야는, 첫째, 적합한 선교사들의 선정, 둘째, 선교사들의 현지 적응,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교사들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에 관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첫째, 해외선교회는 '선교사들의 선정'에 관한 상세한 관련규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해외선교를 위한 원칙들(Regulations for Foreign Mission)』이란 소책자에 따르면,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 지원자들은 반드시 선교에 대한 열정과 성서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했고, 또한 가르치는 능력, 파송지의 언어를 배우는 능력과 그들이 원하는 사역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할 필요성이 있는 선교지로 파송될 경우에는 그 나이가 30세 이하로 제한되었다.5)

또한, 선교지의 문화와 기후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지를 알아보기 위해, 선교사 지망자들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상태가 면밀히 검토되었다.6) 특히, 두 지국이 통합한 후에는, 의료분야의 전문가들을 선호하여 모집하였는데, 하지만 의료선교사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일과 구원사역이 가장 중요한 사역임을 분명히 하였다.

둘째, '선교사들의 현지 적응' 문제와 관련하여, 해외선교를 위한 원칙들 안의 '선교사의 의무들'이란 항목에 따르면, 선교지의 언어를 습득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선교사들의 의무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소책자는 언어를 습득하는 단계에 관하여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선교사가 선교지에 도착한 날로부터, 그는 현지 언어를 배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리고 도착 일 년 후에는, 말하고 쓰는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필기와 구술시험을 봐야했다.

이 시험의 결과는 선교위원회에 보고되었고, 선교사들은 첫 번 어학 시험에 성공적으로 합격할 때까지, 실제적인 선교사역에 참여할 수 없었다. 만약 불합격할 경우 일 년 후, 다시 한 번 언어시험을 봐야했는데, 이때도 선교사가 현지 언어를 효과적으로 구사하지 못하면, 그의 선교사역은 중단되었다.7) 해외선교위원회의 회의록에 나타난 한국선교사들의 재정보고에서도, 한국의 캐나다 선교사들이 한국어를 배우기 위한 학습에 지속적으로 비용을 지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8) 맥켄지도 한국말을 배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소래로 간 목적도 한국말을 배우기 위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해외선교위원회는 사려 깊은 선교사들의 선정과 선교사들의 현지 적응을 위한 교육과정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한편, 선교사들과 그들의 사역을 위한 '신앙적 경제적 지원'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이 위원회는 계속되었던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국 내의 규모가 큰 교회들에게는 선교사를 지원하도록, 그리고 작은 교회들에게는 선교에 사용되는 비품들을 기증하도록 권장하였고, 때로는 전국적인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유사한 해외선교정책 하에 호주교회의 헨리 데이비스와 캐나다교회의 윌리암 맥켄지가 한국 복음화를 위해 부름 받는다.

2. 한국선교의 첫 시도

호주교회와 캐나다교회의 공식적인 한국선교를 가능하게 한 호주 선교사 헨리 데이비스와 캐나다 선교사 윌리암 맥켄지에게 많은 유사점들이 발견된다. 두 사람 모두 당시 해외선교사로서는 다소 늦은 나이인 30대 초반에 한국을 찾았고, 그의 사역을 자세한 일기로 남겼으며, 두 사람 모두 죽기까지 헌신했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죽음으로 인해 호주와 캐나다 교회의 공식적인 한국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 헨리 데이비스 (Joseph Henry Davies)

헨리 데이비스는 1856년 3월 22일 뉴질랜드에서 태어났다. 한국에 오기 전 데이비스는 국내선교를 위해 헌신했다. 또한 그는 사립학교(Caulfield Grammar School)를 설립하고 운영했다. 하지만 늘 해외선교에 대한 열정을 가슴에 품고 있었기에, 주중에는 교육자로 주말에는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헨리 데이비스는 하루속히 학교일을 정리하고, 그가 사역했던 인도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가 속한 성공회선교부는 선교사로서의 사역을 시작하기 전 안수받기를 권했고, 데이비스의 선교열정은 이러한 조건을 충족할 만큼의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러던 중 데이비스는 부산선교를 시도하던 월프(John Richard Wolfe, 1833-1915)가 작성한 조선선교의 급박한 요청이 담긴 글을 읽고 한국선교사로 자원하게 된다. 1889년 8월 5일 안수를 받은 후, 결국 성공회 파송이 아닌 빅토리아 청년연합회의 후원보증과 함께 빅토리아장로교회의 파송을 받아 한국에 오게 된다. 같은 해 8월 17일 멜본(Scots' Church)에서 그의 누이 메리와 함께 한국선교사로 파송 받고, 마침내 8월 21일 조선을 향해 그의 조국 호주를 떠나게 된다.

