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장로교 시드니북노회 김창식 공로목사

김명동/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05/30 [09:19]
 ▲ 호주장로교 시드니북노회 노회장 폴 쿠퍼 목사로부터 공로목사 추대증서를 전달받는 김창식 목사                       ©크리스찬리뷰
 
시드니영락교회 제1대 담임목사로 사역했던 김창식(77) 목사가 호주장로교 시드니북노회(노회장 Paul Cooper) 공로목사(Minister Emeritus)로 추대됐다.

공로목사의 영예는 목회자로 현저한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한인으로서는 김창식 목사가 최초이다.

김창식 목사는 1982년 8월 시드니영락교회 담임목사로 부름을 받은 후 1998년 11월 사임하기까지 17여년의 세월동안 시드니교계와 한인사회를 위한 다양한 활동으로 한인교계는 물론, 호주교계로부터 인정받는 목회자로 자리매김하면서 시드니영락교회를 호주의 대표적인 한 교회로 성장시켰다.

시드니영락교회 이명구 목사는 “지금의 우리교회가 있도록 모든 기반을 잘 닦아 놓으신 분이시다”며 “영락교회 초대 목사로 부임한 이후 초창기 이민자들의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목회를 하시면서 많은 어려움을 감내하고 눈물의 기도로 이 교회의 성도들을 인도하신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부터 14년 전인 98년 11월. 예순세 살의 나이로 시무하던 시드니영락교회를 사임한다는 그의 결단은 후배를 사랑하는 마음과 겸허함을 소탈하게 표현한 것이었지만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 공로목사 추대 감사예배에서 인사하는 김창식 목사     © 크리스찬리뷰
호주 이민교회 초창기 목회를 담당한 장본인

바람이 스산한 지난 5월 11일, 노스라이드 스탬퍼드호텔 로비에서 김창식 목사를 만났다. 그런데 만나자고 해놓고 인터뷰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다소 의외였다. 황송하고 부족한 자신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자칫 교회에 누를 끼칠까봐 염려가 된다고도 했다. 몇 차례의 설득 끝에 어렵사리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물론 김 목사는 민감한 질문에는 소상한 답변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심경 등을 비교적 솔직하게 털어놨다.

- 공로목사 추대 감사예배를 드리면서 느끼신 점이 한둘이 아닐 것입니다. 소감을 말씀해 주시지요.

"사실 노회에서 1998년에 이미 공로목사란 지위를 결정하고 문서화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몰랐을 거 에요. 그리고 내가 교회에 누가 될까봐 오랫동안 사양해 왔어요. 그런데 문서로 한 게 중요한 게 아니고 공표가 중요하잖아요. 공표해야 시행이 되는 거니까.

그래서 앞으로 후배들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그동안 불편했던 서로의 관계를 치유하는 차원에서 이번에 예식을 통하여 공표를 하게 된 거지요. 이명구 목사님 이하 모든 교인들이 이 일을 위하여 많은 기도와 노력을 하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감사를 드리고요 기쁩니다.

▲ 창립예배를 드린 후 현판 제막식     © 크리스찬리뷰
이 행사 이후 내가 어떻게 처신을 해야 교인들에게 또 교역자들에게 도움이 될까를 생
각하고 있습니다.”

- 참 잘됐습니다. 노회나 총회도 체면이 서고 교회도 체면이 서고 목사님 명예도 회복이 되셨고요. 사실 교회 측에서 작년 30주년을 맞을 때 이와 같은 시간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교회를 사임하신지 14년이 돼서야 공로목사로 추대 되셨는데 그동안 서운하지는 않으셨습니까.

“허허, 내가 은퇴를 한 게 아니고 사임을 하고 교회를 떠났기 때문에 서운한 맘은 없었어요. 은퇴를 했다면 당연히 교인들이 예의상 은퇴목사로 은퇴식을 치러 줬겠죠. 다만 사임 후 만나는 사람마다 ‘은퇴 후 어떻게 지내십니까.’ 은퇴목사로 알고 그렇게 불러주니까 좀 곤란은 했습니다.”

- 목회를 더 하실 수도 있었는데 왜 일찍 그만 두셨습니까? 그것도 텔로피아 성전을 구입한 후 갑자기요.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으셨습니까?

