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는 교회의 못자리입니다

하우스사역의 주역 이바울 목사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09/10/07 [11:37]


하우스는 교회의 못자리입니다


▲ 하우스사역은 가장 한국적인 전략으로 교파를 초월하고 작은 교회들이 실제적으로 성장하도록 지원하는 공동체운동이라고 강조하는 이바울 목사     © 크리스찬리뷰

정체성과 '위기의 남자'

이바울 목사(거창순복음교회 담임). 그는 부드러우면서도 부리부리한 개척자이다. 한국에서 복음화률 가장 낮은 서부 경남, 지역주민 3만 명밖에 되지 않은 조그만 소도시에서 1천 명 넘는 부흥을 이루고, 영남지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당을 건축하기까지, 그가 이룬 성취는 '개척교회, 작은교회' 목회자가 겪어야 할 모든 것을 압축적으로 경험했기에 개척교회, 작은 교회 목회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거창에 간 동기는 강력하게 헌신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어떤 지인으로부터 소개받고 들어갔습니다. 그 지역은 그때까지 순복음교회가 두 번 개척되었다가 두 번 다 지역에서 목회를 못하고 쫓겨나고, 철수했던 곳이라, 교회가 세워지지 않는 곳이란 소리를 듣고 갔습니다. 성령께서 감동 주셔서 그 지역에서 개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개척의 동기는 여느 목회자와 다름없었다. '성령의 뜨거운 감동!' 그것 없다면, 도대체 누가 개척을 한단 말인가? 그리하여 1990년 7월, 아무런 연고조차 없는 거창에 상가건물 2층에 15평을 임대하여 '겁없이' 교회개척을 시작했다. 그러나 개척 순간부터 '맨손으로 풀베기' '맨땅에 헤딩하기'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다름없는 살벌한 현실에 마주서야 했다.

"개척 당시부터 은사인 조용기 목사님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개척만 하면 조용기 목사님처럼 일취월장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개척 예배 한 다음 교인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똑같은 상황이 매주 반복되었습니다. 7월에 개척한 교회가 6개월 정도 매주 교인 한명 없이 아내 혼자 앉혀놓고 예배 드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내가 시험에 들었습니다. 보증금 1천만 원에 매달 40만 원 월세를 내야 하는데, 월세를 낼 수 없었어요. 그러니 보증금에서 월세가 잘려나갔습니다. 쌀 살 돈도 없었고, 6살이었던 아들 유치원도 못보내니 아내가 시험에 든 것은 당연하지요. 목회가 안되니 그만하자고 하더군요. '목회하지 말자'는 말에서 정체성에 혼란이 왔습니다. '목사는 뭘 하는 사람인가? 교회의 존재론적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가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위기를 넘겨보려고 조용기 목사님 목소리를 흉내내보기도 하고, 그것도 안되더군요. 부흥사를 모셔다 부흥회를 하면 부흥이 될 것 같아서 부흥회를 준비했으나 주변 교회 방해로 그것마저도 실패했습니다. 열심히 길거리 노방전도를 했지만 교인은 오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정체성에 혼란이 온 '위기의 남자'가 되었다. 가정, 가장, 교회, 목사로서의 정체성과 '자격론'에 끝없는 번민이 이어졌다. 그는 돌파구를 기도에서 찾았다. 그러자 길이 열렸다.

"그러는 가운데 밤마다 할 수 없어서 엎드려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9시부터 새벽 1시까지, 매일 밤 기도했습니다. 낮에는 전도하고, 밤에는 기도하는 생활을 하는데, 교인들이 가끔씩 오지만 정착이 안되었습니다. 들어왔다가 나가고, 몇 번 왔다가는 뚝 끊어지고 그래요. 병을 고쳐줘도 안되고, 귀신을 쫓아내도 안되고.... 이제는 뭘 해도 안된다는 절망감만 몰려오고 그랬습니다."