데이비스가 조선을 향하는 배안에서 행한 설교를 보면, 그가 선교를 의무감이 아니라 자발적 헌신으로 해 나아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9) 1889년 10월 1일에 데이비스는 나가사키에서 배를 갈아탔고, 이튿날 그는 한국에서의 처음과 마지막 장소가 된 부산에 도착했다. 데이비스는 부산 왜관을 살펴본 후, 오후에 배를 타고 부산을 떠났다. 그는 1889년 10월 4일 제물포에 도착했고, 10월 5일 오전 8시에 말을 타고 제물포를 출발하여, 오후 4시 경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데이비스는 선교협력을 위해 선교사 20여 명을 만났다. 이후, 선교정책에 따라, 반 년 동안 한국어 개인교습을 받는다. 그리고 주말에는 동료 선교사들이나 한국인 조사들과 함께 서울 인근지역을 방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데이비스는 한국말로 전도를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한국어를 구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한 다른 교파 선교사들과의 선교사공의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공의회 서기로도 일했다.

호주를 떠날 때부터 부산선교에 관심을 가졌던 데이비스는 부산의 첫 상주 선교사인 제임스 게일(James S. Gale, 1863-1936)에게 연락한 후, 1890년 3월 14일 도보로 부산을 향해 출발한다. 그는 수원, 공주, 남원, 하동, 사천을 거쳐 부산에 도착한다.

하지만 무리한 도보여행으로 인해 건강을 잃고, 서울을 떠난 지 약 3주 뒤인 4월 4일 부산에 도착했지만, 다음날인 4월 5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데이비스는 부산 복병산 기슭에 묻힌다. 후에 세워진 비석에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 함이니라(To Live, Christ; To Die Gain)'(빌립보서 1:21)고 새겨졌다. 안타까운 사실은 당시 천연두에 대한 예방접종을 멜본에서 할 수 있었지만, 데이비스는 하루 속히 한국에 가기 위해 예방접종을 하지 않았던 것이 그의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데이비스에 대해 언더우드는 '열정적이고 뛰어난 재능을 지닌 거룩한 사람이었으며, 한국에 온 가장 훌륭한 선교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10) 그리고 그의 죽음에 대해 빅토리아주장로교회 다음과 같이 애도했다.

'본 선교위원회는 한국에 파송한 초대 선교사인 데이비스 목사의 예측하지 못한 사망으로 인하여 우리 교회가 입은 아픔을 기록하고자 한다. 데이비스 목사는 맡은 사역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과 학자로서의 능력 또한 언행일치의 아름다운 인품으로 조선에서의 선교사역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우리 주님께서 스데반처럼 데이비스목사를 일찍 부르시고 영예로운 하늘의 상을 주셨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의 죽음을 인하여 여러 신도들이 감동을 받아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는데 힘쓰고, 그의 삶을 본받아 우리도 영광스러운 의의 면류관을 쓰게 되기를 바란다.'11)

데이비스의 죽음은 호주교회로 하여금 한국에 대한 사역을 본격화하고 첫 공식선교사들을 파송하는 계기가 되었다.

2) 윌리암 맥켄지 (William John McKenzie)

윌리암 맥켄지는 1861년 7월 15일 노바스코샤주 케이프 브레톤(Cape Breton)에서 태어났다. 그는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위원회 동부지부에 요청한 한국선교를 위한 제안이 거절된 후, 개인적인 친구들의 경제적 도움을 얻어 한국에 올 수 있었다. 그는 1893년 10월에 캐나다를 떠나 그 해 12월 12일 독립선교사의 자격으로 부산에 도착했고, 곧 바로 한국어를 배우기 위한 목적을 갖고 황해도 소래로 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한국 사람들과 다름없이 살며 사역하다가 숨져 그가 사랑하던 한국 사람들에 의해 장사되었다.

헨리 데이비스와 마찬가지로, 맥켄지도 캐나다 출발로부터 그의 죽음 전날에 이르기까지, 모든 선교사역의 내용을 그의 일기에 소상히 기록했고, 이로 인해 그의 선교사역이 오늘날 우리에게 자세히 전해지고 있다.

