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원칼럼] 사탄도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이인규/교회와신앙 | 입력 : 2012/06/01 [10:19]

평신도이단대책협의회 대표 이인규
무엇이든지물어보세요(cafe.naver.com/anyquestion) 카페 대표시삽
저서 <신사도운동의 정체와 비판>, <다른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기적과 표적을 행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과 표적이 “더이상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만일 더이상 기적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기적, 신비적 기적을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신비주의’를 배격해야 한다. 하나님의 기적은 믿고 기대하면서도 신비주의를 경계해야만 하는 이유는 뭘까? 신비주의가 무엇인지 정리부터 해보자.

먼저, 내가 요청할 때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항상 기적을 베풀어주신다는 생각을 갖는다면 그것은 신비주의이다. 어떤 자칭 선지자라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라고 자신이 부르는 순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바로바로 응답을 주신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이 신비주의자요 직통계시자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운전을 하다가 주차장에 들어갈 때마다 기도를 하면 주차할 곳이 나타난다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께서 점심식사를 무엇을 먹을지 일일이 가르쳐준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하나님이 어느 개인을 위해 주차장에서 항상 빈 장소를 만들어 주시는 분인가? 혹은 식사 시간에 무엇을 먹으라고 일일이 알려 주시는 분인가?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기도를 하여야만 하지만, 내가 기도를 할 때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직접 응답이나 기적을 베풀어 준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현실생활을 망각한 신비주의자와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지만, 항상 하나님께서 응답을 들려주시기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답변을 주시지 않더라도 지속적으로 그분의 응답을 간구해야만 한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만일 늘 자신의 기도는 100%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두 사람의 축구 감독이 축구 경기를 하였다면 하나님은 누구를 위해 승리를 허락하여 주실까? 이를 통해 생각해 보건데 분명히 하나님은 모든 기도를 다 들어주시지는 분이 아니다. 만일 내 기도를 하나님이 모두 다 들어주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나의 하인이나 종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진 것 아닐까?

사실 자신의 기도를 모두 다 들어주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실체는 기도 응답에 있지 않다. 이런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하기 위하여, 혹은 자신을 신령한 사람이라고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이런 주장을 하게 된다.

다음으로, 신비주의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놀라운 기적이 나에게 보편적으로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거나, 혹은 성경에 한두 번 예를 찾을 수 있는 매우 특별한 사건이 나에게 일상적으로나 보편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기도원에 가면 ‘바울의 손수건을 가져다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나았다’는 말씀을 본 떠 기도원 원장의 손수건을 사람들에게 던져서 기적을 베푼다는 곳도 있다. 평범한 막대기를 ‘모세의 지팡이’라며 사람 몸에 올려 능력을 받게 한다는 곳도 있다. 이런 것이 신비주의이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계시를 자신이 직접 들었다거나, 혹은 천국 지옥을 자주 왕래한다며 간증하는 것 등이 이러한 경우가 될 것이다. 이러한 간증은 거의 대부분 고의적인 목적으로 거짓말을 만들거나, 혹은 드물게 가사 상태의 뇌의 착각이나 꿈과 같은 환상에서 비롯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꿈과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일을 보여주시거나 예측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일어난 어떤 징조를 중요시하기도 한다. 성경에서 꿈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전하신 것은 성경에서 겨우 몇 건에 지나지 않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음을 알아야만 한다. 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려고 고집을 피우는 사람이 있다면 성경의 특수한 사건에 대해 잘못 받아들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알릴 수도 있지만 이는 매우 특수하고 드문 일로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신비주의는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가장 권위 있는 객관적인 기준으로 보는 것이다. 신비주의는 “신에 대한 체험적 인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비주의적인 체험은 성경보다 개인의 체험을 우선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성경을 객관적인 신앙의 기준으로 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신비적인 기적은 항상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공동체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이 되는 반면에, 개인적인 신비주의는 “자신과 신에 대한 특별한 관계”를 드러내려고 하는 것에 그 목적을 둔다. 신비주의자들은 자신의 위상을 위하여 자신의 체험을 드러내지만, 바울과 요한 같은 사도들은 구속사적 메시지를 먼저 드러내기 위하여 자신의 신비한 체험을 오히려 감추거나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예를 들면, 사도바울은 고후12:6~12에서 3인칭을 사용하여 그 체험을 잠깐 말하지만 그 표현이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한다고 말한다. 사도요한은 그의 환상을 비유적으로 기록하며 그 계시록을 가감하지 말라는 경고를 한다.

가장 많은 기적과 표적을 보였던 예수님조차 “요나의 기적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고 하며 표적을 보여 달라는 유대인들을 책망하신다. 또 성경은 기적과 표적을 항상 하나님의 역사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거짓선지자나 거짓그리스도, 사탄도 기적과 표적을 나타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첫째, 기적과 표적은 하나님에게로부터 온 것일 수 있지만, 사탄으로부터 온 것일 수도 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다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

둘째, 기적과 표적과 같은 가시적인 현상을 보고 추구하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 2:9~10).

셋째,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권능과 능력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경우도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오늘날 신비주의자들은 자신의 체험을 외부로 알리기 위해 홍보하고 자랑한다. 신비주의적 체험은 자랑할 것이 못된다. 신비주의는 타종교나 무속주의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며 오히려 모든 종교적인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라고 볼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는 의미다. 이러한 성향에 빠지면 그는 신비적 체험을, 신을 체험하는 유일한 경로로 여기고 더 자극적 체험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허비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다면 하루 빨리 이러한 형태를 벗어나야만 한다.

기록된 말씀에 충실한 믿음이 곧 반석에 세운 믿음이 된다.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다. 예수님의 탄생부터 죽으심, 부활하심, 다시 오심, 그 어느 것 하나 신비롭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말씀보다 자신의 체험으로 증거를 삼으려 하는 행위로서 성경이 금하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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