▲     © 크리스찬리뷰
▲ 거창순복음교회는 지역주민 3만 명 밖에 되지 않는 거창이라는 소도시에 영남지방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교회당을 세웠다.     © 크리스찬리뷰

비닐하우스에서 얻은 하우스 사역

이토록 엄청난 '성장통'을 앓고 있던 어느 날, 그에게 기도의 응답과 같은 영감을 얻었다.

"현재 교회 자리가 당시엔 논이었고, 강가에 둑길이었습니다. 둑길 따라 비닐하우스가 있었습니다. 그 지역은 지형적으로 분지이고, 평야가 없고, 비스듬한 산입니다. 그러다 보니 특별한 농사를 짓지 못하고, 비닐하우스 재배를 많이 합니다. 그날도 비닐하우스 주변을 산책하는 도중에 비닐하우스 농사짓는 농부에게 전도할 요량으로 말을 붙였습니다."

이 대화에서 그는 인생의 전환점, 사역의 변곡점을 찾을 수 있었다.

"어르신 뭐 하십니까?"

"고추 심습니다."

그는 고추를 어떻게 심는 지를 몰랐다. 그저 고추는 들판에 심는 줄 알고, 소도 듣고 웃을 만한 질문을 했다.

"고추를 왜 여기 심습니까?"

"여기다 고추를 심어서 키워서 밭으로 옮겨 심어야 됩니다."

"왜 두 번씩 심어야 합니까? 시간도 더 들어가고, 노력도 더 들어가는데..."

"밭에다 바로 심으면 고추 모종이 가늘고 약해서 많이 죽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예 비닐하우스에서 모종을 일정한 크기로 키운 다음에 밭으로 옮겨 심으면 죽지도 않고 잘 자라서 작황이 좋습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굉장한 아이디어가 진동했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키운 다음, 옮겨 심는다는 말에 반응이 강하게 왔습니다. 그때부터 그것을 묵상하면서 성경과 연관지어 보았습니다. 이런 원리로 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초대교회는 그 어려운 시절에 어떻게 전도했으며 교회를 세워나갔는가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닐하우스 원리를 목회에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테면 고추 농사를 지으면 안되고, 비닐하우스에서 싹을 내고 어느 정도 모종을 키운 다음 다음 밭에 옮겨심듯이, 모든 교인이 안믿는 불신자를 교회로 데려올 때, 고추 비닐하우스와 같은 기능을 할 수 있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그 모임에는 리더 ?명을 세우고, 그 리더 한 명에 도우미 두세 명을 세워서 그곳으로 불신자를 초청하게 했습니다. 그곳에서 복음의 씨를 심어 싹을 내게 하는 것이지요."

한 마디로 복음의 못자리요, 모판이었다. 이 비닐하우스 모판같은 곳이 바로 성도의 하우스였다. 씨앗이 싹을 잘 내고, 잘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 어떻게 돌볼 것인가도 골똘히 생각했다.

"그곳에서 세 가지를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첫째는 교회 가자는 말을 아예 하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예배 형태의 모임을 하지 않았습니다. 불신자들이기 때문에 교회나 예배에 대해 부담이나 반발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지요. 셋째는 규격화된 성경공부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가지, 씨 뿌리는 작업만 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왜 필요한가. 예수님을 믿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면서 복음을 심었습니다.

그곳에서 복음을 듣는 동안, 예수님을 자연스럽게 영접하더군요. 고추로 말하면 그 안에 생명의 씨가 심어진 것입니다. 그곳에서 다시 초청합니다. 두 번째 만나서는 다시 한 번 구원과 예수님에 대해서 정리해서 전합니다. 이와 같이 두 번, 세 번 정도 반복하는 동안 그들은 개인적으로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면서 스스로 교회(밭)로 옮겨오려고 하는 반응들을 보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찾아와 등록하고, 곧 바로 교회로 들어온 사람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교회에 정착하게 되더군요."