맥켄지가 사역했을 당시의 소래는 구한말 소용돌이 속의 한 현장이었다. 이로 인해 맥켄지는 절박한 위기상황을 수차례 경험하였다. 그는, '지난 겨울 두 번씩이나 나의 생명이 위태로웠다. 나는 그 때 죽는 줄 알았다. 그러나 다행히 가까운 지역에서 17명의 일본상인들과 3명의 승려들이 죽임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사람의 기독교인들도 동학교도들이나 다른 어떤 위협으로부터 희생되지 않았다'고 그가 처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12) 심지어 동학교도들은 맥켄지를 좋아했으며, 후에 소래교회가 건축을 추진하게 되자, 마을의 많은 동학교도들이 건축헌금을 했다. 서학을 반대한 동학교도들이, 그들 스스로 서학의 포교장소를 마련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맥켄지에게는 주위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간직하고 이 어려움들을 극복해 나가는 소래의 기독교인들을 보는 것은 그에게는 큰 기쁨이었고, 그의 선교사역을 지속시켜주는 거룩한 힘이었다. 맥켄지는 가장 큰 힘이 되었던 한국 첫 교회의 감격어린 예배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겨듣는다.... 아무도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하시는 바가 세상 끝 날에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으로 가득 차있는 기독교인들을 보는 것은 나에게는 큰 위로다.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혼란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기쁨에 가득 차있다.... 사람들은 차가운 추위와 눈보라도 마다하지 않고 하나님께 열심으로 예배하며, 만약 예배처소에 자리가 없을 때에는 밖에서 서서 예배를 드린다. 더 이상 앉을 곳이 없어서, 장막 뒤의 여인들은 아이들을 안고 서서 예배를 드린다. 더욱이 이러한 사람들이 뜨거운 회개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릴 때의 감격은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다.13)

맥켄지는 약 일 년 반 동안 소래에서 사역했고, 그가 캐나다를 떠나기 전 기도하였던 것처럼, 한국 땅에서 숨져 한국 사람들 곁에 장사되었다. 1895년 6월 22일 자 일기에 따르면, 그는 그의 마지막 순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매일 한 두 번씩 토함.... 밖으로 나가지 못할 것 같다. 너무 약해졌다. 오후에 내 몸이 차가운 것을 발견하였다. 옷이 많이 필요하다. 뜨거운 물병, 수분, 좀 나아진다. 이것이 죽음이 아니기를 소망한다. 한국을 위하여, 그리고 내가 한국인들처럼 살았기 때문에 죽었다고 말할 사람들 때문이라도 이것이 죽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마도 뜨거운 태양 아래서 다니며 차가운 저녁까지 밖에 앉아 있었던 것이 이유인 것 같다.14)

맥켄지의 일기는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끝나고 있다. 한국 교회의 요람으로 불리우는 소래에서의, 맥켄지의 헌신적인 자기희생의 삶과 신앙은, 하나님과 한국 사람들을 위해 부른 그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간증이요 찬송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이미 준비된 것이었다. 캐나다 밴쿠버를 출발하여 한국으로 떠나던 날,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배에 오르려는 지금, 나는 한 번도 내 조국을 떠나기를 원했던 적이 없었음을 기억하였다. 하지만 아무런 후회도 없다. 오직 내 은혜가 내게 족할 뿐이다. 이것은 희생이 아니다. 이제는 한국이 나의 조국이 되기를 소망할 뿐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오랫동안 그곳에서 주님이 맡겨주신 일을 열심히 하기를 소망한다. 만약, 죽음이 나를 삼키울지라도, 승리의 나팔이 울려 퍼지는 그 날까지, 한 줌의 재로 남아 한국 사람들 가운데 어우러지고 싶다.15)

좋으신 하나님은 이러한 맥켄지의 간절한 기도를 온전히 응답하셨고, 맥켄지는 그의 기도를 통해 서원한 것처럼 소래교회 근처 어딘가에 묻혔고, 그의 재는 지금도 우리의 주위에 남아 우리 가운데 어우러지고 있다. 호주의 헨리 데이비스와 캐나다의 윌리암 맥켄지의 죽음은 두 나라 장로교회의 공식적인 한국선교를 가능하게 했다.

3. 공식적인 한국선교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는, 헨리 데이비스의 죽음 이후, 마침내 1891년 10월 여전도회연합회(Presby- terian Women's Missionary Union)는 벨 멘지스(Bell Menzies, 1856-1935), 진 페리(Jean Perry, d.1935), 메리 퍼셋(Mary Fawcett, d.1937)을 그리고 청년연합회(Young Men's Sabbath Morning Fellowship Union)는 제임스 맥카이(James H. Mackay, d.1919) 목사 부부 등 5인을 공식적인 선교사로 파송하게 된다.