▲ 김창식 목사 위임식     © 크리스찬리뷰
“건강이 안 좋았습니다. 서울에서 아시는 분이 와서 시내구경이라도 시켜드려야겠다고 보타니 정원을 걷는데 힘들어 하니까 그 분이 우리 집사람에게 ‘김 목사가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이니 빨리 병원에 모시고 가봐야 되겠다.’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쉬어야 되겠다고 그래요. 정말 쓰러지기 직전이었어요.”

이 말 끝에 김 목사는 “몸이 약하니 영성도 떨어지고 리더십의 한계를 느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를 아는 지인들은 교회의 발전을 위해서 후배 목회자에게 그 사역을 맡기기로 결단하고 사임하셨을 것이라고 말한다. 정년까지 기다리기에 자신은 유능한 후배들의 진출을 막는 거침돌이 될 뿐이라고. 그래서 그야말로 군소리 없이, 미련 없이, 새가 날아갈 때 먼지 하나 일지 않듯이 그는 강대상을 내려왔었다.

이명구 목사는 “교회사임 후 바로 적절하고도 격에 맞게 존경의 마음으로 그 모든 절차를 풀어야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러질 못했다”면서 “그 후로 시드니영락교회를 사랑하고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 불편함이 원만하게 해소되기를 기도해왔다”고 말했다.

“사실 교회를 떠날 때 참 감개무량했습니다.”

- 감개무량 했다고요?

“내 할 일을 다 했으니까요. 하나님 보시기에 부족한 사람인데 텔로피아 교회당을 구입하여 헌당예배를 드린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왜냐하면 입당예배까지만 하고 끝나면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시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을 했거든요. 그렇게 내 건강이 안 좋았어요.”

김 목사는 별로 표정을 바꾸지 않고 예사롭게 나온 커피를 마시며 담담하게 말을 계속하다가 이 대목에서 자세를 고쳤다.

- 요즘 근황은 어떠십니까?

▲ 창립 5주년 전교인 기념촬영(1986.7) 창립 6주년 기념 림인식 목사 초청 부흥사경회(1987)     © 시드니 영락교회
“가끔 이 교회 저 교회에서 부르면 가고, 그리고 FN PW(Foundation for National Park & Wildlife) 단체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어요. 한 달에 한 번 모여 공원 안에 있는 짐승과 곤충들을 돌보고 풀도 뽑고 센터에 가서 자료 정리도 하고요. 또 호주 재향군인회 멤버로 가끔 모임에 나가 교회도 소개하고 강의도 하고 있고요.”

- 호주 재향군인회 하고는 무슨 인연이 있습니까?

“군에 있을 때 주한 미8군 사령부에 있었거든요. 거기서 호주 군인하고 같이 일했는데 그게 인연이 됐습니다.”

- 제가 알고 있기로는 육군사관학교에 다니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래요. 육사 15기입니다. 2학년까지 공부하고 숭전대학교로 옮겨 공부를 마쳤지요. 그런 후 육군 보병으로 재 입대하여 미8군사령부에서 근무하게 된 겁니다. 나라에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기에 그 빚을 갚기 위해서 재 입대를 했는데 보안병과로 훈련을 받게 됐습니다.”

 
김창식 목사는 누구인가?

김창식 목사의 고향은 평북이다. 서울 대광학원 졸업 후 1955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그는 육군사관학교 2학년 공부를 마치고 숭전대학교 문리대로 옮겨 서양사를 공부했다. 1963년 육군으로 재 입대한 그는 주한 미8군 사령부에서 근무하다 전역했다. 전역 후 잠시 군납업체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그는 뒤늦게 소명의식을 깨닫고 장신대(통합)에 들어간다.

“제대를 하면서 취직을 했는데 군납을 하는 회사였어요. 책임자였는데 입출고를 장부에 엉터리로 기재하라는 거에요.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때려 치고 신학교에 간거죠. 그렇다고 목사가 될 생각은 없었고요. 단지 예수를 믿어도 진짜로 믿어보고 싶었습니다. 진실한 크리스찬이 되려니까 신학공부를 해야 되겠더라고요. 성경을 많이 읽고 주석을 봐도 이해가 안됐어요.”