결과는 바로 나타났다. 곧바로 교회를 찾아온 사람들은 여전히 교회당이 낯설고, 목회자의 설교가 이해되지 않고, 들려지지 않는 부분이 많고, 또 낯선 환경과 문화적 이질감, 교회 봉사 등에 부담을 느껴 방황하고 정착을 못하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미리 모판(하우스)에서 이미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알고, 영접하고, 교회에 들어왔기 때문에 제일 어려웠던 정착문제가 아주 쉽게 해결되는 것을 경험했다.

"특히 그들은 자기가 이미 예수님을 영접하고(이미 모종이 건실構?자라서) 교회에 들어왔기 때문에, 처음부터 예배에 대한 은혜와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예배가 어렵거나 지루하지 않고, 좋다고 느껴요. 그들이 예배를 통해서 은혜와 성령을 체험하고 나니 다음에는 자기 주변의 사람들에게 '너도 한번 같이 가보자, 너도 한번 예수 믿어봐라'하면서,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전도를 자연스럽게 하게 되더군요. 그들과 연관된 가족 친구 이웃들이 똑같은 원리로 하우스에 들어오더군요.

복음을 전하고, 듣고, 영접하고, 자라는 것입니다. 마치 고추 모종이 자라듯이 말입니다. 2-3주 후에는 자연스레 교회로 오게 되고, 교회에 한 사람 한 사람 등록자가 생기면서 정착이 늘어나면서 교회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걷는 개척자의 길

이렇게 태동한 것이 소위 그의 하우스 사역(Church Growth Through House Ministry, CGHM)이다. 처음에는 비닐하우스에서 영감을 얻고, 목회에 접목시키면서 사도행전 2장 46-47절에서 성경적 근거를 찾아서 구체화한 것이다. 초대교회의 성장원리가 '성전과 집'이라는 두 개의 구조를 바탕으로 불신자를 데려오기 전에 한 단계를 먼저 거치도록 하여, 새신자 정착률을 높여나감으로 부흥의 역사를 이루었던 원리를 따르고 있다.

그런만큼 하우스사역은 철저하게 불신자 대상 전도사역을 통해 부흥의 역사를 이루었던 초대교회의 전략과 맥을 같이한다. 또한 한국 교회와 지방 중.소교회 농어촌에서 적용할 수 있는 가장 한국적 전략으로 교파를 초월하고 작은 교회들이 실제 성장하도록 지원하는 공동체 운동이기도 하다. 이바울 목사는 하우스사역의 기초는 목회구조를 세우는 일부터 시작된다고 밝힌다.

즉, 목회자에게 목적과 방향성을 갖는 사역신학을 갖추고, 이를 정리된 방향에 대한 구체적 적용방안을 마련하여 전략을 실행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 나가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성공적 목회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최초의 교회는 집에서 모였습니다. 집에서 떡을 떼었다고 하는데, 이 떡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떡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었더니 날마다 부흥했다는 데 착안했습니다. 집에서 떡, 즉 복음을 전하고, 음식 통해 교제를 했습니다. 복음 전하기 위해서 장소를 성도들의 집으로 정했습니다. 그런 사역을 할 성도들을 훈련 교육시켜 한팀 한팀을 세워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저와 아내가 직접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하우스사역을 할 수 있는 사람들만 세우는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한 팀에 리더와 도우미를 세웠다. 도우미는 주로 음식을 해오기도 하고, 리더를 도와주기도 하며, 명단과 주소를 관리, 주중에 심방도 하고 연락한다고 한다.

현재 '가정교회' '목장' '셀' '순' 등등의 이름으로 모이는 소그룹 운동의 개척자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그런 이름들이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있었고, 교회에서는 구역예배 외에는 비교적 최근에 가정교회, 목장, 셀 등이 생겼지요. 제가 처음 시작할 당시는 전혀 없을 때였습니다. 어떤 모델을 보고 따라가는 것이었다면 덜 어려웠거나 힘이 들지 않았을 것인데 앞서간 모델이 없었으니 참 어려웠습니다."