이들 5명의 호주교회의 공식선교사들은 1891년 9월 5일 호주 시드니를 떠나 10월 12일 부산에 도착한다. 그리고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윌리암 베어드(William Baird, 1862-1931) 부부와 캐나다선교사 로버트 하디(Robert Hardie, 1865-1949)의 도움과 함께 본격적인 부산경남지역 선교를 전개하게 된다.

캐나다장로교회의 공식적인 선교도 5명의 첫 공식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다. 캐나다장로교회는 맥켄지가 죽기까지 사역했던 소래마을의 기독교인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는다.

우리 소래마을은 축복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맥켄지 선교사의 삶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육신은 이제 우리 곁에 없고 우리는 기도 가운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간구하기는, 캐나다의 믿음의 형제들이 우리를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기를 바라오며 또한 맥켄지와 같은 분을 우리에게 다시 보내주시기를 소망합니다. 1895년 12월 26일 한국 황해도 장연 소래에서, 기독교인들을 대신하여 서경조 드림.16)

이와 함께 한국에 새로운 선교의 장을 열기위한 논의가 캐나다장로교회 안에서 본격화되었다. 1896년 4월 28일 헬리팩스에서 열린 해외선교위원회(Foreign Mission Committee)는 2,259.26달러의 맥켄지 선교사 추모기금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들이 한국 선교를 계속 추진할 수는 없으나, 선교의 필요성을 총회에 보고하기로 하고, 만약 한국 선교를 담당하고 있는 해외선교위원회의 서부지국이 한국선교를 추진할 계획이 있다면 이 추모기금을 양도하기로 결정하였다.17)

1897년 10월 5일에 열린 캐나다장로회의 매리타임대회(Maritime Synod)에서 한국에서의 새로운 선교의 장을 여는 것을 결의했고, 이듬해인, 1898년 2월 15일에 윌리암 푸트(William R. Foote, 1869-1930) 부부, 로버트 그리얼슨(Robert Grierson, 1868-1965) 부부, 그리고 던컨 맥래(Duncan M. MacRae, 1868-1949) 등 5명이 공식적인 한국선교사들로 임명된다. 이들은 1898년 7월 20일에 핼리팩스를 떠나 9월 7일 제물포에 도착하였고, 이것이 공식적인 캐나다장로회의 한국선교의 시작이 된다.

호주와 캐나다 장로교회는 각각 5인의 공식 선교사들의 사역을 시작으로 한반도 동남부의 끝 부산경남지역과 동북부의 끝 함경도, 만주, 시베리아 지역에서 태평양전쟁 발발까지 복음, 교육, 의료 선교 분야에서 헌신적으로 사역하게 된다.


▲ 조셉 헨리 데이비스 (Joseph Henry Davies)     © 크리스찬리뷰

맺음말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와 캐나다장로교회의 초기 한국선교는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두 교회 모두 헌신적인 선교사의 죽음을 통해 공식적인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각각 호주와 캐나다에서 헌신적인 국내선교를 펼쳤던 헨리 데이비스와 윌리암 맥켄지는 30대 초반의 늦은 나이로 한국을 찾아왔고, 일반적으로 보기에는 안타까운 최후를 맞았다. 하지만 이들의 죽음은 이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이 되었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두 교회의 공식선교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들의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두 교회 모두 5명의 첫 공식선교사들을 파송했다. 이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미국 선교부들과는 달리, 당시 조선의 중심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호주교회는 불교의 땅 부산경남지역에서 사역했고, 캐나다교회는 민족적 고난의 현장인 함경도와 만주 그리고 연해주 지역에서 사역했다.

이들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사역으로 인해 불교의 땅 부산경남지역과 또한 일제강점기하 한국교회 민족운동의 요람인 함경도와 만주 지역에서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죽음을 앞둔 호주선교사 헨리 데이비스와 이를 마음 아프게 지켜봐야 했던 캐나다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기도와 증언이 오늘을 사는 우리 부산경남지역 신앙인들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소망한다.

"저는 늦도록 데이비스선교사 곁을 지켰습니다. 그는 말할 힘도 없을 정도로 무척 지쳐 보였습니다. 데이비스 선교사와 저는, 우리가 건강하든지 아프든지 간에, 살든지 죽든지 간에,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구세주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오늘 오전 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있는 외국인묘역에 데이비스선교사는 묻혔습니다. 우리 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까지 데이비스 선교사는 여기에 잠들어 있을 것입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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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탁지일 
부산장신대학교 교수,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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