1966년 장신대를 졸업한 그는 총회 산업선교 훈련원에서 훈련을 받고 대성목재, 한국타이어 등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노사정 연수과정을 수료했고 1968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 공로목사 추대 감사예배에서 찬송하는 김창식 목사와 김정희 사모     © 크리스찬리뷰

“당시 장신대 이종성 총장님이 산업선교회를 소개해 줄 때만 해도 산업선교회가 뭔지도 몰랐어요. 그래서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변조은 목사님이 호주 장로교회에서 지원하고 있으니 가라, 내가 보장한다, 해서 사역을 시작하게 됐는데 호주 선교사님이신 우택인 목사님과 함께 일을 했어요.”

이때부터 그는 뚝배기같은 뚝심으로 유명세를 날리기 시작했다. 노동자들, 불우 이웃들과 함께하며 고려대학특설 노동문제 연구소 제3기 수료, 한국 크리스찬 운전기사 신우회 회장, 연세대학교 특설 도시 산업문제 연구소 제 1기 수료, 동서울 도시산업선교회 실무담당을 거쳐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실무담당자로 고락을 같이 했다.

“이곳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노동자들을 훈련시키고 이들과 함께 민주화 운동을
 해나갔죠. 정의를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인권을 위해 투쟁하고 노동자들을 위해 투쟁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경제가 부흥하려면 결국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걸 깨닫게 됐습니다. 저개발국가로서는 이념, 투쟁보다는 우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 그래서 산업선교회와 결별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 후 복음주의적 목회사역에 전념하자 다짐하고 목회의 길로 들어섰는데 교회에서 부르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동안 생활은 아내가 책임을 졌어요. 약국을 했었거든요.”

▲ 지난 해 7월 창립 30주년을 맞은 시드니영락교회는 김창식 초대 담임목사와 초기 임시당회장을 지낸 스프링 목사를 초청, 기념케익을 자르며 감사와 축하의 사간을 가졌다.     © 크리스찬리뷰

그 후 서울새문안교회 부목사, 영락 중 상업고등학교 교목실장, 서울영락교회 부목사, 그리고 신광교회 위임목사를 끝으로 시드니 영락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된다.

그는 도시 산업선교 사역을 오래 해서인지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며 피식 웃는다.

▲ 31년전 영락교회 창립을 위해 헌신했던 스프링 목사, 이명구 목사(3대), 김창식 목사(1대), 배진태 목사(2대) 임시당회장을 맡았던 보아스 목사(위사진) ,당회원과 함께 기념촬영(아래사진)     © 크리스찬리뷰
“새문안교회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을 때였는데요, 담임목사이신 강신명 목사님과 도동거리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미스터 김’이라고 누가 불러요. 쳐다보니까 내가 권면하고 위로하던 집창촌에 있는 그 애이지 뭐에요. 그걸 보고 강 목사님이 내가 무슨 집창촌에 들어간 일이 있는 줄 오해하고 날 잘랐어요. 그런데 영락교회에서 날 부르더라고요. 그래서 영락상업학교 교목으로 들어가게 된 겁니다.”

김 목사는 여기에서 대뜸 권순형 발행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다.

“사실은 권 발행인의 부친인 권세창 목사님이 강신명 목사님께 저를 새문안교회 부목으로 추천을 해주셨어요. 그런 후 새문안교회 부목으로 서울 종로경찰서 경목을 겸하여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는데 그때 경목실장이 권 발행인의 부친이신 권세창 목사님이셨습니다. 서울 영락교회 부목사로 제가 서울 중부경찰서 경목실장으로 섬겼을 때도 권세창 목사님은 고문으로 계시면서 참으로 많이 저를 도와 주셨는데 그 은혜를 제대로 갚지 못했습니다.”

김 목사는 4대째 목회자 집안의 목사로 김정희(74) 사모와 슬하에 경민(목사), 경희, 경아의 1남 2녀를 두고 있다.

포도를 잘 맺도록 포도나무 이파리 역할을

- 목회를 하면서 아쉽다거나 제일 후회스러웠던 점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죽어야 되는데 아직도 죽지를 못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목회자로서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그런데요, 물론 모임자체가 중요하지만 모이는 장소가 마련돼야 교회운영을 다양하게 할 수 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목회는 잘 못했지만 교인들이 모이는 장소인 교회당을 마련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지요. 그래서 나는 목회 실패보다도 그런 역할한 것으로 만족하고 있어요.