하우스역을 계속해 나가면서 그도 무수한 갈등과 번민 속에 헤어나오기 어려운 때도 여러 번 있었고, 시행착오도 많았다.

"한 번은 아내를 교단 주최 사모세미나에 데려다주면서 너무너무 괴로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여보 내가 교인 숫자가 없어서도 아니고, 돈이 없어서도 아닌데, 죽어버리고 싶소. 여기까지는 끌고 왔는데, 이 다음, 이후의 지속성 때문에 암담하오. 그 다음은 어디로 갈지 모르겠소. 교인들은 나만 바라보고 있는데, 죽어버리고 싶소'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이걸 조직해나가는 과정에서 엄청난 심적 고통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벤치마킹할 대상이 없어서 그 다음에 어떤 걸로 이어갈 지를 몰라 참 많이 어려웠습니다."

▲ 거창순복음교회는 지역사회를 위해 강연회나 음악회 등 각종 문화행사들을 지원하기 위해 교회당을 완전 개방했다.     © 크리스찬리뷰

기도 최우선 전략

'이 다음에 뭔지 몰라 죽어버리고 싶다'고 했을 때, 아니 그런 마음이 불쑥불쑥 들 때마다 그는 돌파구로 하나님을 찾았다. 그게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고, 가장 확실한 전략이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저에게 기도하게 하셨고, 제가 좌절할 때마다 가르쳐 주셔서 마침내 하우스 사역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전체 사역시스템이 3가지 큰 프레임으로 정할 수 있었습니다. 하우스 사역의 첫째 프레임은 신학으로, 성도들에게 학문적인 차원의 공부가 아닌, 인생의 목적 부분에 눈을 뜨게 해주는 것입니다. 둘째 프레임은, 목적이 분명해졌다면 그 목적을 이루어가기 위한 전술전략은 뭐냐고 제시하는 것입니다. 셋째 프레임은 조직입니다. 이 목적을 깨닫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전술을 가르쳐 사역에 투입하기 위해 훈련시키는 부분인데, 바로 평신도들을 조직화하여 사역자를 세우는 과정입니다."

물론 지금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고, 영적 저출산시대에, 아니 영적 마이너스 성장 시대에 교회성장의 확실한 사역으로 확신하며, 이를 전파하기 위해 CTS, CBS 등 방송에서도 소개하고, 방송사 주최로 부흥회도 하고, 전국 교단별 교회별 부흥회도 인도할 만큼 임상적으로 검증되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19년이란 피와 땀과 눈물로 갈고닦고 다듬으며, 기도로 다져왔기에 가능한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제 사역이 잘된 것이 아닙니다. 초창기 전도만 외치니 다른 데서 교회 다니다 나온 성도들 중에는 오히려 반대하면서 '전도만 하는 게 교회가 아니다. 전도하면 목사만 좋은 일 시키는 것이지 우리에게는 유익이 없다'하면서 계속 방해하여 교회가 분열하여 3번이나 무너졌습니다. 그러면서 '목사가 너무 경험이 없어 그렇다. 힘들게 목회한다'하면서 교인들을 분열시키고 다른 교회로 이동시켜 갔습니다."

아픈 과거사이기도 하다. 그럴 때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정체성의 혼란이 왔고, 그러면서 내가 무엇을 위해 목사가 될 것인가에 대해 사도행전 1장 3절 말씀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라는 분명한 확신을 다졌다고 한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에서 땅끝까지 예수께서 구주가 되심을 증거하라는 말씀에서 전도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사역임을 확신했다고 한다.

"성경 말씀 속에서 확신했기에 교회가 혼란하여 3차례 무너지는 과정에서도 흔들림 없이 전도에만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하우스 사역을 통해서 드러나게 열매가 나타났기에 이 방법을 통해 새신자를 한사람 한 사람 만들어 정착시켜 갔습니다."