그리고 인간적으로 보면 아픔은 지을 수 있지만 흔적은 지울 수 없다고 그러잖아요. 사실 목회하면서 교인들이 교회를 떠날 때는 섭섭한 마음이 많았지만 그로 인해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 감사했어요. 새순교회 일꾼들을 보면 영락교회 출신들이 많더라고요. 그 분들이 거기 가서 일을 잘하고 있잖아요.”

▲ 축하화환을 받은 김창식 목사 부부     © 크리스찬리뷰
- 교회에 특별히 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뭐 바람이 있겠습니까. 담임목사를 존경하고 잘 모시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명구 목사님의 목회철학을 보면 교인 숫자보다는 질적 신앙적인 성장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런 점에서 존경하고 잘 따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렇게 하려면 자신이 썩어져야지요.

그래서 저도 감사예배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이며 우리는 가지인데 나는 포도나무 이파리의 역할로서 가지가 포도를 잘 맺도록 하겠다고 말씀드렸던 거지요. 난 앞으로 우리 몸의 지체 중에 작은 지체인 발바닥 지체를 감당하는 삶을 살아가려고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남은 여생 복음의 선구자로 살아가겠습니다.”

- 이민교회에서 역사의 격랑을 살아오셨습니다. 후배 목사님들께 하실 얘기가 많을 것 같습니다.

“목회자들은 경쟁의식을 가지면 안돼요. 자기에게 맡겨진 양무리가 제한돼 있잖아요. 자기에게 맡겨진 양무리만 잘 돌보면 될 텐데 목회자가 남의 목장을 넘보면 되겠어요?”
그에게 ‘소원이 있느냐’고 물었다. “김 목사는 소원이 없다. 이만큼 대접을 받았는데”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지닌 기량과 재능 보다 훨씬 더 넘치는 삶을 살았다고 토로했다. 그것이 정말 감사하며 황송할 뿐이라고 했다.

“생각해 보니 실수도, 인간적 약점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허물을 가려주시고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시면서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한량없는 주의 은혜지요. 소원이 있느냐고요? 지금으로 족합니다.”

- 앞으로 남은 생애를 어떻게 보내실 계획입니까?

“후배 목사님들을 만나면 ‘김 목사님, 앞으로 나섰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얘기들을 많이 해요. 교회를 떠났으면 완전히 떠나야지요. 내가 아니더라도 일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지 말라고 그러지요.

▲ 인터뷰를 끝내며 환하게 웃은 김창식 목사            
© 크리스찬리뷰
이제 무슨 욕심이 있겠습니까. 그저 조용히 지내면서 후배들을 만나면 점심이라도 사주면서 격려해주고 또 지금처럼 두 곳의 자선단체에 나가 자원봉사자로 일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군 동기들을 찾아가 예수님을 전해주는 일입니다. 군 동기들이 200여 명이 되는데 다 떠나고 이제 50여 명 밖에 안 남았더라고요. 한국에 나가면 갈 데가 다 되었으니까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갈 준비 잘하라고 알려 줄 겁니다.”

마지막으로 시드니영락교회 초창기 시절에 대해 물었다.
“정말로 그 시절에는 주님이 주신 은혜의 감격으로 살았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오늘 주님을 위해 무슨 일을 행할까’라는 기대감으로 하루 종일 복음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저녁이 되면 인사불성이 되어 쓰러져 잤습니다. 자면서도 교회 부흥의 꿈을 꿨습니다.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만분의 일이라도 갚기 위해서 애썼습니다. 그 열정과 설렘, 간절함이 그립습니다.”
김 목사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삶을 한 개인의 체험 이라기보다는 한국교회 역사의 체험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그는 교회사임 후 14여 년 동안 “은둔생활을 해왔다”고 토로 할 만큼 ‘외로운 사람’이기도 하다.

인터뷰를 마치고 호텔 문을 나서는 김 목사의 뒷모습은 정말 푸근해 보였다. 기자는 사라져 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말씀을 암송해 본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며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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