말씀에 확신을 가진 결과 10년이 지나고 19년이 지나도 유행 따라 옷을 갈아입는 것이 아니라, 계속 흔들림 없이 하우스사역에 한 가지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고 거듭 밝혔다. 그러면서 더욱 '기도와 전도' 두 가지에 전념했다고 한다.

"19년이 지나는 동안, 두 가지에 전념했습니다. 하나는 교인 전체가 밤마다 모여 기도하는 '전교인 기도회'입니다. 9시에 모여서 전교인이 1천 날 기도회를 지속적으로 했습니다. 기도에 전력을 기울였더니 성령충만함이 유지되었고, 에너지가 고갈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생산해 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얻어진 힘을 전도에 쏟아냈습니다. 그래서 제 하우스사역의 평생 슬로건은 '오직 복음을 오직 성령으로'라고 정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을 목회원리로 삼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좀전에 말씀 드렸듯이 전도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기도와 전도가 하우스 사역 성공의 토대입니다. 기도하는 일은 성령의 능력으로, 그 능력으로 전도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 이바울 목사는 하우스 사역을 통해 열매가 나타났기 때문에 이 방법으로 새신자를 한사람 한 사람 만들어 정착시켰으며, "기도와 전도"에 전념했다고 말했다.     © 크리스찬리뷰

날마다 부흥하는 전략

한 마디로 하우스 전도사역은 현대 교회에 적용할 수 있는 가장 친근한 관계전도다. 철저하게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도사역으로 날마다 부흥하는 초대교회의 전략이며, 지역과 구역이 실제 성장하도록 지원하는 공동체운동이다. 매주 새가족이 등록하여 실제로 부흥될 수 있고 큰 교회는 건강한 평신도 사역자가 세워지므로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는 일 년에 몇 차례 실시하는 이벤트성 전도 전략이 아니다. 교회가 전도하는 교회가 되도록 구조를 세우고 일 년 365일 매일 전도가 되는 전략이다. 하우스 전도사역은 이미 교회에 오기 전에 마음의 문을 열고 관계가 이어졌으므로 95% 이상이 정착되는 것이 이제까지 경험이라고 한다.

성도들이 정착하면서 처음 상가 건물 2층에서 시작된 교회는 4번 이사하게 되면서, 15평 교회에서 120평 지하로 임대하여 들어갔고, 3번째는 150평 정도의 성전을 지어 이전했고, 네 번째는 현재 1천여 평 부지에 2200평 성전을 건축하여 입당하는 경이적인 성장세를 몰아가기도 했다.

데모하다 경찰 대신 하나님께 잡혀

"한국교회의 마이너스성장은 십자가의 정신을 잃은 데서 찾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공유해야 교회성장이 이뤄질 수 있습니다"고 역설하는 이바울 목사! 그는 한 때의 유행어인 전형적인 457세대(40대, 50년대생, 70년대 학번)이다. 소위 한국의 격동기에 '청년기의 방황'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경험한 세대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아픔이 그를 예수 믿게한 결정적인 동기가 된다.

전남 무안 출생인 그에게는 교회와는 상관없는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철저히 우상을 섬기는 불교집안에서 태어났다. 집안에 우환이 심해서 할머니는 동네 불교회 회장을 지내면서 온갖 정성을 들이면서 우환의 언덕을 넘어서보려고 했지만 안되었다.

"아버지 형제 6명 중에 5명이 열 살을 못넘기고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가 혼자 외동이 되신 것이지요. 26세 때 과부되신 할머니는 마지막 남은 아들 하나만을 데리고 이겨보려고 불교에 몰두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결혼하자 어머니에게 '너는 나보다 더 센 신을 모셔봐라, 해서 남묘호랑대교 잡신을 섬기면서 집안이 점점 내려 앉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 할머니께서 '네가 교회 다니고 예수 믿으면 네 아버지가 죽는다'는 말씀이 늘 저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지키기 위한 할머니의 필사적인 노력이었지요. 그러니 어릴 때 크리스마스 때 사탕 얻어먹으로도 교회 못갈 정도였습니다."

대학시절인, 1980년 신군부가 정권 장악하여 사회안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삼청교육대 만들어 데모하는 학생들, 정권 장악에 방해하는 자들을 잡아들일 때 그가 잡혀들었다. 끌려가던 도중 도망쳐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도봉구 보성교회로 숨어들어갔다. 여기에서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숨어있으면서 대학생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해들었습니다. 23세 때 최초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대학시절 사회반항적인 행동을 하다 삼청교육대 대신 간 곳이 교회가 우연이 아니었지요, 경찰 대신 하나님이 저를 강력하게 붙드신 거지요. 교회에서 숙식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 그 교회 사모님이 저를 찾아오셔서 '형제는 부모님이 예수를 잘 믿든지, 누군가 정말 중보하든지 둘 중 어느 경우냐?' 물으시더군요. 부모님은 아닌데 하고 거슬러 올라가니 5년 전 저를 전도했던 자매가 있었습니다.

당시 유행했던 대학생 미팅에서 만난 아가씨였지요. 저를 위해 계속 기도해주겠다고 하면서 순복음신문과 쪽복음, 신앙계 등의 책을 보내줬어요, 나중에 제발 그러지 말라고 하여 연락이 끊겼는데, 처음엔 스토커라 할만큼 지독할 정도로 전도했어요, '하나님께서 날 위해 강권적으로 기도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 당시 수소문하여 연락하여 예수믿는다고 하니 만나자고 하더군요. 그랬더니 5년 동안 저를 위해 기도했다고 해요. '이제 형제가 예수 믿게 되었으니 마지막으로 여의도순복음교회 철야기도를 가게 되면 나의 임무 끝'이라고 하여 여의도순복음교회 간 것이 80년 10월 경인데 순복음교회와의 처음 만남이지요."

그 이후 그는 한얼산기도원, 오산리금식기도원 등지를 다니며 뜨겁게 불처럼 받은 신앙을 형성했다. 그러는 사이 그의 마음에 신학하라는 성령의 감동이 불일듯 일어나, 86년 대조동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던 그해 7월 연고라고는 없는 거창으로 내려가 개척을 시작했다. 신앙의 고속도로를 달리듯 초신자에서 목사로, 1명 교인에서 1천 명 교회로 달려온 그의 신앙여정이었다.

그러면서 목회의 밑바닥을 처절히 경험할 때 하나님이 일깨워주신 최고의 전략으로 확신하는 하우스사역을 '작은 동역자'들과 나누고 섬기고 싶은 마음이 절절 끓어오르고 있었다. 특히 무임 목회자들이나 교회 개척을 준비 중인 목회자들이 재정적 부담 없이도 할 수 있는 최적의 성장비법이라고 강조했다.

"하우스사역은 마지막 시대에 주어진 교회성장의 대안으로, 특히 작은 개척교회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입니다. 물론 하우스사역은 철저히 불신자의 입장에서 진행되는 전도전략으로 지역적 특성에 맞는 다양한 실천방법이 접목되어야 합니다. 대형교회도 중요하지만 가능하면 작은 교회, 특히 성도수가 10여 명도 되지 않는 농촌교회도 시도해 볼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작은 교회의 목회자였고 농촌 전도의 어려움에서 개발된 것이기 때문을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궁금하여 여담처럼 질문했다.

"처음 전도지 보내주고, 중보해 주고, 순복음교회 데려간 그 자매가 지금 사모님입니까?"

"아니오, 그 자매는 어느 교회 사모님입니다. 지금도 양가가 서로 왕래합니다."

▲ 이바울 목사는 "기도와 전도가 하우스 사역 성공의 토대"라고 말한다.
© 크리스찬리뷰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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